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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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서국, 신라와 충돌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자연정화 2018. 7. 23. 10:46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3> 이서국, 신라와 충돌

소국들에 차례로 칼날 끈질기고 강한 이서국 신라 온 힘 모아 정복

 

출처 : 매일신문 2014. 12. 03. 청도 노진규 기자

 

청도 각남면 녹명리에 있는 죽바위. 인근에 산성이 있어 신라군의 군사 주둔지로 추정된다.

 

청도 풍각면 봉기리 3층석탑은 이곳에 ‘정전사’라는 큰 절이 있었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가야정벌 전초기지로 사용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청도 풍각초교 조경화단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의 기단석.

 

이서국 시대에 처음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례산성은 석축이 아직 상당 부분 남아있다.

 

청도 지역은 해발 1천m가 넘는 높은 산 10여 개에 둘러싸인 분지다. 분지의 특성상 외부의 물이 유입되지 않아 수해를 겪지 않고 높은 산은 풍해를, 깊은 골은 한해를 예방해 준다고 한다. 역사 이래 이 지역에 이서국과 신라와의 충돌 이외에는 큰 전쟁이 없었던 점도 길지로 여겨지는 이유다.

청도천, 동창천 유역에서 일찍 도입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던 이서국은 신라 유례왕 14년(297년) 신라의 수도 금성을 공격했다. 이때 이서국의 일격은 결국 패망의 부메랑이 됐다. 신라에 복속된 이서국은 신라의 가야정벌 등 서진정책과 낙동강 진출의 전초기지로 활용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이서국은 신라를 마지막까지 괴롭혔던 강건한 나라였다. 이서국이 수세에 몰리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한 흔적은 여러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이서국을 복속시킨 이후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군사를 파견하여 직접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신라 수도 금성 기습공격

 

2세기, 신라가 힘을 키우며 점차 진한지역을 통할하게 된다. 3세기 초 신라는 감문국, 사벌국, 골벌국과 대구지역을 굴복시키며 경북 지역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와중에 이서국은 297년 신라의 수도 금성을 전격 공격한다.

 

이서국은 왜 금성을 공격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서국의 금성 공격을 기록하고 있으나 자세한 이유와 멸망시기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청도향토사학회는 다양한 근거와 추론을 내놓고 있다. 백제와 접경하게 된 신라가 가야공격을 도모하며 길목인 이서국을 치려 했다는 것이다. 신라가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반발 가능성이 있는 소국들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며 칼날을 겨누자 이서국은 심각한 압박을 받았다. 반면 이서국이 신라에 2세기 초 흡수됐다고 보는 연구자들은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신라의 과도한 공물과 군사적 요구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서국이 먼저 반격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를 기습 공격한 이서국은 동창천을 따라 운문, 산내, 건천을 지나 경주 남산방면으로 진격했다. 이서국은 금성에서 장기간 싸우며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죽엽군'이라는 원군이 홀연히 나타나 막아야 할 정도로 이서국이 강대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때 패퇴한 이서국은 오례산성 전투의 마전암 전설과 마지막 이서산성의 싸움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서국의 최후 보루 이서산성 전투 또한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신라는 이서국을 정복한 다음 군사를 주둔시켜 직접지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서산성의 이름과 관련해 견성(犬城) 또는 폐성(吠城)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는 이서산성이 자리한 주구산이 달리는 개의 모습을 닮아 형상화했다는 설과 이서국을 비하해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있다.

 

◆신라를 구원한 죽엽군 설화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했을 때 등장해 신라를 구한 미추왕의 '죽엽군'(竹葉軍)설화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청도향토사학회는 당시 진한 지역의 다른 소국들이 신라의 간접지배 방식의 통제를 받고 있을 때 이서국은 신라에 대항해 독립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신라의 대외팽창정책에 반발해 먼저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토사학회 김태호(청도고 교사) 부회장은 "신라를 구한 죽엽군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고 복속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국경이나 건천지역 등 중간 거점지역에 나가 있던 신라군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향토사학회 강래업(모계고 교사) 회장은 "사로국 군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영천 등 인근 국가의 사병집단이 원군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영남대 이형우 교수는 "사로국이 일대 위기를 맞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에서 등장한 죽엽군 설화는 막강한 이서국의 세력을 죽엽군의 출현으로 퇴치한 점과 선왕인 미추왕의 음조지공(陰助之功)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 초점"이라고 했다. 김씨왕계의 시조인 선대 미추왕을 부각하여 선왕의 음덕을 미화하고, 왕권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한 설화적 내용 자체에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가야정벌 군사기지로

 

신라는 이서국을 병합하고 가야 정벌을 위한 서진기지로 삼았다. 신라는 이서국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전략적 요충지인 오례산성에 구도성을 설치하고 경내에 솔이산, 경산, 오도산 3성을 두어 군사적 통제를 가했다. 또한 각지에 부곡을 설치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이서국 영역 일부를 잘라 밀양에 포함시켜 완전한 지배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가야 정벌을 위한 신라의 군사 주둔지는 각남면 녹명리 죽바위, 풍각면 봉기리 3층석탑 등의 유적 등으로 추정된다. 경주에서 동창천을 따라 거점지 오례산성을 거쳐 각남면 죽바위, 풍각면을 지나 창녕으로 가는 직선상의 길에 군사주둔지들이 분포한 셈이다.

 

이와 함께 신라는 이서국의 기존 지배집단을 철저하게 와해시켰다. 영남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는 고대국가의 대형분묘와 유적이 청도에서만 발견되지 않는 이유다. 이후 이서국은 7세기 초 신라가 대작갑사(운문사)를 거점으로 원광국사가 세속오계를 제시하며 여러 화랑을 길러낸 화랑정신 발상지로 거듭났다.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은 "이서국이 워낙 강했고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신라가 온 나라의 힘을 모아 이서국을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도 풍각면 봉기리 3층 석탑…옹기 흔적에…일제강점기 고위층 거주 추정

 

청도 풍각면 풍각초등학교 옆 봉기리 3층석탑(보물 113호)은 일제강점기부터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석탑은 각북방향 도로를 옆에 두고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최근 도로개설로 인한 일부 발굴조사에서 하수관거로 옹기로 사용한 흔적이 발견돼 이 지역에 일제강점기 고위층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이 탑은 2기가 있었는데 동탑은 1930년쯤 무너졌고, 서탑만 1935년부터 보호되고 있다. 상륜부는 없어지고 기단부와 탑신부만 보존되어 있는 탑의 높이는 5.47m 정도다. 바로 이 탑이 있던 평지에는 천정사(天井寺) 또는 정전사(停戰寺)가 있던 자리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법흥왕이 가야지역 정벌을 독려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가 이미 가야가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전사로 불리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인근으로 추정되는 풍각초교는 절터의 기단석과 연화석등 좌대 등이 발견됐다. 이 학교가 2004년 강당 신축을 할 때 벌인 유적조사에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57기의 유구를 조사해 유물 700여 점이 출토됐고 모두 교내 유물전시관에 보존돼 있다.

 

각남면 녹명리 죽바위 또한 신라 군사 주둔지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20m의 널따란 바위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다. 신라가 가야를 치기 위해 설치한 서기정(西畿停)의 흔적을 설명해주는 유적이다. 바로 인근에 산성이 있고, 신당리에는 두야보부곡이 있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