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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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화적 기반과 특징 /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자연정화 2018. 7. 23. 10:50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4> 문화적 기반과 특징

온돌식 움집서 공동생활…철기문화 직수입 후 농경사회 꽃 피웠다

 

출처 : 매일신문 2014. 12. 10. 청도 노진규 기자

 

청도 송서리 유적발굴조사 모습. 풍각초등학교 다목적교실을 신축하기 위해 발굴됐다. 경북도문화재연구원 제공.

 

이서국은 삼한시대 진한 12국 가운데 청도지역에서 유력 정치집단으로 성장한 고대 왕국이다. 학계와 고고학계는 이서국이 세력을 펼친 시기를 기원 전후에서 3, 4세기까지로 추정한다. 특히 지석묘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집단세력을 이서국의 모체로 보고 있다.

하지만 폭넓게 분포한 청동기시대 유적과 달리 이서국 시대 대형 고분군이 발견되지 않아 많은 의문을 갖게 했고, 문헌 기록에 대한 신빙성 문제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3년 운문댐 건설과 신대구부산고속도로(2002~2003년 발굴), 성곡댐(2006~2008년 발굴) 건설 등 유적 발굴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고고학적 성과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의문에 싸인 이서국에 대한 실체는 학계와 고고학계에서 앞으로 조금씩 가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서국의 문화적 기반과 특징은 현재 확인된 여러 유적조사 결과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서국의 뿌리, 청동기 유적

 

청도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은 동창천 상류인 운문면 오진리 바위그늘 유적과 청도천에 인접한 화양읍 진라리, 각남면 신당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시기는 8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문댐 수몰지역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오진리 유적은 암벽이 돌출된 자리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그늘을 활용한 살림터 유적이다. 돌도끼와 돌화살촉, 숫돌 등이 나왔고, 조개팔찌, 바다조개가 출토돼 해안지방과의 교류도 보여주고 있다. 표토층 맨 아래 4층에서 발견된 토기는 국내에서 출토된 예가 없어 고고학계는 '오진리식 토기'로 부르고 있다.

 

청도 지역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4세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부터 농경을 기반한 마을 유적이 청도천과 동창천 선상지와 지류가 흐르는 충적지대에 대거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도 풍각면 송서리와 각남면 신당리`화리, 화양읍 서상리`진라리, 청도읍 송읍리`유호리`사촌리, 운문면 오진리`신지리 유적 등은 당시의 주거문화와 생활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지석묘가 조성된 주변은 대부분 마을 유적이 있었다. 따라서 영남지역 지석묘 최대 밀집지역인 청도에서 청동기시대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청동기 유적의 집 자리는 반지하식 움집으로 기둥 자리와 화덕 자리, 저장구덩이 등이 발견됐다. 무덤에서 발견된 의례유적은 비파형동검, 민무늬토기, 마제석검, 돌창, 돌도끼를 비롯해 석기 제작을 위한 몸돌 및 석재 등이 나왔다.

 

학계는 진라리 유적 등에서 마제석검과 위세품이 출토되고, 대형 주거지를 중심으로 에워싸듯 소형 주거지가 배치되고 있는 특징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청도읍 범곡리와 화양읍 진라리`송읍리, 각남면 화리 지역 등은 대규모 취락 유적과 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어 이서국의 중심지역으로 추정된다.

 

고고학계 관계자는 “청동기 초기까지는 동창천 유역이 더 발전하다가 중기 이후는 유역면적이 넓고 구릉지대가 많은 청도천 유역이 지역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규모 발굴조사 등 성과

 

이서국과 직접 연관된 고대국가의 총체적 문화기반과 특징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이 지역에 고총고분 등 대규모 유적이 분포하지 않았고, 이에 따른 유물 발굴조사 등 연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서국이 존재한 삼한시대는 지석묘에 뒤이어 목관묘가 등장했고, 움집에는 온돌이 사용됐다. 또 철기와 청동기 유물이 함께 사용되고 각종 무기와 농공구가 본격 만들어지는 시기다.

 

최근 청도 풍각면 성곡리와 송서리, 화양읍 진라리, 청도읍 송읍리, 각남면 신당리 유적 등의 발굴 성과는 이서국과 연관된 단서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성곡리 유적은 경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06~2008년에 걸쳐 발굴했다. 이서국의 옛 터에서 가장 대규모로 발굴된 유적이다. 풍각초등학교 주변 송서리 고분군과 함께 이서국 전성기의 서민문화를 잘 나타내주는 고고학적 자료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목곽묘(나무곽무덤)와 석곽묘(돌곽무덤), 석실묘와 목탄요, 주거지 등 총 919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이 중 322기가 조사됐고, 3천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각종 토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농기구, 공구, 말갖춤 등 철기가 대거 출토돼 당시의 농업생산력과 높은 생활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정밀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환두대도(고리손잡이 긴 칼) 등의 무기, 말재갈, 은장식허리띠가 출토되어 당시의 지배계급은 윤택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북도문화재연구원 박재교 실장은“성곡리 유적은 분묘, 주거지, 목탄요 등으로 구성된 복합유적으로 창녕지역과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송서리 고분군은 2004년 이서국의 집 자리와 함께 1~5호 목곽묘가 조사됐다. 이서국이 국가 단위로 진행하는 과도기적 문화 단계에서 제작된 굽접시, 항아리가 대량 출토됐고, 특이하게도 토제 다리미와 뿔잔이 발견됐다.

 

2002년 영남문화재연구원과 2008년 한빛문화재연구원이 각각 조사한 진라리 유적 2곳은 청도지역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수혈주거지)이 확인됐다. 신석기 말기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됐고, 국내 최대 길이의 마제석검과 곡식 이삭을 따는 반달돌칼, 석촉, 단도마연토기 등이 나왔다.

 

청도향토사학회는 이서국에 대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유등연지 등 수리시설을 갖추고 벼농사를 발전시킨 농경사회로 보고 있다. 주로 움집에서 살며 공동작업을 하고,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제천행사와 놀이를 즐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도향토사학회 김태호 부회장은 “이서국은 폐쇄적인 지형의 영향으로 철기문화를 수입한 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주변에서 수용한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지배체제를 갖춘 국가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