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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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라 수호하던 옛 성터 /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자연정화 2018. 7. 23. 10:41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2> 나라 수호하던 옛 성터

백곡토성에 거주하던 왕, 적 침범 땐 이서산성 옮겨 항전

 

출처 : 매일신문 2014. 11. 26. 청도 노진규 기자

 

 

신라 수도 금성을 공격한 이서국은 전열을 정비한 신라군의 대반격을 받는다. 신라를 놀라게 했던 만큼 이서국은 처절한 보복공격을 받아 패망했다. 이서산성에서 최후 결전을 치른 후 산속으로 은신했다는 이서국 왕실과 귀족들은 이서국의 전설 속에만 남아있다.

 

이서국은 비슷한 시기 삼한시대 소국들에 비해 출토 유물이 드물고, 역사기록에도 겨우 이름만 남아있다. 이 때문에 그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애를 태우는 고대 왕국이다.

 

다행히 고대 이서국의 왕성(王城)으로 추정하는 백곡토성과 전쟁 시 군사적 용도의 이서산성, 오례산성 등 성터가 남아있다. 또한 왕성, 산성과 관련한 여러 지명과 구전, 석축을 쌓았던 다수의 성터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백곡토성은 이서국 왕성인가?

 

청도 화양읍 토평1리는 속칭 백곡마을이다. 이 마을은 유등연지에서 멀지 않으며, 청도지역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뒤는 낮은 구릉이 타원형 형태로 감싸고 있다.

 

백곡토성(栢谷土城)은 바로 백곡마을을 둘러싼 100~200m의 야산 구릉을 따라 앞쪽인 남쪽은 청도천이 자연적 요새를 이루고, 동·서·북으로 토성을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토성 대부분이 과수원 경작으로 깎여나가거나 밭둑으로 이용돼 외형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런데 백곡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바로 옆 과수원에는 ‘이서국 성지’(伊西國 城址)라는 지표석이 있다. 동쪽 입구 사면에서 노출된 토성 성벽에 대해 지난 1990년 성벽 유구 지표조사를 벌였다. 이서국과 직접 연결할 만한 유물은 찾지 못했으나 토성의 축조기법에 대해 주목하면서 지표석을 세웠다.

 

당시 성벽 유구 확인서에 따르면 화강암계 석재로 성벽 기저부에 석축을 2, 3단 쌓은 후 진흙을 이겨 층층이 쌓으면서 다짐하는 판축토벽 기법으로 축조했다고 기록돼 있다. 성벽 유구는 약 2㎞에 걸쳐 있고, 토성 높이는 2.6m 정도로 추정했다.

 

이에 대해 일부 연구자들은 낮은 구릉은 방어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구릉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고, 가까이 유등연지도 있어서 식수원으로 활용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토성 사방에는 버드실목(유등1리), 와목(토평2리와 와촌 사이), 양원목(양원리), 진터목(유등2리), 근바위목(고철리) 등 지대가 낮고 뚫린 곳에는 일종의 경계초소로 볼 수 있는 ‘목’ 지명이 정연하게 남아 있다.

 

청도향토사학회는 백곡리는 당시 왕성을 중심으로 방어와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배후지를 끼고 있어 지리적 입지가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즉 백곡토성은 평시에는 왕이 거주하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구릉을 따라 동남쪽으로 4㎞쯤 떨어져 있는 이서산성에서 적을 맞아 항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서남쪽인 각남면 일곡리 토성은 백곡토성을 멀리서 보호하며 풍각 방향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청도의 주산인 남산의 은왕봉 산정에 있는 작은 석축은 이서국의 중심인 백곡토성과 이서산성을 내려다보는 지형으로 망루 구실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청도향토사학회는 백곡토성은 이서산성, 일곡토성 등 주변의 여러 군사시설에서 보호를 받았던 이서국의 왕성으로 보고 있다.

 

◆군사적 거점 이서산성과 오례산성

 

신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 이서산성(伊西山城`일명 주구산성, 폐성)과 전초기지 오례산성(烏禮山城·일명 구도산성, 오도산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는 이서국의 군사적 거점이자 천혜의 요새였다. 신라는 이서산성 공략에 실패하고 일단 운문사 쪽으로 군사를 물린 후 다시 방책을 세워 공격해야 했다. 이서산성은 이서국의 최후 방어막이자 보루였던 것이다.

 

또한 청도읍과 매전면 경계의 산 정상에 걸쳐있는 오례산성은 신라의 입장에서도 창녕 지방의 가야 공략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서산성은 현재 경부선 철로가 있는 산성철교 부근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다.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주구산성으로도 불린다. 삼면이 절벽이고, 북쪽 능선만 백곡토성 방면으로 열려 있다. 북쪽 능선을 제외한 통로는 겨우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도군 관계자는 “이곳은 정상이 219m에 불과하지만 절벽 위에서 청도천 상·하류와 곰티재 방향 등 사방을 경계하고 방어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라고 했다.

 

이서국 관련 향토사료에는 이서산성이 지형적인 특성상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으나 결국 패망하고 왕과 귀족들은 화양읍 신둔사 뒷산의 은왕봉으로 숨었다고 한다. 왕과 귀족들은 피신하면서 화양읍 서상리 공설운동장 인근 ‘금장들’에 수많은 금은보화를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례산성은 청도읍 거연리와 매전면 사촌리에서 올라갈 수 있다. 산 정상부에 펼쳐진 산성은 남북 1㎞, 동서 1.5㎞에 전체 둘레는 4.6㎞에 이른다. 사방의 가파른 능선을 이용해 축조된 성벽이 펼쳐져 있다.

 

거연리 방면 서문지에 이르면 잡목 사이로 산중 분지가 나타난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아랫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다는 농경지와 논두렁 흔적이 있다.

 

기록에는 산성 안에 3개의 개울, 5개의 못, 3개의 샘이 있어 오랜 전투에도 식량과 식수 등이 거뜬했다는 것이다. 현재 2곳의 우물과 2곳의 개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라는 명산대천에 큰 제사를 지내던 3산의 하나로 청도에 혈례산을 두었는데, 혈례산은 지금의 오례산성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도향토사학회 김태호 부회장(청도고 교사)은 “신라가 가야를 치기 위해서는 경주에서 거의 직선상에 있는 동창천, 청도읍 밤재, 풍각 차산면, 마령재를 따라 지나가야 하며, 중간에 고립되지 말아야 할 길목이 바로 오례산성이었다”며 “이서국은 결국 신라의 서진정책으로 병합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목조데크·흙길 따라 쉬엄쉬엄…격전지 오례산성 탐방 쉬워진다

 

#내년 8월까지 사업비 50억 들여 진입로·탐방로 등 기반시설 조성

 

신라의 공격으로 이서국이 패망할 당시 격전지였던 오례산성 싸움에 대해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짧은 기록이 남아 있다. ‘오랫동안 전해오기를 이서국이 신라와 싸우다 져서 많은 군사와 말이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 하여 뒤에 사람들이 마전암(馬轉巖)이라고 불렀다.’

 

이 기록만 봐도 당시 이서국과 신라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신라군은 경주에서 건천을 지나 동창천을 따라 내려와서 이서국의 군사요지인 오례산성을 공격했을 것이다.

 

이서국 군대는 동창천을 등지고 방어했으나 마전암 싸움에서 패하고, 마지막 방어선인 이서산성 싸움으로 옮겨가게 됐다는 것이다.

 

청도군은 이런 이서국 역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오례산성 일대에 대해 관광자원화에 나섰다. 군은 2015년 8월까지 사업비 50억원을 들여 오례산성 진입로 확보 등 기반시설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군은 밀양 방면 국도 25호선에서 청도읍 거연마을을 지나 산중턱까지 1.4㎞가량 도로를 너비 8m로 포장해 버스가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내고 있다. 이곳 주차장에서부터 산성 부근까지는 목조데크와 흙길 탐방로가 1.1㎞가량 이어진다.

 

군은 청도읍을 조망할 수 있는 산 정상의 복원계획지구는 야영장, 산악자전거 등 역사와 레저를 체험할 수 있는 적지로 보고 있다. 군 관계자는 “천혜의 요새였던 자연지형을 살리고 축성한 산성과 산중 분지의 이점을 살려 향후 체험·휴식공간 유치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