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일본 속의 아라가야를 찾아서 (6)아라가야 찾는 일본인

자연정화 2018. 7. 23. 10:13

일본 속의 아라가야를 찾아서 (6)아라가야 찾는 일본인

일본학자들, 이미 90여년전부터 함안서 발굴 조사...

최근엔 일반인들도 임나일본부설 좇아 현지 방문

 

출처 : 경남도민일보 2006. 11. 15. 조재영/조현열 기자

 

'아라가야'는 우리나라 고대사 뿐만 아니라 한·일 고대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본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가야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다. 가야와 일본(왜)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를 알면 일본의 고대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리이류조기념관에서 아모토시오 전 관장이 취재팀에게 도리이류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기념관은 도쿠시마현에서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큰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도리이류조 = 동경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였던 도리이류조(1870∼1953년)는 1914년 우리나라로 건너와 함안 말이산고분군중 하나(현재 1호고분으로 추정)를 발굴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이 틀리지 않다면 당시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었을 것은 뻔하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일 두 나라에서 아라가야와 관련해 그가 발굴한 유물이나 발굴보고서 등이 확인된 것이 없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도리이류조 교수가 발굴한 유물이든 발굴보고서든 한·일 두 나라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리이류조 교수는 당시 동경대학교가 부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조선총독부의 허가와 지원을 받아 발굴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반드시 동경대학이나 조선총독부에 '발굴보고서'를 제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취재팀은 도리이류조 교수가 남긴 '유물'이나 그가 남긴 '발굴보고서'를 보면 아라가야의 본모습을 밝히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동경대학 박물관을 방문했다.

 

▲ 도리이류조가 남긴 조선 조사 사진자료집. 동경대학 박물관내 복도 진열장에 보관돼 있는 것을 취재팀이 발견했지만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동경대학 박물관은 일반 박물관과 같은 전시 중심의 박물관이 아니라 학문적 연구를 위한 자료 보관시설 성격이 강하다.

 

동경대 사오토메 마사히로 교수가 직접 안내해 박물관을 둘러볼 수는 있었지만 도리유초 교수의 자료가 소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표본자료실-인류형태연구실'은 들어갈 수 없었다. 관리자가 나와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취재팀은 대신 그 건물 복도에 세워진 진열장 속에서 도리이류조 교수가 남긴 사진자료중 '조선 조사 사진자료집 1∼3권'을 발견했다. 이 속에는 분명 그가 90년 전 필름에 담은 '우리나라'가 있을 터이고, 또 그 중에는 '함안 아라가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오토메 마사히로 교수의 허락을 얻어 사진촬영까지는 했지만 내용을 볼 수는 없었다.

 

동경대학교 대학원 사오토메 마사히로 교수

 

 

△이마니시류 = 교토대학과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이마니시류(1875∼1932년)는 일제시대 조선사 연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학자이며 식민주의사학의 기초를 만든 실증주의 사학자 중 한사람이다.

 

이마니시류 교수는 1917년 조선총독부 고분조사위원으로 위촉돼 함안과 창녕, 경북 선산과 고령 성주, 경기도 등지를 조사했다.

 

그는 그해 10월 함안지역을 조사한 뒤 총독부에 돌아가 '대정(大正) 6년도 고분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는 함안군의 지세, 연혁, 고분, 산성, 왕궁지, 입석, 불교유적 등을 간략히 언급하고 말이산 34호(현4호)고분과 30호(현5호)고분, 5호(현25호)고분 발굴조사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때 그는 34호고분에서 사슴뼈로 만든 칼손잡이가 발굴됐는데 여기에 일본의 고분시대 대표문양인 직호무늬(여러개의 원과 직선을 교차해 만든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써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려 했다.

 

이마니시류 교수는 세조실록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수 만권의 책을 수집해 남겼다. 그가 죽은 뒤 중국 관련 도서는 교토대학 문학부에, 한국 관련 도서는 천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됐다.

 

취재팀은 그가 남긴 '함안 아라가야'관련 문서(기록)를 찾기 위해 천리대학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전문사서인 사와이씨 안내를 받아 5층 '귀중본실'에서 이마니시류 교수가 남긴 장서를 확인했다. 그 속에는 '조선고적연구위원회'의 특정유적 발굴조사계획, 발굴관계자 회의록 등 생생한 자료가 숨어 있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함안 아라가야'와 관련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취재팀은 이 곳에서 <함주지>를 필사한 <함안지>를 발견하고 시간을 두고 찬찬히 찾아보면 '함안 아라가야' 관련 기록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사오토메 마사히로 = 동경대학교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한일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사오토메 마사히로(55) 교수는 2000년 이전에 벌써 네 차례나 함안을 다녀갔다. 그는 함안의 말이산고분군과 왕궁지 등의 유적 위치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그가 아라가야를 주목하는 이유는 가야제국은 지역마다 왕이 있었으며, 각 제국의 왕릉과 왕궁지 위치, 상호 지형상 관계 등을 확인하고 비교해보면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세력의 성격, 특징 등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세기 중·후반 이후 아라가야는 다른 가야제국 보다 훨씬 세력이 강했다. 고분과 유물 등을 살펴보면 다른 가야제국을 압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아라가야를 비롯해 가야사를 계속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다모리 히데오 = 도쿠시마대학 매장문화재조사실장 사다모리 히데오(55) 교수는 한국의 삼국시대 토기를 연구하고 있는 유명한 학자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삼국시대 토기, 특히 가야토기 연구에 있어서는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은 일본에서 출토되고 있는 '아라가야 토기'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는 가야중에서도 금관가야와 대가야만 클로즈업되고 있지만 가야는 여러단계에 걸쳐 발전했으며 여러 가야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아라가야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지만 앞으로는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가미야 마사히로 = 한·일 말가면·갑옷 연구의 권위자인 다카이시 시교육위원회 도서관 향토자료실장 가미야 마사히로(58)씨.

 

그는 말갑옷 등 마구가 출토되면 직접 쇠판을 같은 모양으로 잘라붙이고 출토된 유물과 같이 가죽으로 엮어보는 등 실제 제작과정을 재현해 보고서야 보고서를 작성할 정도로 연구에 몰입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온전한 형태의 말갑옷'이 유일하게 출토된 함안을 수 차례 방문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심지어 대학생 시절, 개인적으로 함안을 방문해 말이산고분군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토된 말갑옷은 아라가야에서 만든 것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는 당시 말갑옷을 만들만한 기술이 없었다"며 '아라가야 말갑옷'을 높이 평가했다.

 

△임나일본부설 = 함안에는 이 밖에도 1990년대 중반부터 매년 50명 안팎으로 무리지은 일본인들이 방문해 아라가야고분 등 유적을 돌아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일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이다. 이들은 야마토정권(왜)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신라 백제 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둬 6세기 중엽까지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아라가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도야 무엇이든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 시민들에게도 '아라가야'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