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일본 속의 아라가야를 찾아서 (3)일본의 아라가야 토기

자연정화 2018. 7. 23. 09:57

일본 속의 아라가야를 찾아서 (3)일본의 아라가야 토기

고온서 빚은 가야토기 고대일본 달구다

 

출처 : 경남도민일보 2006. 11. 15. 조재영/조현열 기자

 

△일본에 전파된 아라가야 토기 기술 = 일본에서는 그 동안 오사카와 나라지역이 중심인 간사이지방 여러 곳에서 함안식토기(아라가야 양식의 토기)가 출토됐다. 이들 토기는 대부분 고분시대(일본 3세기말∼7세기초) 유적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이는 5세기 무렵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수준 높은 토기제작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돼 당시 일본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한다.

 

▲ 지도/서동진 기자

 

가야의 도질토기가 전래되기 이전에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하지키’라는 연질토기를 만들어 널리 사용했다. 연질토기는 800도 안팎의 그다지 높지 않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어서 쉽게 깨질 뿐만 아니라 표면도 거칠다.

반면 가야지역 토기는 10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낸 토기이기 때문에 쉽게 깨지지도 않고 흙속에 포함된 규산질이 높은 온도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토기의 표면을 유리막처럼 코팅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겉면이 매끄럽다.

 

도질토기 제작기술의 핵심은 가마 안의 온도를 고온으로 올리고 오랫동안 고온을 유지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마갑’을 만들어낼 만큼 제철기술이 발달했던 아라가야에서는 쉽게 높은 열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도질토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철광석에서 철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1500도 이상의 열을 내는 ‘용해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아라가야만이 한반도에서 도질토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다른 가야제국 등에서도 도질토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처럼 오랫동안 높은 열을 내는 ‘용해로’ 또는 ‘가마’와 같은 시설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평지에 가마를 만들고 장작 등 연료를 오랫동안 태우며 공기를 불어넣으면 높은 열을 낼 수 있지만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어렵고 1000도 이상 높은 열을 내는데는 한계가 있다.

 

함안군 가야읍 장명마을에서 발굴된 ‘장명도요지’를 보면 1500년 전 아라가야인들은 언덕 경사면에 가마를 만들었다. 경사면 아래쪽에 아궁이를, 중간부분에 그릇이 구워지는 방을, 경사면 위쪽에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아래쪽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위쪽 연통에서 자연스럽게 불을 빨아당겨 높은 열을 내는 방식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의 산물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방식의 가마를 만들지 못하다가 아라가야인 등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배워 알게 되면서 일본사회에도 급속하게 도질토기가 전파된다.

 

연질토기에 음식을 담아먹던 일본 고대사회에 도질토기(일본에서는 ‘스에키’라고 한다)가 전해진 것은 현대사회에서 플라스틱이 발명된 것 만큼이나 생활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 함안 아라가야 고분에서 발굴된 여러가지 모양의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

 

△아라가야토기가 출토된 일본 유적 = 나라현 덴리시 후루유적에서는 아라가야의 불꽃무늬굽다리접시와 꼭 닮은 토기가 출토됐다. 아쉽게도 이 토기는 윗부분인 접시가 파손돼 달아나고 아래쪽 굽다리 부분만 발굴됐다. 그러나 굽다리 부분에는 뚜렷한 ‘불꽃무늬’ 구멍이 표현돼 있어 아라가야식 토기임을 증명하고 있다.

후루유적을 발굴했던 다케다니(52) 교수는 “나라지방에서 출토되는 고대 토기의 발전 흐름을 보면 당시 한반도의 정세가 그대로 나타난다. 5세기 초에는 낙동강 서쪽 함안(아라가야)을 중심으로 한 가야식 토기가 나오고, 5세기 중엽에는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며, 그 이후에는 신라식 토기가 나온다”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기준으로 보면)함안계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오사카부 사카이시 오바데라유적과 규호지유적에서는 불꽃무늬가 있는 그릇받침 등 아라가야의 영향을 받은 토기가 여러 점 출토됐다. 오바데라유적에서는 아라가야식 토기 말고 다른 양식의 토기도 다수 출토됐다. 이에 대해 일본 현지 고고학자들은 당시 그 지역에 영향을 미친 여러 집단 가운데 아라가야계 집단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나라현 동쪽에 해당하는 미에현 쓰시의 로쿠다이유적에서도 아라가야식 토기가 발굴돼 관심을 모았다. 이는 고분시대 야마토정권의 중심지였던 나라현 뿐만 아니라 그 동쪽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아라가야의 토기문화가 전파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취재팀은 최근 나라현 가시하라시 신도우유적에서 주목할 만한 아라가야 토기 2점이 발굴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10월27일자 1면 보도>

 

후루유적이나 오바데라유적 등에서 발굴된 아라가야식 토기는 대부분 파편 상태로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거나 문양과 모양이 조금씩 변형된 것들이다.

 

그러나 신도우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는 비록 여러 조각으로 깨진데다 그릇의 일부가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변형되지 않은 ‘불꽃무늬’를 확인할 수 있고 전체 모양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들 2점의 토기는 색깔과 재질까지도 아라가야 토기와 같은 것이어서 고고학자들은 이들 토기가 당시 아라가야에서 제작돼 이곳까지 옮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수준 높은 아라가야의 토기문화가 직·간접적으로 일본에 전파됐을 것이라는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확실한 증거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전국 지역신문 종합평가 결과 <경남도민일보>가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로 선정됨에 따라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로쿠다이유적 발굴자 호스미 히로마사씨인터뷰

“도래인, 선진문화 전파”

 

미에현 쓰시 로쿠다이유적을 발굴조사한 호스미 히로마사(41·미에현매장문화재센터 연구원)씨는 발굴조사 보고서에 이곳에서 발굴된 원통모양그릇받침(기대) 등 아라가야식 토기를 ‘함안식토기’라고 일본 학계에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그는 이들 토기를 ‘도래인’이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만든 것으로 보고 있었다.

 

▲ 호스미 히로마사 씨가 미에현 쓰시 로쿠다이유적에서 발굴된 함안식토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1500년 전 당시 아라가야인들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 깊숙한 곳까지 그 먼길을 어떻게 이동했을까.

 

그는 도래인들이 대마도를 거쳐 거쳐 시코쿠와 세도나이카이를 경유해 오사카만에 이르렀으며, 나중에는 이곳 이세만까지 들어왔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로쿠다이유적에서 함안식 토기와 함께 출토된 많은 목제유물 중 배(고대선박) 조각이 함께 출토된 사실을 확신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그는 “로쿠다이유적은 당시 일본인의 생활유적이지만 함께 발견된 함안식 토기를 통해 외래 선진문물이 여기까지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며 “또 도래인이 전파한 선진문물이 당시 이곳 주민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매장문화재센터 수장고(유물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최근 조사발굴한 토기 수 십점을 꺼내 연구실에 늘어놓고 취재팀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취재팀과 동행한 국립중앙박물관 이주헌 학예연구관과 함안박물관 백승옥 박사에게 자신들이 발굴한 유물이 가야지역 토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견을 묻는 등 ‘가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두 나라간에 유물유적 발굴·조사 결과를 공유하는 등 교류를 확대하면 한·일고대사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