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해상 무역 왕국, 금관가야

자연정화 2018. 7. 23. 09:43

해상 무역 왕국, 금관가야

 

출처 : 이용주의 한국사와 사회탐구

 

가야는 삼국 시대 역사에서 주연이 아니라 늘 조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최근 가야 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가야의 새로운 모습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김해 대성동 지역은 금관가야의 최고 전성기에 조성된 무덤들이 즐비한 곳인데요,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이 곳 무덤들을 모두 9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각종 유물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철의 왕국, 금관가야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대규모 덩이쇠입니다. 3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29호분을 비롯해서, 2호분, 23호분 등에서 쇠도끼(판상철부라고 합니다)나 덩이쇠(철정이라고 합니다)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대성동 출토 덩이쇠

 

이런 덩이쇠는 철기 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본 소재입니다. 동시에 가야에서는 이를 시장에서 화폐로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또한 이 덩이쇠를 낙랑과 대방, 그리고 바다 건너 왜 등에 수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던 거지요.

 

한편 금관가야는 덩이쇠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풍부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직접 철기 제품을 제작했습니다. 대성동을 비롯하여 옛 금관가야 세력권 지역의 유적지들에서는 어김없이 수준높은 철기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철기 제품들은 같은 시기 신라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결국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친 시기에는 금관가야가 신라보다도 훨씬 앞선 문물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금관가야의 철기. 대성동과 함께 대표적인 금관가야 유적지인 부산 복천동 출토품들이다. (출처 : 부산 복천박물관)

 

금관가야, 북방 기마민족과 교류하다

 

대성동 고분군에는 매우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유물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29호분과 47호분에서 발견된 청동솥(동복이라고 합니다)입니다. 입술 위쪽에 고리모양 손잡이가 솟은 독특한 모양의 솥인데요, 이러한 모양의 솥은 주로 흉노족 등 기마민족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북방의 오르도스(Ordos) 지역에 분포한다고 하여 '오르도스형 동복'이라고 불리는 물건입니다. 주로 기마민족들이 말에 매달고 다니면서 우유를 끓이던 그릇입니다.

 

 

청동솥만이 아닙니다. 11호분에서 출토된 호랑이모양 띠고리, 88호분의 금동제 허리띠, 9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마구, 청동그릇, 로만글라스 편 등 대성동 고분 지역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방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북방 초원 지대에나 있을법한 유물들이 한반도 남쪽 바닷가에서 출토되자 많은 학자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대성동 고분의 최초 발굴 책임자였던 신경철 교수는 이렇게 대량의 북방계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문화전파가 아니라 북방의 부여계 주민들이 직접 이동한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또 몇 해전에 KBS에서 방영된 <역사스페셜>에서는 대성동 출토 유물이 흔히 선비족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요서 지방의 라마동 유적지 출토 유물과 대단히 흡사한데, 이 라마동 유적지는 선비족의 무덤이 아니라 부여인들의 무덤이라는 대담한 가설을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대성동 유물과 라마동 유물 비교 (출처 : KBS 역사스페셜)

 

그러나 아직 이런 주장들은 가설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들 북방계 유물들의 유입 경로를 낙랑군이나 대방군과의 교역의 결과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북방 기마민족이 직접 이동한 결과이든, 아니면 낙랑군이나 대방군과의 무역의 결과이든, 금관가야가 한반도 남부의 약소국이라는 이미지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금관가야, 일본과 교류하다

 

대성동 고분 출토품 중에서 이국적인 색채를 띠는 것은 비단 북방계 유물만이 아닙니다. 대성동 고분에는 일본계 유물들도 다량으로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통형동기와 파형동기입니다.

 

파형동기는 볼록한 원판에 바람개비모양의 판이 붙어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주로 방패에 장식하는 용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파형동기는 일본 야요이시대부터 등장하여 고분시대 전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대표적인 일본계 유물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모양의 파형동기가 김해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6개가 한꺼번에 발견된 것이지요.

 

원통형을 하고 있는 통형동기 역시 그 동안 일본 전기고분에서 출토되어 일본계유물로 알려진 물건인데요, 2012년 대성동고분군 7차 발굴조사에서는 이 통형동기가 대량으로 발견됩니다. 오히려 금관가야 지역의 출토량이 일본 출토량보다 월등히 많아졌는데, 이에 따라 통형동기는 일본에서 가야로 건네진 물건이 아니라 반대로 금관가야가 원산지일 가능성이 최근 급격히 대두되고 있습니다.

 

통형동기(위)와 파형동기(아래)

 

금관가야가 위치한 낙동강 연안의 남해안 일대는 이미 선사 시대부터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했던 곳입니다. 예전에 흑요석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한반도 남해안 지역과 일본 규슈 지역 사이에는 이미 활발한 교류의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변한에는 왜인들이 많이 섞여 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에 가면 가야의 흔적을 보여주는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금관가야와 일본은 당시에 단순한 물물 교역만 한 게 아니라 직접적인 주민들의 이동도 활발하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금관가야는 일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 것이지요.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대성동 고분은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까지 금관가야의 활발한 대외 교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시 금관가야가 얼마나 강력한 경제력과 문화 수준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관가야도 결국 쇠락의 길에 접어드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400년에 있었던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즈음해서 대성동 고분은 더 이상 확장하지 않게 됩니다. 아마도 금관가야 지배층의 상당수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이후 일부는 신라에 편입되거나, 일부는 일본 열도로 피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6세기 신라 법흥왕대 신라에 완전 항복하기까지 금관가야는 명맥만 유지했던 것이지요.

반면 이때부터 신라는 현재의 황남동 일대 등에 대규모 고분군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신라 고유 양식의 토기도 제작되고요. 결국 금관가야가 고구려군에 의해 결정적으로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이 일대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하는 것이 신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