➂ 가야(加耶) / 사회,문화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의 사회
1. 가야의 귀금속 선호 여부
2~3세기 당시 삼한 사람들의 복장을 살펴보면, 구슬을 보배로 여겨, 혹은 옷에 꿰매 장식으로 삼고, 혹은 목에 걸거나 귀에 걸면서도, 금은이나 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고, 맨머리에 상투를 드러내서 굳센 병사 같았으며, 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었다고 하였다. 또한 누에치기를 잘하여 겸포(縑布) 등의 비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여기서 구슬을 귀하게 여겨 몸에 치장하고 가죽신을 신는다는 것은, 이미 사치품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의 복색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므로, 그들의 사치품 수요는 단지 중국 물품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가 아니라 자생적 계급 성장에 따라 유발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가야고분 출토품
가야 지역의 인공으로 만든 유리구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전 1세기경의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남색 유리 둥근 구슬[丸玉]과 고리 구슬[環玉]들이다. 서기 2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 427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것도 대동소이하다. 이 구슬들은 아직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2세기 후반 및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 덧널무덤들에서 출토된 구슬들은 다량의 남·청·홍색 유리제 구슬과 대형 수정제 곡옥(曲玉), 절자옥(切子玉) 등이 연결되어 연장 총 길이가 288㎝에 달하는 것도 있고, 남색 유리구슬 수백 점 외에 수정제 곡옥 148점, 대형 다면옥(多面玉) 2점으로 구성되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이런 정도의 장신구를 일반인들도 소유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사회에서 늦어도 3세기 전반에는 사회경제적으로도 일반민과 구별되는 귀족 계급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가야인들이 구슬을 이용하여 부를 표시하려는 관습은 4세기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야에서 전형적인 귀금속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5세기부터이다. 이 시기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는 용봉문 고리자루 큰칼[環頭大刀], 은 상감 삼엽문 고리자루 큰칼, 금동제 마구 장식, 화살통 장식, 안장가리개, 말띠꾸미개, 관못, 여러 가지 형태의 수하식(垂下飾) 달린 금귀걸이, 순금 곡옥, 초화형 장식판[草花形立飾]을 세운 금관, 가운데에 큰 화염형 문양을 하나 세운 금동관, 금제 팔찌, 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이런 것들로 보아, 5세기 이후에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에서 관(冠),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뿐만 아니라, 대도, 마구, 관(棺) 등의 소품들도 금이나 금동,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장식하여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5~6세기에는 가야 지역에 사회경제적인 부에 바탕을 두고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가야의 순장 문제
순장(殉葬)이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를 말한다. 순장 그 자체는 하나의 장례 풍습에 불과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예속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시행 여부가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되기도 한다.
신라나 가야 지역에는 전형적인 순장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 다수 존재한다. 가야의 순장 사례는 대략 4세기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확인되었다. 묘제 상으로는 나무덧널무덤, 움식 돌덧널무덤, 굴식 돌덧널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연맹장(왕)을 비롯한 가야 소국들의 최고 지배층이 순장 시행의 주된 집단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순장의 사례를 통하여 가야 사회가 왕이나 소국 지배층을 비롯한 귀족과 평민 및 노예 등의 3계층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장이 실시된 것을 가지고 고대 노예제 사회나 전쟁 노예의 성행을 추론할 수는 없다. 오히려 순장은 왕이 천신(天神)의 후손으로 여겨지던 세계관과 관계가 깊으며, 당시의 왕권은 주민들의 반(半) 자발적 복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순장제는 전형적인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지 못한 초기 국가나 그 이전의 소국 연맹체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 사회에서 순장제가 성행했던 것도, 각 단위 소국 한기의 권력 및 연맹장의 권력이 강화되었지만 아직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야의 문화
1. 가야의 음악
우륵은 6세기 무렵 대가야의 악사로서, 원래는 성열현(省熱縣) 즉 후기 가야 연맹에 소속된 나라의 하나인 사이기국(斯二岐國) 사람이었는데,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고령 대가야에 들어갔다. 우륵은 가실왕이 중국 남제와의 교역에서 얻은 쟁을 개량하여 만든 12현금, 즉 가야금을 가지고 12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이,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한째는 이사, 열두째는 상기물이었다. 12곡 중에 보기와 사자기는 기악곡으로서, 보기는 여러 개의 공을 돌리는 기예를 보일 때 연주하는 음악이고, 사자기는 사자 모습의 탈춤놀이를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인데, 우륵이 이들을 가야금 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나머지 10곡은 5~6세기의 대가야 중심 가야 연맹 소속국들의 지방 특색이 있는 고유 음악을 정리하여 가야금 곡으로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중에 하가라도와 상가라도는 각기 전·후기 가야 연맹의 수도인 김해와 고령 지방, 4곡은 경남 지역 소국, 나머지 4곡은 호남 동부 지역 소국의 음악이다.( 우륵 12곡명이 가리키는 가야 제국의 위치)
우륵 12곡은, 후기 가야 연맹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전통적인 의례를 행하는 날에 각 소국의 한기들이 대표로 대가야의 궁정에 모여 연주하던 음악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곡들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의 단결과 강성함을 상징하는 음악이다. 그 12곡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510년대설, 520년대설, 530년대설, 540년대설 등이 있다.
530년대설 또는 540년대설은 위기에 빠진 대가야가 전성기를 회고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그렇다면 우륵 12곡에 가야 연맹의 주요 소국들의 이름이 망라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한 가실왕이라는 인명과의 관련이나,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도 그런 곡을 만들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가야 연맹의 유력한 소국들인 안라국, 다라국, 고자국 등의 음악이 빠진 것으로 보아, 우륵 12곡은 후기 가야 연맹 전성기에 열린 한 의식의 기록이고, 이를 통해 맹주국 대가야의 명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530년대 이후로 후기 가야 연맹이 분열과 쇠퇴를 되풀이 하다가 결국 550년경 백제에게 부속되는 지위로 전락하자, 대가야의 앞날에 대하여 비관한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과 함께 신라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551년에 신라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國原)에 안치시키게 하고, 552년에 대나마 계고(階古), 법지(法知 또는 注知), 대사 만덕(萬德) 세 사람을 보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후에 진흥왕은 그들의 음악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훗날 문무왕이 충주에서 나마 긴주(緊周)의 아들이 추는 가야의 춤을 구경했다는 것은, 우륵이 국원에 머물면서 가야의 음악을 전수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륵의 제자인 이문이 지은 가야금곡으로는 까마귀[烏], 쥐[鼠], 메추라기[鶉] 등이 있었다고 하니, 이는 동물의 소리나 행동을 가야금 선율로 묘사한 서정적인 곡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일본 나라현 도다이지[東大寺]의 보물 창고인 쇼쇼잉[正倉院]에 823년에 수납되어 전하는 신라금(新羅琴) 2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금물 칠한 신라금’으로서 신라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우륵이 신라에 전한 가야금의 후신이니, 현존하는 가야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겠다.
2. 가야의 사상
가야 지역의 사상에 대해서는, 1세기의 김해 가락국(가야국) 건국 초기에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여 싣고 왔다는 파사 석탑 및 왕후사 건립과 관련하여, 인도 지역의 남방 불교가 이 곳에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삼국유사』탑상편에 실려 있는 금관성 파사석탑 조의 기록을 따르면, 파사석탑은 서기 48년에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김해에 가지고 들어왔으나 아직 불교로서 이해되지는 못했고, 452년에 호계사를 창건하여 파사석탑을 안치하고 또 왕후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파사석탑은 인도에서 들여온 것이기 때문에, 당시에 남방 불교의 전래가 있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유타국이라는 이름은 5세기 이전의 가야에서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인도에서도 불교적으로 가장 인연이 깊은 나라였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하여 허왕후 결혼 설화 속에 삽입되었으며, 그 시기는 왕후사가 창건될 당시인 신라 중대였을 것이다. 무열왕계의 김씨가 신라 왕실을 운영하던 신라 중대는 가야계의 신김씨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고, 그 때 가야 왕실의 후손들은 신라 왕실의 비호를 받아 금관소경의 우월성이 강조되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윤색이 가능했을 것이다.
김해 호계사에 있었다는 파사석탑 설화의 성립 시기는 좀 더 늦어 고려 초기, 또는 중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파사석탑이 허왕후릉 묘역 안의 전각에 보존되고 있다. 파사석탑의 현재 모습은 네모난 모습의 돌들이 포개져 있고, 돌의 재질도 화강암이 아니라 매우 무른 특이한 종류여서, 일반적인 한국 석탑의 계보를 따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한편 대가야가 불교를 수용하였는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불교식 인명들이다. 대가야 왕계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어머니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나오고, 6세기 당시 대가야 왕이었던 이뇌왕(異腦王)과 왕비인 신라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 사이의 아들인 월광태자(月光太子)가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은 불교식이다.
정견모주의 ‘정견(正見)’은 불교에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수행 방법인 팔정도(八正道) 첫 번째 단계의 이름이다. 또한 ‘월광태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국왕의 아들로 태어나 선행을 베풀었을 때의 이름이다. 이는 불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진 시대의 관념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야의 불교식 이름은 언제 나타났을까?
가야산 해인사는 신라 하대 애장왕 때에 대가야 왕족의 후손인 순응과 이정이 가야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제사 터를 확장해 창건한 것이다. 현재 해인사 안에는 조선시대 후기까지 ‘정견천왕사’라고 불리던 ‘국사단’이라는 건물이 있다. 가야 연맹의 제사는 맹주국인 대가야국에서 각국의 대표자인 한기들이 모여 공동으로 행해졌는데, 제사 행렬은 가야 연맹의 성소(聖所)인 가야산 정견모주 사당에서부터 시작되어 고령 읍내로 이어졌을 것이다.
6세기 전반 당시 대가야의 사회 발전 수준이 불교를 받아들여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정도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주변의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및 침류왕 때부터 불교를 인정했고, 신라에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때 이후 고구려의 승려들이 왕래했으므로, 가야인들도 불교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가야 이뇌왕은 522년에 신라 법흥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밀접하게 교류하던 중에, 528년에 불교를 공인한 신라를 통하여 불교를 수용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뇌왕의 아들 도설지를 월광태자로 명명한 것과 함께 대가야 왕계의 인명을 불교적으로 윤색한 시기는,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은 522년 이후 562년 멸망하기 전까지로 추정된다.
또한 대가야의 불교 수용 문제는 중국 남제 및 백제와의 교류와 연관하여 생각할 필요도 있다. 대가야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을 개연성으로는 첫째로 우륵 12곡 가운데에 ‘사자기(師子伎)’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중국 남조의 기악(伎樂)인 사자춤에서 사자는 부처님이 보낸 것이기도 하고 그 춤 자체가 사원에서의 장례나 법회에 쓰이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가야는 백제를 통해서 불교를 받아들였을 개연성도 있다.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은 석실의 터널식 천장 구조가 공주 송산리 벽화전분과 유사하고, 그 천장에 그려져 있는 연꽃무늬는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한 양식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가야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다.
가야의 과학기술
서기전 3세기경에 중국 동북 지역과 청천강 이북의 한반도 지역에는 전국시대 연(燕)나라 계통의 철기 문화가 퍼져 있었으며, 청천강 이남의 대동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는 세형동검 계통의 청동기 문화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전반에 위만조선의 성립과 함께 전국계(戰國系) 철기 문화가 대동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 들어와 기존의 청동기 문화와 융합되었다.
서기전 2세기 말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이민이 남하함에 따라, 서기전 1세기 이후 경상남도 창원과 경상북도 경주 지방에서 위만조선계의 청동기·철기 복합문화가 나타났다. 서기 이후 이 문화는 순수 철기 문화로 진전되어갔으며, 늦어도 2세기 전반에는 창원 지방에서 철기 제작뿐만 아니라 철 생산이 개시되었다.
2세기 후반 이후 가야의 철 생산 주류가 창원에서 김해로 이동되면서 한(漢)나라의 새로운 기술이 유입되어 철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단조 철기가 증가되었다. 이때 이후로 김해 가야국은 한반도 각지 및 일본열도에 철을 수출하면서 세력을 성장시켜나갔다. 낙동강 하류의 김해 및 부산 지방에서는 2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까지 납작도끼형 덩이쇠를 철소재로 생산하여 유통시켰으며, 4세기 후반 이후로는 본격적인 덩이쇠를 생산하였다.
5~6세기에는 제철 기술이 가야 각지로 분산되어 김해·부산 뿐만 아니라 함안·합천·창원 등지에서도 제철의 증거라고 보이는 덩이쇠와 미늘쇠를 생산하였다. 가야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열도는 5세기 말엽부터 자체적인 철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야의 철기에는 농기구, 무기, 갑주, 마구 등이 있다. 철제 농기구로는 서기전 1세기에 끌, 쇠망치, 쇠손칼, 따비, 낫, 쇠도끼 등이 나타났고, 4세기 이후로는 쇠스랑, 쇠삽날, 가래, 살포 등의 농기구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5~6세기에는 실용 농기구가 무덤에 부장되지 않게 되고, 대가야 세력권을 중심으로 축소 모형 철제 농기구가 부장되었으니, 이는 가야에 특정한 농경 의례가 생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제 무기로는 서기전 1세기에 쇠단검, 쇠투겁창, 쇠꺽창 등이 나타났고, 2세기 후반 이후로는 새로이 쇠장검, 고리자루 큰칼, 슴베 있는 쇠화살촉 등이 추가되었다. 3세기 후반 이후에는 좀 더 관통력이 향상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목 있는 쇠화살촉이 나타나서 무기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5~6세기에는 목 긴 화살촉이 새로이 나타나고, 철제 무기에 장식적인 요소가 나타나서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큰칼이나 화살통 등이 유행하였다.
가야의 철제 갑주는 4세기에 종장판 혁철 투구와 종장판 정결 판갑옷을 위주로 발전하였다. 5세기에는 미늘갑옷이 나타나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종장판 정결 판갑옷은 5세기 중엽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반면에 5세기 후반에는 삼각판 판갑옷, 횡장판 정결 판갑옷, 챙 달린 투구, 충각부 투구 등이 소형 고분 위주로 나타났다. 5~6세기의 가야 지역에는 말투구와 말갑옷도 성행하였다.
가야의 마구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후 3세기 무렵까지 S자형 봉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철제 재갈이 나타나 마차용으로 쓰였다고 여겨지나, 4세기에는 기승용 마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세기의 마구에는 f자형 봉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재갈, 원형 판상 재갈멈추개가 달린 재갈, 목심철판 발걸이, 심엽형 말띠드리개 등이 나타났다. 5세기에는 마구에 장식적인 요소가 채택되어, 금은으로 꾸민 내만타원형 판상 재갈멈추개, f자형 판상 재갈멈추개, 검릉형 말띠드리개를 위주로 분포되었고, 이는 일본열도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가야사 연구 동향과 전망
가야는 한동안 잃어버린 역사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그 이전의 고대사는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일했다는 인식으로 정리되었고, 그 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와 동일시되었다. 이를 정리한 책이 『삼국사기』였고, 거기에는 가야가 신라 주변의 여러 소국의 하나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의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삼한의 마한·진한·변한은 곧 백제·신라·가야로 전환되었다고 수정하면서 가야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안정복이나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6가야의 지명을 비정한다거나, 가야의 해운 능력을 재조명하는 식으로 가야사 연구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일본의 사학자들에 의하여, 가야 지역은 일본 고대 신공황후(神功皇后) 이래 수백 년 동안 일본의 통치를 받은 임나였다는 『일본서기』의 관념이 제기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야사는 다시 잠복되고 일본에 의한 임나일본부설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다.
1950년대 이후로 일본에서는 고고학 연구 수준이 발달하여, 일본의 4~5세기 고대 문화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기마민족에 의하여 갑자기 발전했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이 나타났으나, 전통적인 임나일본부설의 견제를 받아 좀처럼 연구의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일본의 문헌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된 『일본서기』의 기록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는 연구들이 제기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이 활성화되고 그 성과가 축적되어 옛 가야문화권에서 출토되는 방대한 유물들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고고학계에서는 경주평야 일대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을 제외한 경상도 전역의 움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 유적이 모두 가야의 것이라는 과도한 해석이 한동안 유행하였다. 문헌사학계에서는 가야가 일본의 통치를 장기간 받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통치를 받은 것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는 고고학 및 문헌사학의 연구 수준이 높아지고 차분한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왜나 백제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므로 독자적인 문화였고, 낙동강 동쪽의 유물들은 5세기 이후로 신라의 것이지 가야의 것이 아니라는 연구가 나타나서,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접목 아래 연구가 이어나가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이 나타나 논쟁을 거듭하는 중에, 가야는 단순한 소국연맹체가 아니라 비교적 넓은 지역을 점유한 지역연맹체였다거나 혹은 초기 고대국가를 성립시켰다는 연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는, 가야가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적어도 4백년 이상 7백년 이하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신라의 발전과정 아래 통합되어간 여러 소국 중의 하나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금관가야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가야의 거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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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인의 삶과 문화 개정판 (권주현, 혜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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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김태식 외, 서경문화사, 2008)
▷ 한국고대사연구의 새로운 동향 (한국고대사학회 편, 서경문화사, 2007)
▷ 옥전고분군과 다라국 (조영제,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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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보는 가야고고학 (박광춘, 학연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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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라국사 (남재우, 혜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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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 각국사 연구 (백승옥, 혜안, 2003)
▷ 가야 고고학의 새로운 조명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혜안, 2003)
▷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푸른역사, 2002)
▷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으로서의 가야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혜안, 2002)
▷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혜안, 2001)
▷ 가야 각국사의 재구성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혜안, 2000)
▷ 고고학을 통해 본 가야 (한국고고학회 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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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문화도록 (경상북도 편, 1998)
▷ 고대한일관계사 (연민수, 혜안, 1998)
▷ 가야제국의 왕권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편, 신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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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 (백승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가야사연구 대가야의 정치와 문화 (경상북도 편, 1995)
▷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에 관한 연구 (이근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 문학박사학위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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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사연구 (천관우, 일조각, 1991)
▷ 삼한사회 형성과정 연구 (이현혜, 일조각, 1984)
▷ 加耶と東アジア諸國 (李鎔賢, 國學院大學 大學院 博士論文, 1999)
▷ 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 (李永植, 吉川弘文館, 1993)
▷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田中俊明, 吉川弘文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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