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부분은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貞觀元年 賜璽書曰 王世為君長 撫有東藩 海隅遐曠 風濤險阻 忠欵之至 職貢 相尋 尚想徽猷 甚以嘉慰 新羅王金真平 王之隣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侄福信 及髙麗新羅使人 具勅通和 咸許輯睦 [당 태종] 정관貞觀 원년[627년] 새서璽書를 보내 말하길 “왕은 대를 이은 군장으로서 동쪽 번국들을 위무하였소. 바다 모퉁이 멀고 먼 곳에서 풍랑과 파도가 험하게 뱃길을 가로막는 데도 불구하고, 충성된 마음이 지극하여 특산물을 보내는 것을 빼놓지 않으니 그 아름다운 뜻을 생각하면 매우 위안이 되오. 신라왕 김진평 金真平은 왕과는 이웃나라인데도 매번 듣건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고 군사를 의지하여 어찌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이오. 이것은 짐이 바라는 것에 어긋나는 짓이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고구려 신라의 사신을 불러놓고 서로 화친하여 화목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였소. 王必須忘 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隣情 即停兵革 璋因遣使陳謝 實相仇如故 十一年 遣使獻鐵甲雕斧 賜綵帛三千段 并□袍等 十五年 璋卒其子 義慈告哀 太宗素服哭之 贈光祿大夫 賻物二百段 遣使冊 義慈為柱國 帶方郡王 百濟王 왕은 반드시 이전의 원한을 잊어 버리고, 짐朕의 본뜻을 알아서 이웃간에 정을 돈독히 하고 즉시 군대를 물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장璋[武王]은 사신을 보내 사과하였으나 실제로는 이전과 같이 원수로 지냈다. 11년 [637년] 사신편에 철갑鐵甲 조부雕斧를 보내니 이에 채단 금포 3천단과 구포 등으로 값을 치루어 주었다. 15년[641년] 장璋[武王]이 죽으니 그 아들 의자義慈가 부고를 하였다. 태종은 소복을 입고 애도하는 곡을 하였다.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 물품으로 2백 단을 보냈다. 사신을 보내 의자義慈에게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의 칭호를 주었다. 十六年 義慈興兵 伐新羅 取四十餘城 又發兵以守之 與髙麗通好 謀取党項 (新唐書 作棠項誤) 城 以絶新羅 入朝之路 新羅遣使 告急請救 太宗遣司農丞 相里元奨 齎書告諭 及太宗親征髙麗 百濟乗虚 襲破新羅十城(新書作 七城) 16년[642년] 의자義慈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군사를 보내 그 성들을 지켰다. 고구려와 통호하여 당항党項성(신당서에 당항棠項이라고 기록된 것이 잘못이다.)을 뺏아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을 것을 꾀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였다. 태종은 <사농승司農丞> 상리원장 相里元奨에게 칙서를 주어 태종의 뜻을 알렸다. 또한 태종은 고구려를 직접 정벌하였다. 백제는 그 틈을 타서 신라를 기습하여 열개의 성을 뺏았다.(신당서에는 일곱 성으로 기록) 二十二年 又破其十餘城 數年之中 朝貢遂絶 髙宗永徽二年 始又遣使朝貢 使還降璽書 于義慈曰 海東三國 開基自久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搆嫌隙 戰争交起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嵗 新羅使 金法敏 奏書乞 22년[648년] 또다시 10여 성을 뺏았다. 수년동안에 사신왕래가 끊어졌다. 고종 영휘永徽 2년[651년] 비로소 다시 사신을 보내왔다. 사신이 돌아갈 때에 새서를 의자에게 보내 말하길 “해동 3국은 나라를 세운지 오래이고 그 영토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서 근래에 와서 서로 미워하고 사이가 벌어져서 전쟁이 교대로 일어나고 있소. 짐朕은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림에 있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 지난해에 신라사신 김법민 金法敏이 보낸 서신에서 조칙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는 바, 그 서신을 보면 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即自興兵打取 但得故地 即請交和 朕以其言既順 不可不許 王所兼新羅之城 並宜亟還其本國 王若不從 朕已依法敏所請 任其決戰 亦令約束髙麗 不許救恤 髙麗若不從命 即令契丹諸蕃 渡遼澤入抄掠 “백제에 조서를 보내 빼앗은 성을 돌려주도록 명을 내려주소서, 만약 조칙을 따르지 않으면 자체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빼앗겠습니다. 다만 옛 땅을 되찾으면 곧바로 화친을 청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짐은 그 말이 일리가 있어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소.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본래의 나라로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오. 왕이 만약 이를 따르지 않으면 짐은 법민法敏이 요청한대로 싸우게 내버려 둘 것이고, 또한 고구려에도 구원하지 못하도록 영을 내릴 것이오. 만약 고구려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 제번諸蕃에 영을 내려 요택遼澤을 건너 쳐들어가게 할 것이오.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六年 新羅王金春秋 又表稱 百濟與髙麗 靺鞨侵其北界已沒三十餘城 顯慶五年 命左衞大将軍 蘇定方 統兵討之 大破其國 擄義慈及太子隆 小王孝演 等五十八人 送京師 命右衞郎将 王文度 為熊津都督總兵 以鎮之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고종 영휘] 6년(655년)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또 외교문서를 보내서 말하되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더불어 그 북쪽경계를 침범하여 이미 30여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현경 5년[660년] <좌위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통솔하여 백제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 나라를 크게 쳐 부수고 의자義慈 및 태자 륭隆 소왕小王 효연孝演 등 58인을 포로로 붙잡아 경사京師로 보냈다. <우위낭장> 왕문도 王文度 에게 명하여 <웅진도독총병>이 되어 진압하도록 하였다. 義慈事親以孝行聞 友于兄弟 時人號 海東曾閔 及至京 數日而卒 贈金紫光祿大夫 衞尉卿 文度濟海而卒 百濟僧道琛 舊将福信 (按新唐書 福信 為夫餘璋之從子) 率衆據周留城 遣使往倭國 迎故王子夫餘豐 立為王 其西部北部 並翻城應之時郎将劉仁願 留鎮于百濟府城 道琛等引兵圍之 의자義慈는 어버이에게 효성이 지극한 것이 널리 알려지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의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曾子 민자 閔子라고 불렀다. 경사에 도착한 뒤 며칠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추증하였다. 문도文度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 백제의 승僧 도침道琛과 옛 장수 복신福信 (살피건대 신당서에는 복신은 부여장夫餘璋의 시종으로 기록)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유성에 있으면서 사신을 왜국倭國에 보내 옛 왕자 부여풍夫餘豐을 맞이하여 와서 왕으로 세웠다.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빼앗아 이에 호응하였다. 이때에 <낭장> 유인원劉仁願은 백제부성百濟府城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도침道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포위하였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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