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3, 부족 백제-5회)

자연정화 2013. 9. 2. 20:52

又詔璉護 送安等 安等至髙句驪 璉稱昔與餘慶 有仇 不令東過 安等于是皆還 乃下詔切責之 五年

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濵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또 詔書를 보내 연璉[장수왕]에게 안 등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안 등이 高句麗에 이르니, 연璉[장수왕]

은 여경餘慶[개로왕]과 이전에 원수관계가 있음을 들어 동쪽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안 등은 이에 모두

 돌아왔다.

이에 詔書를 보내 그것을 질책하였다. 5년 안 등에게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가 여경餘慶[개로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그 정성을 포상하도록 하였다. 안 등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끝내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魏書髙麗傳 髙麗王釗 烈帝時 與慕容氏相攻 建國 四年慕容元真伐之 釗單騎奔竄 後為百濟所殺

(按 烈帝為道武帝之伯祖 隋書以昭列帝 三字相連 為髙麗王之名 殊誤)涉羅國 為百濟所併

「위서魏書」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 쇠釗[고국원왕]가 열제烈帝때에 모용씨와 서로 싸웠다.

건국建國4년[342년] 모용원진[前燕의 慕容皝]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쇠釗[고국원왕]는 단기로 도망을

 가서 숨었는데 뒤에 백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살피건대 열제는 도무제의 큰 할아버지인데 수서에서는 소열제 세자가 서로 붙어있어서 고구려왕의

이름처럼 되어 있으나 이것은 틀린 것이다.) 섭라국涉羅國이 백제에 병합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주] 烈帝는 北魏의 太祖 道武帝의 伯祖父인 翳槐의 追封 帝名이다

魏書 勿吉傳 勿吉先破 髙句驪十落 宻共百濟謀 從水道併力 取髙句麗(勿吉國另條見前) 太平寰宇記

百濟國後魏 孝文帝遣衆 征破之後 其王牟大 為髙句麗所破 遷居南韓舊地
後周書 百濟者馬韓之屬國 夫餘之别種 有仇台者 始國于帶方

「위서魏書」물길전에는 “물길이 이전에 고구려 10부락을 쳐 부수었다. 은밀히 백제와 모의하여 강을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하기로 하였다.(물길국은 다른조에서 보았다.) 「태평환우기」에는

“백제국은 후위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쳐부수고 뒤에 그 왕 모대牟大가 고구려에 의해 격파당하여

남한南韓 옛땅으로 옮겨갔다.

「후주서後周書」에는 “백제는 마한의 속국으로서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

其地界 東極新羅 北接髙句麗 西南俱限大海 王姓夫餘氏 自晉宋齊梁 據江左 後魏宅中原 並遣使稱藩

兼受封拜 齊氏擅東夏 其王隆 亦通使焉 隆子昌 建徳六年遣使獻方物 宣政元年 又遣使來獻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며 서남으로는 모두 대해에 막혔다.

왕의 성은 부여씨이다. 진晉 송宋 제齊 양梁나라 가 장강의 왼쪽[강동을 말함] 웅거하고 후위가 중원에

 자리잡은 때부터 사신을 보내 번藩국을 자칭하고 겸하여 봉작을 받았다.

제씨[北齊]가 동쪽에서 세력을 떨치자 그 왕 융隆[武寧王]또한 사신을 보내 통교하고 융隆[武寧王]의

아들 창昌[威德王]은 [서위 무제] 건덕建徳 6년[577년]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서위 무제] 선정宣政

 원년[578년]에도 사신을 보내왔다.

北史 百濟夫餘王 東明之後 (詳見 前夫餘條)有仇台者 篤于仁信 始立國 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

公孫度以女妻之 遂為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王姓餘氏(按後周書 作夫餘氏 當以後周書 為是)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북사」에는 “부여왕 동명의 후예중(이미 부여조에서 자세히 보았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어질고 신의가 있었는데 대방의 옛땅에 나라를 세우니 백제이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그 여식을

 시집보냈는데 드디어 강국이 되었다.

초기에 백 개의 가문이 건넜다고 하여 백제라고 불렀다. 왕의 성은 여餘씨이다. (살피건대 후주서

後周書에는 부여夫餘씨로 되어있다. 당연이 후주서後周書가 옳다.) 그 도성을 거발성居拔城이라

부르는데 또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한다.

其外更有五方 方有十郡 其人兼有 新羅髙麗倭等 亦有中國人 有僧尼多寺塔 而無道士 有鼓角箜篌

笙竽箎笛之樂行 宋元嘉厯以建寅月為嵗首 國中大姓有八族 (原脫八字 今據隋書增) 沙氏燕氏刕(通考作劦

 注云音狹) 氏 解氏真(隋書新唐書 俱作貞)氏

그 밖에 또 오방五方이 있는데 방에는 10군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신라 고구려 왜 등이 섞여 있고

중국인도 있다. 승려와 사탑이 많이 있으나 도사는 없다. 고각 공후 생저 호적등의 악기로 연주한다.

송나라 원가력元嘉厯을 사용하여 인월寅月을 그 해의 첫 달로 삼았다.

나라에 큰 성姓으로 8족이 있다. (원래 8자가 빠졌는데 이제 수서를 근거로 추가한다.) 사씨 연씨

협刕씨(통고에는 劦로 기록 발음은 협狹으로 주석됨) 해씨 진真씨(수서 신당서 모두 정貞씨로 기록)

國氏木氏 苗(新唐書作 {艸+曰}氏, 通考作 苩注云音白)氏 齊武平元年 齊後主 以餘昌為 使持節 侍中

車騎大将軍 帶方郡公 百濟王 如故 二年 又以餘昌為 持節都督 東青州諸軍事 東青州刺史 周建徳六年

齊滅餘昌 始遣使通 周宣政元年 又遣使來獻

국씨 목씨 묘(신당서에는 艸+曰로 기록, 통고에는 苩라 기록하고 소리는 백白이라고 주석)씨가 있다.

[북]제 무평 원년[570년] 제후주는 여창餘昌을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이라고

옛날과 같이 칭호를 주었다.

2년 또한 여창餘昌[威德王]을 <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의 칭호를 주었다. {북}주 건덕

 6년[577년] 제나라가 망하자, 여창이 비로소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북}주 선정 원년[578년] 또한

사신을 보내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