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3, 부족 백제-6회)

자연정화 2013. 9. 2. 20:54

잘못된 부분은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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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수)
隋書 百濟 夫餘王 東明之後 開皇初 其王餘昌 遣使貢方物 拜昌為 上開府帶方郡公 百濟王 平陳之嵗

有一戰船 漂至海東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并遣使奉表 賀平陳 髙祖善之 下詔曰

 百濟往復 至難若逢風浪 便致傷損

「수서」에는 “백제는 부여왕 동명의 후예이다. 개황[581-600년]초에 그 왕 여창[威德王]이 사신과

 지방특산물을 보내왔다. 창昌[威德王]에게 <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의 직함을 주었다. 진陳을

 평정한 해에 전선 한척이 해동 모라국 牟羅國 에 표착하였다.

그 배가 돌아오는 길에 백제를 지나게 되었는데 창[威德王]이 물자를 후하게 주고, 또� 사신을 보내

표를 보내고 진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고조가 이것을 기쁘게 여겨 조칙에 말하되 “백제는 오고

가기가 매우 어려운데 만약 풍랑을 만나면 인명이 상하고 배가 파손될 것이오.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逺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 自今以後 不湏年别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開皇十八年 (北史作 八年) 昌使其長史 王辯那來獻方物 屬興遼東之役 遣使請為軍導

백제왕의 마음 또한 지극한 것을 짐은 이미 알고 있소. 비록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일을 처리하는데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 하는 것 같으니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올 필요가

있겠소. 이제부터는 매년 사신을 보내 입조할 필요가 없소. 짐또한 사신을 보내지 아니할 것이오.

왕은 이러한 점을 잘 알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개황18년(북사에는 8년으로 기록) 창[威德王]이 그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와 특산물을 보냈다. 요동싸움에 참전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 군대의 길안내를

 하겠다고 청하였다.

帝下詔曰 往嵗為髙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将討之 髙元君臣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髙麗頗知其事 以兵侵掠其境 昌死子餘宣立 餘宣死子餘璋立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되 “지난해에 고구려가 사신과 방물도 보내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지

않았기에 장수에게 명을 내려 이를 토벌하라 하였소. 고원髙元과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죄를 청하여

왔소. 짐이 이미 이를 용서하였기에 벌할 수 없소.”라고 한 뒤 그 사신을 후하게 대우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사정을 알고 군사를 보내어 그 경계를 침략하였다. 창[威德王]이 죽고 아들 여선餘宣이

뒤를 이었으며 여선餘宣이 죽자 아들 여장餘璋이 왕위를 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주] 隋書』百濟傳에는 ‘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이라 되어 있어 百濟 王位系譜를

 혼동케 하는데, 本文에서는 ‘子餘宣立 死’의 5字를 脫字시켜 더욱 혼란을 주고 있다.
이 시기 百濟王系는 (27)威德王(昌, 554~598)-(28)惠王(季, 26代 聖王의 第2子, 598~599)-(29)法王(宣,

或 孝順, 惠王의 長子, 599~600)-(30)武王(璋, 法王의 子, 600~641)으로『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惠王(季)과 法王(宣)이 모두 在位 2年도 채 안될 정도로 짧게 王位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된 誤記인 듯

하다.

大業三年 璋遣使者 燕文進朝貢 其年又遣使 王孝隣入獻 請討髙麗 煬帝許之 令覘髙麗動静 然璋内與髙麗

通和 七年 帝親征髙麗 璋使其臣 國智牟來 請軍期 帝大悅 厚加賞錫 遣尚書起部郎席律 詣百濟與相知

대업3년[607년] 장[武王]이 사신 연문진燕文進을 보냈다. 그 해에 또 사신 왕효린王孝隣편에 특산물을

 보내고 고구려를 토벌해 주도록 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영을 내려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런데 장璋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서로 내밀하게 화친하였다.

7년[611년] 황제가 고구려를 친히 정벌할때 장璋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군대의 출병시기를

물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주고 <상서기부랑> 석율席律을 보내 백제에 출병시기를

말하고 서로 알게 하였다.

明年六軍度遼 璋亦嚴兵于境 聲言助軍 尋與新羅 有隙 每相戰争 十年 復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絶

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附庸于百濟

다음해에 6군이 요수를 건너니 장璋[武王]또한 경계에 군사를 엄밀히 배치하고서는 말로만 수나라

군대를 돕는다고 하였다. 신라와는 사이가 크게 벌어져서 늘상 전쟁을 하였다. 10년[614년] 다시 사신을

보내왔다. 뒤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사신의 왕래가 끊어졌다. 그 남쪽에서 바다로 배를 타고 석달을

가면 모라국牟羅國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리, 동서가 수백리인데 백제의 부용국이다.

唐당
舊唐書 百濟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東北至新羅 西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髙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又外置六方 方管十郡 其用法叛逆者死 籍沒其家 殺人者以奴婢 三贖罪 官人受財

及盗三倍追贓 仍終身禁錮

「구당서」에는 “백제의 땅은 경사京師에서 6천 2백여리 떨어져 있다. 동북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그 왕이 거처하기 위해서 동서 두 개의 성이 있다. 또한 도성 바깥에는

 여섯 개 方을 설치하였고, 각 방은 열 개 군郡을 관할한다.

그 나라 법에 따르면 반역자는 죽이고 그 재산을 몰수하며 가족도 처벌하였다. 살인자는 노비로

삼는다. 삼속죄三贖罪 가 있는데 관리의 수뢰행위, 도둑질은 그 세 배를 추징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武徳四年 其王夫餘璋 遣使獻果下馬 七年又遣大臣 奉表朝貢 髙祖遣使冊 為帶方郡王 百濟王

自是嵗遣朝貢 髙祖撫勞甚厚 因訟髙麗 閉其道路 不許來通 中國 詔遣朱子奢往和之 又與新羅 世為仇敵

 數相侵伐

[당 고조] 무덕 4년[621년] 그 왕 부여장夫餘璋이 사신편에 과하마를 보냈다. 7년 [624년] 또한

 대신편에 외교문서와 지방특산물을 보내왔다. 고조는 사신을 보내 <대방군왕 백제왕>의 칭호를

주었다. 이때부터 매년 지방특산물을 보내왔다.

고조는 그 노고를 위로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고구려가 백제의 대당통로를 막고 왕래를 못하게 하는

 사실을 탄원하여 왔다. 조칙으로 주자사朱子奢를 보내서 화친하도록 하였다. 신라와는 대대로 원수를

맺어 여러 번 서로 침공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