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➀ 가야(加耶) / 개요

자연정화 2018. 7. 23. 09:27

➀ 가야(加耶) / 개요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

 

개설

가야는 변한(弁韓)의 12소국, 소국 연맹체, 초기 고대 국가 등의 단계를 거쳤다. 서기전 1세기 낙동강 유역에 세형동검(細形銅劍) 관련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의 문화 기반이 성립되었다. 서기 2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에 김해의 구야국(狗邪國)이 문화 중심으로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이를 변한 소국 연맹체 또는 전기 가야연맹체(加耶聯盟體)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 5세기 초에 몰락하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5세기 후반의 전성기에는 22개의 소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괄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분열하였다. 그리하여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金官國)이 멸망하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 제국(諸國)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의 명칭 유래

가야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1)가나(駕那)설: 끝이 뾰족한 관책(冠幘),

(2)평야설: 남방 잠어에서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말인 가라(Kala),

(3)간나라설: ‘신의 나라[神國]’, 또는 ‘큰 나라’의 뜻,

(4)갓나라설: 가야가 한반도 남단의 해변에 위치함으로써 ‘갓나라[邊國]’로 불린 것,

(5)가람설: 가야 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가야는 ‘ᄀᆞᄅᆞᆷ[江]’ 또는 ‘가ᄅᆞ=갈래[分岐]’의 뜻,

(6)겨레설: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이고, 그 근원은 알타이 제어의 ‘사라(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re) > 겨레(Kyeore)로 음운 변천,

(7)성읍설: 가야는 곧 ‘ᄀᆞᄅᆞ[大, 長의 뜻]’이며, 그 어원은 ‘성읍(城邑)’의 뜻을 가진 ‘구루(溝婁)’라는 등의 학설이 있다. 그 가운데 현재로서는 겨레설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가야의 자연환경

가야 계통 소국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지역이 늘 일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보유하며 중심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낙동강 중·하류의 서쪽 지역 일대로서, 낙동강의 서쪽 지류인 황강과 남강 유역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땅이었다. 이러한 형세는 소백산맥 서부의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 전체에서 서남쪽 절반을 차지한 형세이다.

 

그러나 가야 전기에는 이보다 조금 넓은 영역을 차지하여, 낙동강 동쪽의 가지산과 비슬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야 후기의 전성기에는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어 호남정맥(湖南正脈)을 경계로 삼아 금강 상류 지역과 노령산맥 이남의 섬진강 유역 및 광양만, 순천만 일대의 호남 동부 지역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가야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하여 낙동강변 및 남해안을 따라 골고루 분지 모양의 평야가 발달했으며, 곳곳에 나지막한 지맥(地脈)이 뻗어 있어 광활한 평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지리적인 조건에 따라 둘로 나눈다면, 낙동강 하류 역을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 지대와 낙동강, 남강, 황강 상류 지역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 지대로 나눌 수 있다.

 

가야 지역은 질 좋은 철광산이 산재하고 양호한 수상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낙동강 가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되, 그에 더하여 하류 지역의 김해·부산·양산 일대는 어로와 해운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합천·고령·성주 등의 중류 지역 일대는 안정적이고 양호한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으되, 제한적이나마 창원·고성·사천 등의 해안 지대는 해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산청·함양·거창 등의 산간 지역은 농경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가야의 형성 및 변천

1. 전기 가야사

낙동강 유역을 비롯한 경남 해안 지대에는 서기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 및 철기문화와 토기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다. 서기 후 2세기 중엽에는 그 중에서 성장 속도가 빠른 김해 등지를 중심으로 사회 통합이 진전되어 김해 가야국 등 단위 소국이 출현하였다. 수로왕(首露王) 신화는 김해 지방 소국의 성립을 표방하는 정치 이념이었다.

 

이들은 2∼3세기에 걸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12개 소국들이 합친 변한 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체를 이루었고, 발전된 철기생산 능력과 양호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발전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김해 가야국[狗邪國]과 함안 안라국(安羅國)주 04)이 우월하였는데, 특히 해운 입지 조건이 좋은 김해의 가야국은 낙랑(樂浪)과 왜(倭) 사이의 원거리 교역 중계 기지로서 큰 세력을 떨쳤다.

 

 

변진(弁辰) 12국, 즉 전기 가야 12국에는 ①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②접도국(接塗國), ③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④고순시국(古淳是國), ⑤반로국(半路國), ⑥낙노국(樂奴國), ⑦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⑧감로국(甘路國), ⑨구야국, ⑩주조마국(走漕馬國), ⑪안야국(安邪國), ⑫독로국(瀆盧國)이 있다. 이 중에서 거의 확실하게 위치가 비정되는 곳은 밀양·고성·김해·함안·부산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개연성이 높은 개령·고령·창원·칠원·단성·함양 등을 포함하여 보면, 변진 12국의 범위, 즉 전기 가야의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의 경역과 비교가 되면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이다.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보면, 전기 가야의 영역은 김해·창원·칠원·함안·밀양·부산 등의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고령·개령 등의 낙동강 중·상류 지역과 고성·단성·함양 등의 서부 경상남도 지역이 포함된다. 여기에 나무널무덤[木棺墓]과 나무덧널무덤[木槨墓] 관계 유적이 발견된 지역 중에서 위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합천군·성주군·의령군·진주시 지방을 전기 가야의 영역에 추가해 넣을 수 있다.

 

또한 창녕군과 양산군 일대는 진한 또는 신라와 관련된 기사에서 그 이름이 보이나, 지리적 위치로 보아서는 때에 따라 가야연맹 소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유적의 발견 사례도 없고 문헌 자료도 없지만, 그 외에도 거창군·하동군 등은 전기 가야 연맹의 영역 속에 포함된다.( 전기 가야 연맹 소국들의 위치)이 밖의 영남 지역은 대개 진한 12국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3세기 후반 이후의 유적에서는, 길이 8m 정도의 대형 덧널무덤이 설치되기 시작하고, 그 유물로서 청동솥[銅鍑],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 기승용 마구(騎乘用馬具) 등의 북방문화 요소를 부장하였다. 이러한 유물·유적 상황은, 유적 입지 조건이나 부장 유물의 수준으로 보아 정치적 지배계급의 성장에 따른 좀 더 강한 국가체 출현을 상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낙랑 및 대방군을 병합하자, 가야연맹은 선진문물 교역 대상을 상실하면서 일시적인 혼란에 빠져, 고자국(古資國)주 05), 사물국(史勿國),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등의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김해의 가야국을 공격하는 내분을 겪었다. 가야국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포상팔국의 군대를 물리쳤으나, 연맹의 분열상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김해 중심의 동부 가야는 왜와의 교역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중·후반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대방군의 옛 땅을 둘러싼 고구려와의 경쟁을 위해 가야 및 왜의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백제의 교역로 개척에 따라, 가야연맹은 다시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통합되어, 백제-왜 사이의 중계 기지로서 안정적인 교역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야의 중계 역할은 부(富)와 기술과 무력을 모두 갖춘 데서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백제와 왜 사이의 교역을 위한 지리적 편의성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김해 가야국의 우월성은 철 생산과 철기 제작 기술과 무력의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김해 대성동 2호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덩이쇠[鐵鋌]와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 철제 재갈 등의 유물은 이를 보여준다. 가야는 백제와 교역하는 대가로 일부 왜와 함께 동원되어 고구려의 동조세력인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방의 안정에 힘입어, 백제는 황해도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이후 황해도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 다툼은 고구려의 승리로 결말이 났고, 그 여파로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임나가라(任那加羅)를 급습하였다. 이 정벌로 인하여, 고구려의 무력을 앞세운 신라는 결정적으로 가야보다 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백제는 가야 지역을 중개 기지로 하는 대왜 교역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해의 가야국을 대표로 하는 전기 가야연맹은 소멸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야 연맹권은 신라의 중앙집권 능력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지역 기반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나,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김해 지방에서 가야 연맹장의 무덤으로 보이는 대성동 고분군이 5세기 초 이후 급격히 축소되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반영한다.

 

2. 후기 가야사

5세기 전반에 들어 가야 제국은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다. 그 기간 중에 창녕·밀양·부산·성주·개령 등의 세력은 거의 신라 세력에 동조하게 되어, 가야의 영역은 크게 축소되고, 가야연맹을 영도할 세력도 나타날 수 없었다.

 

 

5세기 중·후반에 가야문화는 다시 부흥되었으니, 그 진원지는 경상도 내륙 산간 지방에서부터였다. 고령·합천·진주·산청 등은 천혜의 안정된 농업 지역이었으나, 4세기 이전에는 해운 교역 입지 조건이 불리하여 그다지 큰 문화 축적이 없었다. 그런데 5세기 초 이래 경상남도 해안 지대로부터 철기 및 토기제작 기술이 이주민과 함께 파급되어 들어오면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은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이었으니, 이들은 철 생산이 풍부한 가야산의 야로 철광(冶爐鐵鑛)을 소유·개발함으로써 다른 지역보다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5세기 중엽에 이르러 반파국은 호남 동부 지역을 포섭하여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교역 중심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고령 세력은 옛 가야 지역을 상당히 복구하며 ‘대가야국’으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소국을 포괄하는 연맹체, 즉 후기 가야연맹체를 형성시켰다. 김해 금관국 수로왕을 동생이라고 지칭하는 대가야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신화는 그 당시에 변형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가야는 475년 고구려에 의해 백제 한성(漢城)이 함락당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독자적인 움직임을 좀 더 강화하였다. 가라국왕(加羅國王) 하지(荷知)는 479년에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교역하여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또한 가야는 481년에는 백제와 함께 신라에 구원군을 보내 미질부(彌秩夫)까지 쳐들어온 고구려의 군대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5세기 후반 및 6세기 초에 후기 가야연맹이 가장 번성하였을 때, 그 영역은 거창과 함양을 거쳐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을 섭렵하였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삼아 신라와 대립하였다.『삼국사기』와『양직공도(梁職貢圖)』그리고『일본서기』등에서 확인되는 후기 가야 소국으로는 (1)가라국(대가야국)주 06), (2)안라국, (3)사이기국(斯二岐國), (4)다라국(多羅國), (5)졸마국(卒麻國), (6)고차국(古嗟國), (7)자타국(子他國), (8)산반하국(散半下國), (9)걸손국(乞飡國), (10)임례국(稔禮國), (11)남가라국(南加羅國)주 07), (12)탁순국(卓淳國), (13)탁기탄국(㖨己呑國), (14)거열국(居烈國), (15)사물국, (16)대사(帶沙), (17)상기문(上己文), (18)하기문(下己文), (19)상다리(上多唎), (20)하다리(下多唎), (21)사타(娑陀), (22)모루(牟婁)주 08) 등이 있다. 즉 전성기의 후기 가야 연맹은 영남 지역의 16개 소국과 호남 지역의 6개 소국을 합하여 모두 22개 소국을 아우르고 있었다. ( 후기 가야 연맹의 최대 판도)

 

그러나 6세기 초에 백제는 무령왕대를 맞이하여 남진정책을 추구하였다. 특히 섬진강 하류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 체계를 만들고자 한 백제는 가야연맹에 대하여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가야는 반발하였으나, 결국은 백제의 공세에 밀려 호남 동부 지역을 상실하였고, 대사(帶沙)와 자타(子他) 등지에 성을 쌓아 백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은 522년에 신라에게 청혼하여 결혼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이 동맹은 파탄에 이르고, 그에 따라 가야연맹 내부에는 분열의 조짐이 생겨났다. 이를 포착한 신라는 무력 공세를 통하여 영산의 탁기탄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으며, 뒤이어 532년에 김해의 금관국(남가라국)이, 530년대 후반에 창원의 탁순국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러자 백제도 군대를 투입하여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乞乇城)과 칠원의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었다.

 

6세기 중엽에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 대가야국과 함안 안라국 중심의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된 채, 백제와 신라 양측의 압력에 시달렸다.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아 범 가야권은 백제와 신라의 침략을 막고 독립적 존재로 남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백제 성왕의 외교적 공세에 굴복하여 550년경에 그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 무렵 대가야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나 554년의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에게 패배하자, 가야연맹 소국들은 백제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씩 신라에 기울어갔다. 그 후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의 급습으로 멸망하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3. 가야의 멸망 원인

가야는 왜 멸망했는가? 가야고분 유적에서는 백제나 신라의 고분에 비해 수많은 철제 무기나 갑주(甲冑) 등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째서 신라에게 일찍 망했을까? 가야의 직접적인 멸망 원인은, 562년에 대가야가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이끄는 2만 대군의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한 데 있다. 이 때 신라가 화랑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미리 5,000명의 기병으로 대가야를 공격한 것은 일종의 기습 작전이었다. 그러나 대가야가 이를 막아내지 못한 것은 단기간의 실정 때문만은 아니다. 가야가 총체적으로는 약하지 않았으면서도 신라에게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야 지역에는 거의 모든 군이나 면의 야산마다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이 고분군들은 대개 5~6세기의 것들이다. 그 안에서 토기나 철기를 포함해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 때문에, 가야문화의 힘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야 지역의 소국들은 농업 및 해운 입지 조건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비교적 고른 문화 축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가야연맹의 초기에 김해의 가야국이 상대적으로 우월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소국들을 도태시키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멀리 앞서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김해·부산·창원·함안·고령 등의 세력은 타 지역에 비해 입지 조건도 좋고 문화 능력도 우월하여, 하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였다.

 

둘째, 가야 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경상도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했으며 선진 문물의 창구인 한반도 서북부 및 중부 지역까지의 교통·해운 조건이 좋은데다가 남쪽으로는 왜와의 교역 창구를 이루고 있어서, 그 이권을 노리는 외부 세력이 많았다. 특히 가야는 4세기 말 5세기 초에, 낙동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싼 신라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였다.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를 끌어들여 가야의 문화 중심이었던 김해 지방을 공격하였고, 고구려 군대의 힘을 빌어 가야 지역을 한동안 감시했다. 그로 인하여 가야는 국제 사회에서 한동안 고립되어 가야가 발전하는 기세의 맥을 끊어놓는 결과로 작용했다.

 

셋째, 위에 말한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가야는 기존의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일원적으로 영도해 나가는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늦어졌다. 5세기 중엽에 고령 대가야 중심의 소국연맹 체제가 다시 형성되었지만, 그동안 백제 및 신라에게 뒤떨어진 간격을 만회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가야 연맹은 그들에 비하여 중앙집권체제의 마련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6세기에 들어 백제나 신라로부터 여러 가지 도전이 닥쳐왔지만, 가야는 외부 세력에 대하여 단일외교 창구를 통해 일원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효과적인 결정을 내리는데 비능률적이어서 자신들의 힘을 한데 모으기가 어려웠다.

 

넷째,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풍부한 철광산을 소유하고 이를 개발하여, 철을 팔아 낙랑이나 백제의 선진 문물을 구해올 수 있었고, 왜국에 대하여 철소재 자원 및 철기제작 기술면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다. 왜국은 3∼5세기까지 대부분의 철소재를 가야 지역에서 얻어다 쓰고 있었으나, 5세기 말 이후에는 철광산 개발에 성공했다. 그 결과 가야는 6세기 이후로는 제철 능력 면에서 왜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했다. 게다가 선진 문물의 측면에서 가야보다 우월한 백제가, 전라남도 방면을 통하여 왜와 직접 통교하기 시작하면서 가야의 입지적 우월성이 더욱 타격을 받았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요인은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가야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중에서도 가야가 백제와 신라 등의 주변 국가에 비하여 중앙집권체제의 마련이 상대적으로 늦어져서, 대외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