➁ 가야(加耶) / 정치,경제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의 정치
1. 가야 소국의 내부 구조
2~3세기 당시에 변진 12국은 각기 2,000호 정도를 지배하는 독립 세력이었지만 상대적인 규모의 차이가 존재했다. 하나의 소국이 2,000호라면, 그 인구는 1만 명 전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정도의 규모는 하나의 ‘국가’로 보기에는 조금 미흡하다. 하나의 소국은 일률적인 규모가 아니어서, 소국에 따라 최대 5,000호로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최소 600호로 이루어진 것도 있었다.
전기 가야 소국들 내부의 사회 구조는 어떠하였을까? 3세기의 변진 소국, 즉 전기 가야 소국의 내부 구조는 하나의 국읍(國邑)과 다수의 읍락(邑落)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읍의 주수(主帥)가 각 읍락의 거수(渠帥)들로부터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였고, 또한 천군(天君)의 종교적 권위를 초월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각 소국은 자기가 통합하고 있는 지배 영역을 쉽사리 확장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소국들은 내부 구조의 면에서 일단 권력자가 출현하고 정치적·종교적 권위가 분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아직 중앙집권화의 정도가 미흡할 뿐만 아니라, 그에 이르기 위한 조건, 즉 사회경제적 계급의 분화, 관료제의 제도화, 중심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 등의 요소를 구비했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없다.
이에 비해 후기 가야 소국들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가야연맹체의 영역이 전기에 비하여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후기 가야에서 평상시 소국의 수효가 13개 정도에 달하여 전기 가야 소국의 12국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아, 소국의 규모도 전기에 비해 큰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다만 6세기의 가야 지역 소국은 하나의 국읍과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기본적인 지배권력은 각 소국 한기(旱岐)에게 분산되어 있으나, 대가야국(가라국)·안라국 등의 일부 소국에서는 미약하나마 한기층의 분화에 의한 관등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기 가야 소국들은 기본적으로 전기 가야 소국들과 거의 비슷한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나, 맹주국의 경우에는 그보다 발전된 면모가 어느 정도 인정된다고 하겠다.
2. 가야 소국 사이의 관계
변진 소국, 즉 전기 가야 소국들은 마한이나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각기 국명을 사용하여 인정받고, 그 안에 1인의 지배자 또는 대표자가 존재하는 독립적 정치집단이었다. 그 소국의 크기에 따라 자신들이 부르는 지배자의 호칭에 차이가 있어서,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 다섯 등급의 칭호가 있었다. 이처럼 변한 소국의 지배자들 사이에 상호간의 서열 관념이 매우 발달했던 것으로 보아, 변진 소국들 사이에 연맹체 조직의 질서가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삼한, 즉 마한과 진한 및 변한은 서로 구분되는 정치집단인데, 그 진·변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하는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진왕에 속했다는 12국은 변진 12국이며, 그 진왕은 마한 목지국(目支國)의 왕이다. 진왕은 독점적인 지배권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지위라기보다는, 여러 소국 신지들의 선출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였다. 이는 중국 군·현과 대등한 크기의 교역 주체를 내세우기 위해 삼한 소국들이 만들어내고 유지해오던 제도였다.
변한 소국 연맹체 내에서는 김해의 구야국 신지와 함안의 안야국 축지(踧支)가 가장 서열이 높아서, 진왕이 중국 군·현과의 교섭에서 변한 지역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그 둘의 직함을 뒤에 덧붙여야 하였으며, 다른 소국들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변진 12국은 위(魏)나라와의 통교를 위하여 형식상 진왕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구야국과 안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마한·예(濊)·왜 및 낙랑군, 대방군과 상호 교역하는 등 독자적인 행위를 했던 것이다.
다만 1~4세기의 유물과 유적이 함안보다는 김해 지방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안야국보다는 구야국이 좀 더 우월했다. 그런 실력 차이가 후대 사람들의 인식에 남아『삼국유사』의 수로왕 신화와 5가야 조에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6가야연맹의 전승을 남기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3세기 전반에 변진 12국은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주 09)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 연맹체,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가야 소국들 상호간의 관계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일본서기』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조와 5년(544) 11월 조에는 ‘사비 회의’ 관련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가야연맹 제국이 백제와의 대외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정한 관등을 가진 단일의 외교 사신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7~8개 소국의 대표들이 함께 행동했다.
그 소국들에서 파견된 대표자들은 가야연맹 제국이 공동으로 파견하여 실무를 처리하는 사신단이었으며, 사료상으로는 이들을 ‘집사(執事)’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야연맹 집사들은 연맹체의 일을 처리하는 상설 기구는 아니었고, 대외적인 중대사가 있을 때 결성되는 임시 회의체였다. 그 소국들이 파견한 가야 연맹 집사들의 직함은 졸마국, 산반해국(散半亥國), 사이기국, 자타국, 구차국(久嗟國)의 경우에 이름 없이 단순히 한기나 군(君) 또는 그 아들 등으로 나타나 있고, 안라국, 가라국(대가야), 다라국, 자타국은 차한기(次旱岐), 하한기(下旱岐), 상수위(上首位), 이수위(二首位) 등으로서 그 이름과 함께 나타나 있다. 이로 보아 후기 가야연맹은 백제나 신라 등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인식되었으나, 제국 내에는 연맹 전체를 통괄하는 중앙 집권적인 관직 체계가 있지 않고 각국이 이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야 소국들 중에서 안라와 대가야에는 다른 소국의 한기층보다 우월성이 인정되는 ‘왕’의 칭호가 공식화되어 있었고, 그 두 왕이 가야 소국들 전체에 대한 최고 의사 결정권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안라왕과 가라왕은 그 소국 한기들로부터 가야 지역 전체의 최고 책임자로 인정되기도 하고, 백제나 왜로부터 임나, 즉 가야 연맹의 대표자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6세기 중엽 당시에 안라와 가라는 대내적이고 대외적인 양 측면에서 보아 가야 지역의 소국들 전체에 대한 공동 맹주의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가야의 소국 연맹체 또는 고대 국가의 성립 여부
가야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논의되어야 할 핵심은, 그 소국들이 상호간에 연맹체제를 이루고 있었는가 또는 고대 국가를 이루고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 이래로 막연하게 이른바 ‘6가야’가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설이 통용되고 있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이 표출되었다.
가야테마파크 내에는 거대한 태극전(太極殿)과 가락정전(駕洛正殿)으로 이뤄진 가야왕궁이 있다.
5~6세기 후기 가야 문화권은 고령권, 함안권, 고성-진주권, 김해권의 4개 권역으로 나뉘고, 각 권역은 상호간에 서로 다른 특징과 발전 과정을 보인다. 그리하여 후기 가야 문화권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분립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견해로는 ① 가야 단일 연맹체론, ② 가야 소국 분립론, ③ 대가야 연맹론, ④ 가야 지역 연맹체론, ⑤ 대가야 고대 국가론 등이 있다. 이런 견해들로 보아, 가야 연맹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이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설로부터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설, 그대로 인정하는 설 등이 대립되어 있고, 대가야는 이미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다고 하는 설도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 유물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편년을 조정하고 문화권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를 토대로 삼아 5~6세기의 가야 지역을 네 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최근에 이루어진 중요한 연구 성과이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자들이 거시적인 시각을 견지하지 못하여 백제·신라·왜 등과 달리 가야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 또는 가야 문화권의 공통적 성격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가야 지역 전체에 미치는 단일 연맹체의 존재를 주장한다고 해서, 지역 연맹체의 개념이나 존재에 대하여 부정할 필요는 없다. 가야 지역 내에 존재하는 네 개의 토기 분포권은 상호간에 동질성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고, 그 문화적 성격이 신라나 백제의 토기 문화권과는 더욱 크게 차이가 난다. 또한 『삼국지』,『삼국사기』,『일본서기』등의 문헌 사료에서도 이들을 하나의 단위로 서술하는 기사들이 확인되므로, 역시 이들을 하나의 연맹체로 인정할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소지역권이 구분되는 것은 연맹체에 특유한 분절체계의 존재 양상일 뿐이다.
가야는 과연 소국 연맹체를 넘어 좀 더 발전하여 초기 고대 국가 단계에 해당하는 부체제(部體制)를 이루었을까? 고대 국가의 성립을 말하려면 왕권이 무력을 독점했는지의 여부와 관등제가 존재하는 지의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 가야사의 경우에 국가 형성과 관련된 논의의 대부분은 5세기 후반 이후의 대가야가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479년에 가라왕 하지(가실왕)가 머나먼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지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가야의 발전 도상에 매우 중요한 도약을 시사하고 가야가 초기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단서를 보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가야의 중국에 대한 사신 파견이 그 뒤로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한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것만으로는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우선 왕권이 무력을 독점했는가의 여부는 가야의 각 지방 고분군에 보이는 유물의 부장 상태와 문헌상의 전쟁 상황 등을 고려하여 검토해보아야 한다.『일본서기』계체기 8년(514)조 기사로 보아, 반파(伴跛)는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에 이어지게 하고, 봉수대와 저택을 설치하여 백제 및 왜국에 대비했다. 또한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 및 추봉(推封)에까지 뻗치고, 사졸과 병기를 모아서 신라를 핍박했다고 한다. ( 6세기 초 대가야의 사방 축성)
여기서 반파가 성을 쌓은 위치가 고령에서 멀리 떨어진 점이나, 사졸과 병기를 모았다는 표현으로 보아, 대가야국은 연맹의 수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지방에서도 노동력이나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대가야의 왕권이 강화되어 넓은 영역에 걸쳐 무력을 독점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인정해도 좋다. 이는 대가야가 백제와의 영역 다툼 과정에서 가야 북부 지역에 걸쳐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은 고고학적 유물에서 고령 양식 토기의 확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가야는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켜 일원적인 관등제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다원적인 관등제라고 하더라도 왕 우위의 관등 서열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540년대의 ‘사비 회의’ 관련 기사로 보아, 가야 연맹 제국은 백제와의 대외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정한 관등을 가진 단일의 외교 사신을 백제 도성에 파견한 것이 아니라, 7~8개 지역의 대표들이 함께 가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사비 회의에 모였던 가야 연맹 집사들은 외교를 위해 신라를 방문했었고, 대가야(가라)나 안라에 모여서 회의를 했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그들이 대가야나 안라에서 회의를 하면 대가야 왕이나 안라 왕도 참석하여 제한기 회의(諸旱岐會議)의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만약 훗날 대가야가 성숙한 고대 국가를 이루고 자신들의 사서를 남길 수 있었다면 510년대 이후의 소국들을 ‘부(部)’라고 표기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 강력한 연맹, 즉 실질적인 부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야 제국 전체로 보았을 때는 아직 소국 연맹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남부 가야 제국들은 5세기 이래 2~3개의 서로 다른 문화권을 유지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대가야의 왕권이 좀 더 공고하였다면 얼마 안 있어 이를 통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29년의 안라 회의 이후, 대가야는 가야 남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고, 가야는 대가야-안라 남북 이원 체제로 분열되었다. 가야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대외적으로 하나의 문화권으로 취급되었으나, 그 내부에서는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분절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가야는 510년부터 529년까지 이미 상당한 범위에 걸친 부체제를 구축하여 초기 고대 국가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이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530년대 이후 다시 연맹체 수준으로 분열되었다가 562년에 멸망한 것이다.
가야의 경제
1. 가야의 어로
가야 지역은 경남 해안 지대와 낙동강을 끼고 있으므로, 가야인의 생업 경제에서 어로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진·변한의 해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문신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활발한 어로 생활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가야 지역의 어로 생활 유적인 패총(貝塚), 즉 조개무지에는 부산시 영도구 조도 패총, 창원시 성산 패총, 김해시 봉황동(구 회현리) 패총, 부원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양산시 양산 패총 등이 있다.
패총 문화는 가야 지역에 철기문화 요소가 나타나는 서기 전후 무렵부터 5세기 정도까지 존속되었던 생활 유적인데, 그 중심 연대는 3~4세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패총 문화의 기본 요소로서는 굴 껍질을 비롯한 수많은 패각과, 실을 뽑는데 쓰는 가락바퀴, 그물 끝에 매다는 어망추 등의 토제품과 각종 골각기, 그리고 쇠손칼, 쇠낫, 쇠화살촉, 쇠낚시바늘 등의 철기류를 들 수 있다.
후기 패총 문화를 영유한 주민들의 음식물 종류를 본다면, 김해 부원동 A지구 패총에서 출토된 종류만 보더라도 벼·보리·밀·콩·조 등의 곡물과 굴·털조개·긴고둥 등의 해산물이 나타나고 있다. 즉 이 시기의 패총 주민들은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농경과 어로를 복합적으로 영위하는 농경-어로민이었던 것이다.
경상도 내륙 산간 지역의 5세기 후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뚜껑 있는 굽접시[有蓋高杯] 속에 낙동강 및 그 지류의 민물고기인 누치, 남해 바다의 산물로 보이는 두드럭고둥, 소라, 게와 대구, 청어 등의 생선뼈가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가야의 어로 산업은 후기 가야 시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생업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가야의 농업 생산
고대인의 경제 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 생산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 한반도에서는 보리·콩·팥·조·수수·기장 등 오곡이 재배되었으며, 벼농사도 확산돼 나갔다. 영남 지역에는 고령 양전동, 산청 강루리, 진주 대평리, 울산 검단리 등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농경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입지 조건 자체가 농경에 알맞은 구릉지대로 올라오고, 거기서 밭 유구, 탄화미, 볍씨 자국이 찍힌 민무늬토기 등이 나타나서, 그 주민들이 거의 전업적인 농경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농업은 산간의 정리된 농경지에 불을 놓아 파종을 하고, 정기적으로 돌아가며 휴경을 하는 화전 윤작이었으나, 민무늬토기 중기 이후로는 본격적인 논 벼농사와 함께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곡물의 수확용구로 반달칼과 돌낫을 사용했으며, 그 외에도 돌을 갈아서 여러 가지 모양의 간돌도끼를 만들었다. 그 돌도끼들은 나무를 다듬어 따비, 보습, 괭이 등의 목제 농기구를 만드는데 쓰이기도 하고, 직접 나무를 베고 나무뿌리를 캐서 농경지를 정리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서기 전후가 되면, 경남 지역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니,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나온 수많은 철제 손칼과 각종 도끼, 쇠괭이, 쇠따비 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농업은 논을 일군 다음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물을 대고 파종을 하는 집약 농업으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전반의 삼한 사회에서는 오곡과 벼를 재배하고, 누에치기와 뽕나무 재배를 할 줄 알아, 여러 종류의 비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5월에 각종 작물을 파종하고 난 후와 10월에 추수를 마친 후에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모두 모여 춤을 추고 술을 마신다고 하였다. 이들은 안정된 농경 기반을 가지고 자유로운 읍락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4세기 이후 이 지역 농민들의 생산력은 꾸준히 늘어 일반 농가에서도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으나, 주조 쇠도끼, U자형 쇠삽날, 쇠스랑 등은 묘광(墓壙) 크기 4평방미터 이상의 중대형 분묘에서만 한두 자루씩 나왔다. 이는 가야 지역의 철제 농기구를 이용한 농업이 지배 세력의 선도 아래 발전하고, 또 통제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한다. 즉, 대형 철제 농기구들은 철기 제작 전문 집단을 보유하고 있던 최대 국읍인 김해 가야국의 왕에 의하여 각지의 소군장(小君長)들에게 분배되고 있던 것이다.
5~6세기 무렵의 백제나 신라에서는 중앙 정부가 주도하여, 제방 등 수리 시설을 확대하여 대규모의 논을 개발하고, 소를 이용한 경작, 즉 우경을 시작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여 나갔다. 당시의 가야는 아직까지 지방 소국들의 독립성을 제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 대형 토목사업을 쉽사리 일으키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후기 가야의 중심인 경상도 내륙 산간 지역 중에서 가야천 유역의 성주·고령·합천과 지리산 주변의 진주·남원 등은 한반도 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써, 조선시대 후기에도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가장 높으며 농업용수가 풍부해서 가뭄 피해를 겪지 않았으며, 안음·거창·함양·산음 등도 상당히 비옥하였다. 아직 수리 제어 기술이 미흡해서 산간 지류 등을 이용하여 농경을 하는 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 일대가 최상의 안정적인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좋은 자연조건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해서 가야 연맹이 재기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곡물 종류를 보면, 벼·기장·보리·조·밀·콩·팥 등이 있다. 또한 그동안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동물 뼈 중에서 사슴·노루·멧돼지 등은 수렵에 의한 것이나, 개·돼지·소·말·닭의 경우에는 사육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가야의 농업은 다양한 곡류의 재배뿐만 아니라 여러 가금류의 대한 목축도 함께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것이었다.
3. 가야의 원거리 교역
고대의 경제에서 교역의 중요성은 매우 크나, 가야의 경우에는 특히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원거리 교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야인들이 교역에 활발한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양호한 해상 운송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운의 면에서 볼 때, 3세기 당시에 낙랑에서 배가 출발하여 서해와 남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데 김해의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들른 뒤 해협을 건너 왜로 향했다고 한다. 게다가 철 생산과 해상 운송의 두 가지 점이 연결되어 당시의 경상남도 해안 지대인 변진에서는 철을 생산하여 한, 예, 왜 및 낙랑군, 대방군과 활발하게 교역하여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다.
3세기 이전에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성운문 거울[星雲文鏡], 내행화문 거울[內行花文鏡], 사유조문 거울[四乳鳥文鏡], 오수전(五銖錢), 왕망전, 청동 세발솥[銅鼎]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입증해 주는 것들이다. 반면에 왜와의 교역 또는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왜계 유물로는 자루입술 토기[袋狀口緣土器], 이단입술 항아리[二段口緣壺形土器], 폭넓은 청동 투겁창 등이 있다.
한편 3세기 이전의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한국계 유물로는 독무덤[甕棺墓], 널무덤[木棺墓], 세형동검, 청동 투겁창, 청동 가지창, 잔무늬거울[多紐細文鏡], 갈색 덧띠토기, 회색 와질토기 등이 있다. 서기 2~3세기의 일본 출토 한국계 유물은 대부분 규슈[九州] 북부에서 출토되나, 3세기에는 한국계 유물의 출토 범위가 산인, 산요, 긴키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본열도로 전해진 유물 중에는 중국·낙랑 계통의 청동 거울[銅鏡], 벽(璧), 오수전 등도 있다.
문헌과 유물상의 이러한 증거를 종합하여 판단할 때, 경상남도 해안 지대의 가야 제국, 특히 김해 가야국은 낙랑의 무역 중계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즉, 당시의 가야는 낙랑으로부터 무기나 귀중품 등을 사다가 낙동강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경상도 내륙 지역 곳곳에 팔든지 또는 규슈 등의 왜지(倭地)에 팔아서 중계 무역 상의 이익을 보았고, 그러한 교역은 그들의 철 생산과 어울려 더욱 큰 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낙랑군이 약화된 3세기 말~4세기 이후에는 크게 보아 서북한 지역과의 교역이 지속되면서 일본열도와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당시의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서북한 방면 유물로는 방격규구사신 거울[方格規矩四神鏡], 굽은 칼[曲刀], 청동제 호랑이모양 띠고리[虎形帶鉤], 청동솥[銅鍑] 등이 있다. 4세기 가야 지역의 왜계 유물로는 내만구연 항아리[內彎口緣壺], 하지키 파수부 항아리[把手附壺], 바람개비모양 방패꾸미개[巴形銅器], 벽옥제 돌화살촉, 가락바퀴모양 석제품, 돼지이빨 팔찌 등이 있다.
한편 일본 긴키 지역에서는 원통형 청동기[筒形銅器], 덩이쇠, 철제 판갑옷 등의 가야 유물이 다량 출토된다.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5세기로 이어지는 일본 고훈시대 중기에는 낙동강 서안 가야 지역의 도질토기를 본받아 만들어진 스에키[須惠器], 가야 계통의 철제 판갑과 마구 등과 같은 실용적이고 전투적인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이 등장하며 일본 고대 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5~6세기 후기 가야의 교역은 전기만큼 활발하지 못하여, 중국 계통의 유물로 보이는 것이 전기 가야시대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반면에 왜와의 교역은 김해를 대신하여 고령을 중심으로 계속되어나갔다. 5세기 후반의 일본열도 각 지역의 유력한 수장묘에 대가야 계통의 위세품으로 보이는 단면 팔각형 쇠투겁창, S자형 말재갈, 용문 투조 허리띠 장식, 산치자형 수하식 달린 금귀걸이, 검릉형 말띠드리개, 말투구 등이 주류를 나타내고 있다. 고령 양식 토기들도 일본 규슈 및 세토나이해 연변 각지에 널리 분포되었다. 또한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오키나와산 야광패제 국자와 왜 계통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어, 왜의 물품이 가야 지역에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대가야가 중국이나 왜와 무역하는 교통로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 지방을 이용하기보다는 서쪽의 하동 방면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는 위와 같은 위세품과 합천 야로 지방의 철과 같은 물품의 유통권을 대내적으로 장악하는 한편, 대왜 교역 창구를 일원적으로 독점하게 되면서 가야의 맹주적 존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다만 전 시대와 같이 유리한 수운을 가진 낙동강 하구를 이용하지 못했다는 점은 대외 교역상의 큰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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