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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書 馬韓有五十四國 百濟其一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在 遼東之東 晉世據有 遼西晉平二郡
自置百濟郡 晉太元中 王須 義熙中 王餘映 宋元嘉中 王餘毗並遣獻生口 餘毗死 子慶立 慶死 子牟都立
都死 子牟太(齊書 作大)立
「양서」에는 “마한에는 54개국이 있는데 백제는 그 중 하나이다. 뒤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소국을
아울렀다. 그 나라는 본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요서遼西 진평晉平 두개 군을 점령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동]진晉 [효무제] 태원太元 연간[376-396년]에 왕 수須[近仇首王]가,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연간[405-418년]에 왕 여영餘映[腆支王]이 송나라 [문제] 원가 연간[424-453년]에 왕 여비餘毗
[毗有王]가 노비를 보냈다. 여비가 죽자 아들 경慶[蓋鹵王]이 왕위를 이었고, 경慶이 죽자 아들
모도牟都[文周王?]가 잇고, 모도牟都가 죽자 아들 모태牟太 [東城王](「제서」에는 대大로 기록)가
왕위를 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주] 모도牟都
『三國史記』의 순서를 따르면 文周王(或作 汶洲)이 된다. 그는 蓋鹵王의 아들로 高句麗의 侵入을 받고
父王이 죽자 都邑地를 熊津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三國史記』의 순서에 따른
系譜이며, 牟都가 바로 文周王이라는 확증은 없다. 『南齊書』에 따르면 牟都는 어느 王인지 확증할
수가 없으며 또한 同書에 東城王(牟大)이 牟都의 孫子라고 하였으나 『三國史記』는 이를 의심하고
있어 東城王을 둘러싼 그 위의 계보가 問題點이 있다.
齊永明中 除太 都督 百濟諸軍事 鎮東大将軍 百濟王 天監元年 進太號 征東将軍尋為髙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按弁韓 在辰韓之南 故史稱為 南韓)地 普通二年 王餘隆始復 遣使奉表
稱累破句驪今始得通好 而百濟更為强國
제齊나라 [무제] 영명永明 연간[483-493년]에 태太[東城王]에게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주었다. [양梁 무제] 천감天監 원년[502년] 태太의 작위를 <정동장군>으로
올려주었다. 얼마뒤에 고구려에게 패하여 쇠약해 지기를 수년간 지속하더니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다
.(살피건대 변한弁韓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사서에서 남한으로 부른 것이다.)
[양梁 무제] 보통普通 2년[521년] 왕 여융餘隆[武寧王]이 다시 사신과 표문을 보내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쳐부수었으며 이제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하였다. 백제는 다시 강국이 되었다.
其年詔加 寧東大将軍 五年隆死 復以其子 明為綏東将軍 百濟王所治 城曰固麻 中大通六年 大同七年
累遣使 獻方物 并請 湼槃等經義 毛詩博士 并工匠畫師等 敇並給之 太清三年 猶遣使貢獻
그 해에 조칙으로 <영동대장군>의 칭호를 더하였다. [양梁 무제 보통普通] 5년[524년] 융隆[武寧王]
이 죽었다. 다시 그 아들 명明[聖王]에게 <수동장군>의 칭호를 주었다. 백제왕이 살면서 다스리는
성을 고마固麻라고 부른다.
[양梁 무제] 중대통中大通 6년[534년], [양梁 무제] 대동大同 7년[541년]에도 사신과 방물을 보내고
아울러 열반경에 대한 의소義疏와 모시박사 毛詩博士 및 공장工匠 화사畫師 등을 요청하므로 모두
들어 주도록 조칙을 내렸다. [양梁 무제] 태청太清 3년[549년] 사신과 특산물을 보냈다.
南史馬韓 五十四國 百濟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驪 俱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據有遼西
晉平二郡地 自置百濟郡 晉義熙十二年 以餘映為王 宋元嘉七年 百濟王餘毗 復修貢職 以映爵號授之
毗死子慶代立 慶死立子牟都 牟都死立子牟大
「남사」에는 “마한 54개국 중 백제는 그 하나이다. 뒤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소국을 아울렀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다. 진晉나라때 요서遼西 진평晉平 두개
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세웠다.
[동]진晉 [안제安帝]의희義熙 12년[416년] 여영餘映 [腆支王]이 왕이 되었다. 송나라 [문제]
원가元嘉 7년[430년] 백제왕 여비餘毗[毗有王]가 다시 사신을 보냈다. 이에 영映의 작위를 그대로
주었다. 비毗[毗有王]가 죽자 그 아들 경慶[蓋鹵王]이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경慶이 죽자 아들
모도牟都[文周王?]가 왕이 되고, 모도牟都가 죽자 아들 모대牟大[東城王]가 왕의 자리를 이었다.
齊永明中 除大都督 百濟諸軍事 鎮東大将軍 百濟王 梁天監中 為髙麗所破 衰弱累年 遷居南韓地 普通二年
王餘隆始復遣使 奉表稱 累破髙麗 今始與通好 五年隆死 復以其子明 為持節督 百濟諸軍事 綏東将軍
百濟王 其人形長 太清三年 遣使貢獻 及至見城闕荒毁 並號慟涕泣 侯景怒囚執之 景平乃得還國
제齊나라 [무제武帝] 영명永明 연간[483-493년]에 <대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주었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천감天監 연간[502-519년]에 고구려에게 패배하여 쇠약해 지기를
수년간 지속하더니 남한南韓땅으로 옮겨갔다. [양梁 무제武帝] 보통普通 2년[521년] 왕 여융餘隆
[武寧王]이 다시 사신편에 표를 보내 말하길 “고구려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였으나 이제 다시 통호를
하게되었다.”라고 하였다.
[보통普通] 5년[524년] 융隆이 죽었다. 그 아들 명明[聖王]에게 다시금 <지절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의 칭호를 주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구가 크다. [양梁 무제武帝] 태청太清 3년[549년]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난 사실을 모르고 사신이 왔으나} 도성에 이르러
성과 궁궐이 황폐하고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고 통곡하였다. 후경侯景이 노하여 이들을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侯景의 난이 평정된 뒤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네이버 오픈백과] 후경侯景은 원래 북조 東魏의 장군이었으나 동위의 통치자 高澄과의 불화로 그가
통치하고 있던 하남지역 13주를 가지고 梁에 항복하였다. 양의 무제는 후경을 환대하여 河南王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교활한 후경은 양나라의 국정이 문란함을 알고 난을 일으켜 수도 健康을 함락시킨
후 양무제를 생포하여 굶어죽게 하고 스스로 황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江陵을 방어하고 있던 湘東王
蕭繹은 대장 陳패先을 파견하여 후경을 물리치고 江陵을 수복하였다. 후경은 북으로 달아나던 중에
부하에게 살해되고, 소역은 자립하여 양의 元帝가 되었다.
册府元龜 宋髙祖 永初元年 餘映進號 鎮東大将軍 文帝元嘉七年 十七年 二十年二十七年 並遣使獻方物
孝武大明 元年 七年 並遣使朝貢 順帝昇明二年 王牟都遣使貢獻 詔授使持節 都督百濟軍事 鎮東大将軍
「책부원구」에는 “송나라 고조 영초永初 원년[420년] 여영餘映[腆支王]을 <진동대장군>으로 직함을
올려주었다. [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7년[430년] 17년[440년] 20년[443년] 27년[450년]에도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효무孝武 대명大明 원년 7년에도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宋] 순제順帝 승명昇明 2년 [478년] 왕 모도
牟都[文周王?]가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조칙으로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의 직함을
주었다.
齊武帝 永明八年 遣謁者僕射 孫副 策命牟太 為百濟王 曰 於戲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彝典 用纂顯命 敬膺休業 可不慎歟
梁普通二年 詔加餘隆 寧東大将軍 詔曰守藩海外 逺修貢職 乃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服 兹榮命 三年
遣使貢方物
제齊나라 무제 영명永明 8년[490년] <알자복사> 손부 孫副를 보내 모태牟太[東城王]를 백제왕으로
승인하였다. 조서에서 말하되 “아아! 왕은 대를 이어 충성하고 부지런하며 정성이 남다른 바가 있소.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서 통호를 하는데 지장이 없소. 전례에 따라 관작을 잇게 하니 삼가하여
힘써 업적을 이루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양梁나라 [무제武帝]보통普通 2년[521년] 조칙으로 여융餘隆[武寧王]에게 <영동대장군>의 칭호를
더하였다. 조서에서 말하되 “바다멀리에서 번藩으로서 역할을 다하여 우호를 닦으니 그 정성이
대단하오. 짐이 이를 기뻐하여 이제 휘장과 제복을 보내는 바이오.”라고 하였다. [보통]3년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五年 以餘隆子 明為縘東将軍 百濟王 陳文帝 天嘉三年 以百濟王 餘明 為撫東大将軍 臨海王 光大元年
宣帝大建九年 後主至徳二年 四年 並遣使入朝
魏書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其民土著 地多下濕 率皆山居
[보통] 5년[524년] 여융餘隆[武寧王]의 아들 명明[聖王]이 <계[수綏의 오기?]동장군 백제왕>이
되었다. 진陳 문제文帝 천가天嘉 3년[562년] 백제왕 여명 餘明 이 <무동대장군 임해왕>이 되었다.
광대光大 원년[567년] 선제宣帝 대건大建 9년[578년] 후주後主 지덕至徳 2년[584년] 4년[586년]에도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위서」에는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그 백성들은 토착인이 많고 지형은 낮고 습한
곳이 많아 가솔들을 거느리고 산에서 산다.”고 되어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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