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는데는 국사편찬위의 중국정사조선전 번역문과 삼국사기(솔, 이재호옮김)가 크게 도움이 되어 이를 많이 참조하였음을 다시 한번 밝혀 둡니다. 기록하니 이해하는데 애로점이 있으므로 서기 연도를 병기하였습니다. 攘除國難 志勇果毅 等威名将 論功料勤 宜在甄顯 今 依例 輙假行職 伏願恩愍 聴除所假 寧朔将軍 面中王 姐瑾 厯贊時務 武功並立 今假行冠軍将軍 都将軍都漢王 모대[東城王]가 표문을 보내 말하길 “<영삭장군> 저근姐瑾 등 4인은 힘써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환란을 없앴으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명장의 반열에 들만하며, 공로를 논하면 마땅히 높은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면중왕> 저근姐瑾은 나라일을 잘 돌보고 무공이 또한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 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에 임명하고, 今假行龍驤将軍 邁盧王 廣武将軍 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将軍 弗斯侯 <가행 녕삭장군 아착왕>에 임명하고, <건위장군> 여력餘厯은 충성스럽고 문무가 함께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 용양장군 매로왕>에 임명하고,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충성스럽고 나랏일을 잘 돌보아 국가의 정무를 빛나게 하였으므로 이제 <가행 건위장군 비사후>에 임명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兼㕘軍 臣會邁 等三人 志行清亮 忠欵風著 往太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宜在進爵 謹依例 合假行職 伏願除正 達邊効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将軍 帶方太守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 <행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 등 세사람은 지조와 행실이 맑고 밝으며 충성이 뛰어났습니다. 지난 [송 명제] 태시太始 연간[465-471년]에는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었고, 이번에도 사신으로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전례에 따라서 관작을 올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뚜렷하고 부지런하게 공무를 처리하였으므로 이제 <가행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임명하고, 使謁者僕射 孫副策命 大襲其祖父(梁書作父)牟都爵為百濟王 임명하고, 매邁 (이전에는 만萬으로 되어 있으나 이제 앞의 글에 따라 고친다)는 생각이 빈틈이 없고 근무성적이 뛰어 나므로 이제 <가행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장군의 칭호와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책명사로 보내어 그 조부(양서에는 아버지로 기록) 모도牟都를 이어서 백제왕을 물려받도록 하였다. 아들로 高句麗의 侵入을 받고 父王이 죽자 都邑地를 熊津으로 옮긴 바 있다. 확증은 없다. 『南齊書』에 따르면 牟都는 어느 王인지 확증할 수가 없으며 또한 同書에 東城王(牟大)이 牟都의 孫子라고 하였으나 『三國史記』는 이를 의심하고 있어 東城王을 둘러싼 그 위의 계보가 問題點이있다. 建武二年 遣使上表曰 去庚午年(按庚午 為齊武帝 永明八年)獫允 弗悛舉兵 深逼臣 遣沙法名 等領軍逆討 宵襲霆擊 乗奔追斬 僵尸丹野 주 : 본문의 弁大는 牟大의 오기인 듯]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천나[백송 주 : 본문의 木千那는 木干那의 오기인 듯]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영명8년[490년]이 된다)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 왔으나,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리어 이를 토벌하게 하였던 바, 밤에 번개같이 들이 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行威武将軍 弗中侯 木干那 前有軍功 又拔臺舫為 行廣威将軍面中侯 伏願天恩 特愍聴除 又表曰 臣所遣 行龍驤将軍 樂浪太守兼 長史 臣慕 遺 行建武将軍 城陽太守兼 司馬臣 王茂 兼參軍 行振武将軍 朝鮮太守 臣張塞 의 작위를 주고, 찬수류에게 <행 안국장군 벽중왕>을, 해례곤에게 <행 위무장군 불중후>를, 목간나는 이전에 군공이 있고 또 이번에 누대와 군선을 쳐 부수었으므로 <행 광위장군 면중후>의 작위를 주었으니, 이것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겸 사마> 왕무王茂, <겸참군 행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새張塞와, 此所載 百濟人 地名有與 滿洲語相近者 若牟大當為 穆丹韵也 弗斯當為 富森滋生也 **牟都當為 穆敦切磋之磋也 ** 弗中當為 法珠樹杈也 又如 沙氏 解氏 木氏 皆百濟大族 其名如首流 當為舒嚕珊瑚也 **干那當為 噶納往取也 **時代雖遥 尚亦有可通者耳) 사신의 임무을 맡아 험한 파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를 건넜으니 각자에게 임시로 작위를 주었는데, 바라건대 이들을 정식으로 인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조칙으로 이를 모두 승인하고 장군의 칭호를 주었다. (살피건대 여기에 기록된 백제사람 지명은 만주어와 서로 가깝다. 穆敦切磋의 차磋이고?**, 불중弗中은 당연히 법주수차法珠樹杈이다. 또한 사씨 해씨 목씨는 모두 백제의 큰 성이다. 시대가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지금도 그 의미가 서로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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