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3, 부족 백제-2회)

자연정화 2013. 9. 2. 20:48

본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는데는 국사편찬위의 중국정사조선전 번역문과 삼국사기(솔, 이재호옮김)가

크게 도움이 되어 이를 많이 참조하였음을 다시 한번 밝혀 둡니다.
회원 여러분께서 **...?**로 번역한 부분을 특별히 꼼꼼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 연호만 그대로

기록하니 이해하는데 애로점이 있으므로 서기 연도를 병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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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 泰始七年 又遣使 貢獻 齊書 武帝永明 八年 百濟王 牟大上表曰 寧朔将軍 臣姐瑾 等四人 振竭忠効

 攘除國難 志勇果毅 等威名将 論功料勤 宜在甄顯 今 依例 輙假行職 伏願恩愍 聴除所假 寧朔将軍

面中王 姐瑾 厯贊時務 武功並立 今假行冠軍将軍 都将軍都漢王

태종 태시 7년[471년] 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보냈다. 제서 齊書 에는 “무제 영명 8년 [490년]백제왕

모대[東城王]가 표문을 보내 말하길 “<영삭장군> 저근姐瑾 등 4인은 힘써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환란을 없앴으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명장의 반열에 들만하며, 공로를 논하면 마땅히 높은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이제 전례에 따라 임시 행직을 주었는 바, 바라건대 임시관직을 추인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姐瑾은 나라일을 잘 돌보고 무공이 또한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 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에 임명하고,

建威将軍八中侯  餘古 弱冠輔佐 忠効夙著 今假行寧朔将軍 阿錯王 建威将軍 餘厯 忠欵有素文武列顯

 今假行龍驤将軍 邁盧王 廣武将軍 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将軍 弗斯侯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 는 젊을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업적이 뚜렷하므로 이제

<가행 녕삭장군 아착왕>에 임명하고, <건위장군> 여력餘厯은 충성스럽고 문무가 함께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 용양장군 매로왕>에 임명하고,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충성스럽고 나랏일을 잘 돌보아

국가의 정무를 빛나게 하였으므로 이제 <가행 건위장군 비사후>에 임명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又表曰 臣所遣 行建威将軍 廣陽太守 兼長史 臣髙達 行建威将軍 朝鮮太守 兼司馬 臣楊茂 行宣威将軍

兼㕘軍 臣會邁 等三人 志行清亮 忠欵風著 往太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宜在進爵 謹依例

合假行職 伏願除正 達邊効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将軍 帶方太守

또 표문에서 말하길 “제가 이번에 보내는 <행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고달, <행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 <행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 등 세사람은 지조와 행실이 맑고 밝으며 충성이

뛰어났습니다. 지난 [송 명제] 태시太始 연간[465-471년]에는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었고,

이번에도 사신으로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전례에 따라서 관작을 올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 임시로 행직을 주었으니 이것을 정식으로 인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달達은 변방에서의 공적이

뚜렷하고 부지런하게 공무를 처리하였으므로 이제 <가행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임명하고,

茂 志行清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将軍 廣陵太守 邁 (舊作 萬 今據前文改)執志
周宻 屢致勤効今假行廣武将軍 清河太守 詔可並賜 軍號除大 為 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鎮東大将軍

使謁者僕射 孫副策命 大襲其祖父(梁書作父)牟都爵為百濟王

무 茂 는 뜻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놓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가행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임명하고, 매邁 (이전에는 만萬으로 되어 있으나 이제 앞의 글에 따라 고친다)는 생각이 빈틈이 없고

근무성적이 뛰어 나므로 이제 <가행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임명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장군의 칭호와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백제왕에게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의 직함을 주었다. <알자복사謁者僕射> 손부孫副를

 책명사로 보내어 그 조부(양서에는 아버지로 기록) 모도牟都를 이어서 백제왕을 물려받도록 하였다.

[백송 주] <알자복사謁者僕射> : 천자의 빈객접대 및 사자의 역할 수행관리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牟都 :『三國史記』의 순서를 따르면 文周王(或作汶洲)이 된다. 그는 蓋鹵王의

아들로 高句麗의 侵入을 받고 父王이 죽자 都邑地를 熊津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三國史記』의 순서에 따른 系譜이며, 牟都가 바로 文周王이라는

확증은 없다. 『南齊書』에 따르면 牟都는 어느 王인지 확증할 수가 없으며 또한 同書에 東城王(牟大)이

牟都의 孫子라고 하였으나 『三國史記』는 이를 의심하고 있어 東城王을 둘러싼 그 위의 계보가

問題點이있다.

是嵗 魏人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弁大遣将 沙法名 賛首流 解禮昆 木千那率衆 襲擊魏軍 大破之

建武二年 遣使上表曰 去庚午年(按庚午 為齊武帝 永明八年)獫允 弗悛舉兵 深逼臣 遣沙法名 等領軍逆討

 宵襲霆擊 乗奔追斬 僵尸丹野

이 해에 위魏나라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변대[백송

주 : 본문의 弁大는 牟大의 오기인 듯]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천나[백송 주 : 본문의 木千那는

 木干那의 오기인 듯]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제 명제] 건무2년[495년] 사신편에 표문을 보내 말하길 “지난 경오년(살피건대 경오년은 제나라 무제

 영명8년[490년]이 된다)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 왔으나,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리어 이를 토벌하게 하였던 바, 밤에 번개같이 들이 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今邦宇寧謐 實名等之畧 今假沙法名 行征虜将軍 邁羅王 贊首流為 行安國将軍辟中王 解禮昆為

行威武将軍 弗中侯 木干那 前有軍功 又拔臺舫為 行廣威将軍面中侯 伏願天恩 特愍聴除 又表曰

臣所遣 行龍驤将軍 樂浪太守兼 長史 臣慕 遺 行建武将軍 城陽太守兼 司馬臣 王茂 兼參軍 行振武将軍

朝鮮太守 臣張塞

이제 나라가 편안해 진 것은 실로 사법명등의 공로인바, 이제 사법명에게 임시로 <행 정로장군 매려왕>

의 작위를 주고, 찬수류에게 <행 안국장군 벽중왕>을, 해례곤에게 <행 위무장군 불중후>를, 목간나는

이전에 군공이 있고 또 이번에 누대와 군선을 쳐 부수었으므로 <행 광위장군 면중후>의 작위를

주었으니, 이것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글에서 말하길 “이번에 파견한 <행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모유慕遺 와 <행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왕무王茂,  <겸참군 행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새張塞와,

行揚武将軍 臣陳明 在官忘私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各假行爵 伏願特賜除正 詔可並 賜軍號(按

 此所載 百濟人 地名有與 滿洲語相近者 若牟大當為 穆丹韵也 弗斯當為 富森滋生也 **牟都當為

穆敦切磋之磋也 ** 弗中當為 法珠樹杈也 又如 沙氏 解氏 木氏 皆百濟大族 其名如首流

當為舒嚕珊瑚也 **干那當為 噶納往取也 **時代雖遥 尚亦有可通者耳)

<행 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적인 것을 잊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을 처리하였는 바, 이제

 사신의 임무을 맡아 험한 파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를 건넜으니 각자에게 임시로 작위를 주었는데,

바라건대 이들을 정식으로 인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조칙으로 이를 모두 승인하고 장군의

 칭호를 주었다. (살피건대 여기에 기록된 백제사람 지명은 만주어와 서로 가깝다.

즉, 모대牟大는 당연히 목단운穆丹韵이고, 불사弗斯는 부삼자생富森滋生, **모도牟都는 목돈절차

穆敦切磋의 차磋이고?**, 불중弗中은 당연히 법주수차法珠樹杈이다. 또한 사씨 해씨 목씨는 모두 백제의

 큰 성이다.

그 이름을 보면 수류首流는 당연히 서로산호舒嚕珊瑚이고, *간나干那는 갈납噶納에서 취한 것이다.?**

시대가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지금도 그 의미가 서로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