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한문 소양이 사서를 번역하는데는 역부족인 줄 잘 알면서도 그동안 회원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만주원류고 신라편 번역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띄어 쓰기도 되어있지 않고 죽 연결되어 있는 한문문장 에서 어디에서 끊어 읽을지 고민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한 단어를 가지고 앞에도 붙여보고 뒤에도 붙여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고 두고 고민해 본 것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것도 있어서 처음 보아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한 적도 많았습니다. 짐작한 대목도 많습니다. 저 또한 직접 사서 해석을 해 보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모쪼록 저의 이러한 노력이 회원 여러분에게 조그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按 髙麗所併實止 二國東南之地 其西北諸境 並未屬 髙麗也) 서북 여러 지경은 고려에 병합하지 못하였다.) 本與百濟 髙麗為隣 通考云 在百濟東南 其西北界 出髙麗百濟之間 唐書 唐會要言 在百濟東北 以新唐書髙麗傳 考之 髙麗東跨海 距新羅 南跨海 距百濟 西北渡遼水 接營州 北接靺鞨 則自今奉天遼陽 南至鳳凰城 渡鴨淥江 至今朝鮮之 咸鏡平安等 道者髙麗也 <대도독大都督>을 겸하도록 함으써 그 후대왕들은 모두 <계림도독 雞林都督>의 칭호를 같이썼다. 신라의 옛 영토를 고찰해 보면, 본래 백제 고구려와 인접하였다. 『통고通考』에는 “백제의 동남에 있고, 그 서북경계는 고구려와 백제사이로 튀어 나왔다.”라고 되어 있다. 고찰해 보건대, 고구려는 동으로 바다를 걸쳐 신라에 막히고, 남으로는 바다를 걸쳐서 백제에 막히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와 맞닿고 북은 말갈과 맞닿았으니, 곧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遼陽으로부터 남으로 봉황성鳳凰城에 이르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조선 함경 평안도 등에 이르는 곳이 모두 고구려 땅이다. 而新羅之境 東南兼有 今朝鮮慶尚 江原二道 西北直至 今吉林烏拉 又西近開元鐵嶺 出髙麗百濟之間 故百濟之東北 東南皆相隣近 髙麗 介處 其中 조선의 전라 황해 충청도 등이 모두 백제이다. 그리고 신라의 영토는 동남으로 오늘의 조선 경상 강원 두개 도와 서북으로는 곧바로 오늘의 길림吉林 오라烏拉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는 개원開元 철령鐵嶺에 가까워서 고려 백제의 사이로 튀어 나왔다. 그러므로 백제의 동북 동남이 모두 고구려와 가까이에 있다. 遼志所云海州 (即今海城 始屬百濟 後為髙麗所分 復入渤海 又歸于遼) 東界新羅是也 唐顯慶乾封以後 百濟髙麗之地 多入新羅 東西增九百里 南北增千餘里 (현 개원 철령경계)에 이르고, 동쪽으로 대산을 바라보는데 곧 신라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는 “해주海州 (현 해성,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고 다시 발해에 합쳐졌다. 다시 요나라에 병합되었다.)의 동쪽경계는 신라이다”라고 하였다. 졌고 남북으로 천여리가 더하여 졌다. 開元元和之際 渤海愈盛 鴨綠江以北 皆為渤海所有 遼志所謂 渤海王大仁秀 南定新羅 開置郡邑是也 발해거란에 막혀있어서 반드시 바다를 건너 왕래하는데, 처음에는 그 남쪽경계에 도착하여 정박한다고 하였다. 개원開元 원화元和 무렵에 발해가 점차 강성해져서 압록강 이북이 모두 발해의 소유가 되었는데 『요지遼志』에 말하길 “발해왕 대인수 大仁秀 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군 읍郡邑을 설치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于是新羅 所有僅海城印 及朝鮮數道 非復唐時之境 而自五代 至遼傳國 依然不絶也 至雞林即吉林 雞與吉音既相符 核諸地里亦合葢 송악松岳에 도읍을 세웠는데 원사에 “압록강 동쪽 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平壤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오대五代 이후 요遼나라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계림雞林은 곧 길림吉林인데 계雞와 길吉의 발음이 서로 부합하고 더욱 핵심적인 것은 지리가 또한 모두 부합한다. 본 번역자가 청나라 당시의 한자어 발음은 상고하지 못하겠으나, 현재 북경어 발음으로 雞林은 JI LIN(지린), 吉林 또한 JI LIN(지린)으로 발음이 서로 같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만주원류고가 편찬된 이후 오늘날까지 북경식 한자어 발음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旋歸渤海而 都督之號 仍繫新羅 雞林遂為 新羅之通稱 遼宋以後 為髙麗所併 因舉而屬之 髙麗若 王雲之 撰雞林志 王熙 王煦 之封雞林郡公 亦皆沿其舊名耳 왕이 직접 이를 다스렸다. 그 뒤 왕위를 이을때마다 대대로 그 호칭을 이어 받았다. 비록 길림吉林의 옛땅이 발해에 들어간 뒤에도 도독都督이란 호칭은 신라와 연계되었으며, 드디어 계림雞林은 신라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왕희王熙 왕후王煦 에게 <계림군공>의 칭호를 사용하는데 이 모두가 그 옛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其地或 在挹婁(另條見前) 夫餘之南 或在挹婁之北 或屬元菟 或屬樂浪 或屬句驪 東濵海而 南接濊所載 皆朝鮮句驪 及漢樂浪 諸郡 事則沃沮者 應即今之窩集 盛京邊外 東南北諸處 在在有之 新羅所保 읍루挹婁 (다른 조에 이미 실림) 부여의 남쪽에 있다고도 하고 또는 읍루의 북쪽에 있다고 하고, 혹은 원토元菟에 속한다고 하고, 혹은 낙랑樂浪에 속한다고 하고, 혹은 구리句驪에 속한다고도 하였다. 낙랑樂浪 여러 군이다. 즉 옥저는 응당 오늘의 와집窩集 성경盛京의 변두리 바깥쪽 동남북의 여러 곳이 그 곳이며 신라가 확보하였다. 地 歟王本百濟人 金姓 隋初 已三十餘世 唐武徳 至會昌 又十八世 五代以後 史弗能詳至 其山林 盤互法令 修明道不拾遺 人嫻書射 史稱君子之國 不虚也 若休忍 躭羅諸國 並為新羅所併 其遺迹皆在今朝鮮南界云 烏拉의 남쪽으로 장백산과 가까운 태납심고 殆納沁庫 노눌납 魯訥納 노제魯諸 와집窩集의 땅이다. 여왕歟王은 본래 백제인으로 성이 김씨이다. 수隋나라 초에 이미 삼십여대를 전하였다. 당 무덕武徳에서 회창會昌 연간에 이르기까지 18대를 이었다. 오대五代 이후 역사는 자세히 알수 없다. 닦았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다. 사람들은 잘생겼으며 활을 잘 쏘았다. 사서史書에서 군자의 나라로 부른것이 헛된 것이 아니다. 탐라躭羅의 여러나라가 함께 신라에게 병합되었는데 그 유적이 모두 오늘의 조선 남쪽에 남아있다고 하였다. 지역을 ‘와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窝集"为满语,才旨森林茂密之地, 吉林、 黑龙江 一带的原始森林,当地称为窝集) (신라편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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