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4, 부족 신라-9회)

자연정화 2013. 9. 2. 20:40

建隆二年 遣使來貢 興國二年 又貢 中國使至必涓吉 而後具禮
髙麗圖經 髙麗既併 新羅東北 稍廣 其西北與契丹接 昔以遼為界 後為所侵逼 退保鴨淥 以為險(按此

與下通考 所云 皆北宋末 髙麗之界也 是時新羅 北境屬金 其南境屬髙麗 故髙麗之東北 稍廣而 退保鴨淥

亦始 于此時云)

건륭建隆 2년 사신을 보내왔다. 흥국興國 2년 또 특산물을 보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은 반드시 연길

涓吉에 이르러 이후에 예를 갖추었다. 고려도경 髙麗圖經 에는 “고려는 이미 신라 동북을 아울러서

점차 넓어졌고, 그 서북은 거란과 맞다았다. 이전에 요遼와 경계를 하였는데 뒤에 침략과 핍박을 받아

 압록鴨淥으로 물러나 험한 것을 의지하여 지켰다.

(이로 살피건대 아래의 『통고通考』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북송北宋말 고려의 경계이다. 당시의 신라

북쪽 지경은 금金나라에 속하였고 그 남쪽 지경은 고려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의 동북은 점차

 넓어졌다가 압록으로 물러나 지켰는데 또한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通考 髙麗 以新羅為 東州樂浪府 號東京 建炎二年 募使絶域者 浙東副總管 楊應忱 請身使三韓 結雞林

 以達燕雲 假刑部尚書 往使髙麗 髙麗不奉詔 乃還奉使行程錄 自咸州九十里 至同州 皆北行 東望大山 金人云此新羅山 山内深逺無路可行深處 與髙麗接界 山下至所 行路可三十里 自同州百七十里 至黄龍府 東行

『통고 通考 』에는 “고려는 신라의 동주 낙랑부를 동경으로 불렀다.”고 하였다.ㅣ 건염建炎2년 지역내에

서 뛰어난 사람으로 사신을 모집하자 <절동부총관 浙東副總管> 양응심 楊應忱 이 사신을 자청하고

삼한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과 우호를 맺고 연운에 도달하겠다고 하자, 임시 형부상서직을 주고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고려가 조칙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여 돌아왔다.

『 봉사행정록 奉使行程錄 』에는 “함주咸州에서 90리 떨어져 동주同州가 있는데 모두 북행하여야 한다. 동쪽에 큰산이 보이는데 금金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신라산 新羅山 이라 불렀다. 산은 깊고 멀어 다닐만한 길이 없다. 고려 접경지역인

산아래까지는 30리길이다. 동주同州에서 170리 떨어져 황룡부黄龍府가 있는데 동쪽으로 가야한다.

(按 遼之咸州 金為咸平府 同州金為銅山縣 俱在今鐵嶺 開原之間 東至威堡 堡即吉林界 南至奉天

即唐時髙麗界 開原 即漢時夫餘國界 百濟之舊國也 通考謂 新羅西北界 出髙麗 百濟之間者 應即指此

其後皆併于渤海 是時則屬女真也)

(살피건대 요遼나라 함주咸州는 금金나라때 함평부咸平府가 되고, 동주同州는 금金나라때 동산현

銅山縣이 되었는데 모두 지금의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사이다. 동쪽으로 위보威堡가 있고 보堡는 곧

길림吉林경계이고 남으로 봉천奉天이다. 곧 당나라때의 고구려의 지경이다.

개원 開原은 즉 한漢나라때 부여국夫餘國 곧  옛 백제百濟의 나라이다. 통고通考에서 말하는 ‘신라서북

 지경이 고려와 백제의 사이로 튀어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 뒤 모두 발해渤海에 병합되었으며 그 때에는 곧 여진女真에 속하게 되었다.)

遼(요)
遼史 太祖九年 新羅遣使 貢方物 天贊四年 復來貢 天顯元年 以王郁等 從征新羅 有功 優加賞賚

太宗天顯三年 遷東丹民 以實東平 其民或亡入 新羅女真 聖宗開泰 元年歸州 言居民 本新羅所遷

未習文字

請設學 以教之

요사 遼史 태조太祖 9년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특산물을 보냈다. 천찬天贊 4년 다시 래조하여

특산물을

 보냈다. 천현天顯 원년 왕욱王郁 등 신라를 정벌하는데 종군하였기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벼슬을

더하고 상을 내렸다.

태종太宗 천현天顯 3년 동단東丹 주민을 옮겨 동평東平을 튼튼히 하였는데 그 백성 가운데 일부가

망명하여 신라新羅와 여진女真으로 들어갔다. 성종聖宗 개태開泰 원년 귀주歸州에 살던 주민은 본래

신라에서 옮겨왔는데 문자를 익히지 못하여 학교를 세워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遼史 兵衞志 屬國可紀者 五十九 其二十一曰 新羅
遼史 地理志 唐元和中 渤海王 大仁秀 南定新羅 開置郡縣 海州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 在縣西南

又中京大定府 設朝天館 以待新羅使

『요사 遼史』 병술지 兵衞志 속국屬國에 기술된 자가 59명인데 그 중 21명이 신라인이다.
『요사 遼史』 지리지 地理志 당唐 원화元和 연간에 발해왕 대인수 大仁秀 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여 군현을 개설하였는데 해주海州 암연현巖淵縣 동쪽 경계는 신라이다.

그런고로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에 있다. 또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조천관 朝天館 을 설치하여

신라 사신이 묵도록 하였다.

契丹國志 太祖併吞 諸部 渤海王 大諲譔 深憚之 與新羅結援 新羅言語 名物有似 中國 國王誦自契丹

承天太后時 入貢 其後 王誦為部下所殺 立其弟詢 契丹以王誦 進貢興兵 北討 十年 方罷兵 新羅依舊 朝貢

『거란국지 契丹國志』에는 태조가 여러 부를 병탄하자 발해왕 대인선大諲譔이 이것을 매우 우려하여

신라와 원조동맹을 맺었다. 신라의 언어 이름 문물은 중국과 유사하다. 국왕 송誦은 거란 승천태후

承天太后 때부터 입조하였다.

그뒤 왕王 송誦이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우 순詢이 뒤를 이었다. 거란은 왕王 송誦이  공물을

보냈기에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침략하였다. 10년 군사를 해산하였다. 신라는 이전처럼 조공하였다.

(按 新羅王之名 遼史不載 聖宗本紀 髙麗西京留守 康肇弑其王誦 立誦從兄詢 詔東征後 髙麗復朝貢

是誦與詢 皆髙麗王名 此事亦係髙麗 非新羅也 聖宗用兵 新羅本紀 亦未載 惟地理志 有聖宗伐

新羅還 一語耳) 契丹四至 東南至新羅國 以鴨淥江東八里 黄土嶺為界

(살피건대 신라왕의 이름은 요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종본기에는 “고려 <서경유수> 강조康肇가

그 왕 송誦을 죽이고 송誦의 종형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다. 조칙을 내려 동방을 정벌한 뒤 고려가 다시

조공하였다. 송誦과 순詢은 모두 고려왕의 이름이다.

이 일은 또한 고려의 계보이며 신라의 것이 아니다. 성종이 용병한 것이 신라본기에는 또한 기재되지

아니하고 다만 지리지에 성종이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왔다는 한마디 기록이 있다.) 거란이 사방으로

맞닿은 곳을 보면 동남은 신라국으로서  압록강 동쪽 8리에 있는 황토령黄土嶺을 경계로 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