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4, 신라-10회, 최종회)

자연정화 2013. 9. 2. 20:41

저의 한문 소양이 사서를 번역하는데는 역부족인 줄 잘 알면서도 그동안 회원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만주원류고 신라편 번역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띄어 쓰기도 되어있지 않고 죽 연결되어 있는 한문문장

에서 어디에서 끊어 읽을지 고민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한 단어를 가지고 앞에도 붙여보고

뒤에도 붙여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고 두고 고민해 본 것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특히 만주원류고는 전후 인과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사서에서 쓰여진 일부 문장을 들어서 기록한

것도 있어서 처음 보아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한 적도 많았습니다.

여러사서 기록과 삼국사기의 관련 부분을 찾아서 의미를 재구성해 가면서 며칠간 고민해서 겨우 뜻을

짐작한 대목도  많습니다. 저 또한 직접 사서 해석을 해 보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모쪼록  저의

이러한 노력이 회원 여러분에게 조그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번역문에서 부족한 부분은 기탄없이 의견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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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원)
元史 髙麗傳 髙麗地 東至新羅 南至百濟 皆跨大海 後闢地益廣 併古新羅 百濟 髙句麗三國 為一

(按 髙麗所併實止 二國東南之地 其西北諸境 並未屬 髙麗也)
謹按 新羅自魏時 始見謂之斯盧 亦曰新盧 實一國也 唐初 兼百濟髙麗 二國之地

『원사 元史 』 ‘고려전 髙麗傳’ 에는 “고려 땅의 동쪽은 신라이고 남쪽은 백제인데 모두 대해를 걸쳐 있다. 뒤에 땅을 넓혀서 옛 신라 백제 고구려 세나라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살피건대 고려가 병합한 것은 두 나라의 동남쪽 경계에 불과하고 그

서북 여러 지경은 고려에 병합하지 못하였다.)

龍朔元年 始以其國 為雞林州都督府 以新羅王 金法敏 兼大都督 其後嗣王 皆兼雞林都督之號 考新羅故地

本與百濟 髙麗為隣 通考云 在百濟東南 其西北界 出髙麗百濟之間 唐書 唐會要言 在百濟東北

以新唐書髙麗傳 考之 髙麗東跨海 距新羅 南跨海 距百濟 西北渡遼水 接營州 北接靺鞨 則自今奉天遼陽

南至鳳凰城 渡鴨淥江 至今朝鮮之 咸鏡平安等 道者髙麗也

용삭龍朔 원년 처음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 雞林州都督府>로 삼고 신라왕 김법민 金法敏 이

<대도독大都督>을 겸하도록 함으써 그 후대왕들은 모두 <계림도독 雞林都督>의 칭호를 같이썼다.

신라의 옛 영토를 고찰해 보면, 본래 백제 고구려와 인접하였다. 『통고通考』에는 “백제의 동남에 있고,

그 서북경계는 고구려와 백제사이로 튀어 나왔다.”라고 되어 있다.

『당서 唐書 』 당회요唐會要에는 “백제의 동북에 있다”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을

고찰해 보건대, 고구려는 동으로 바다를 걸쳐 신라에 막히고, 남으로는 바다를 걸쳐서 백제에 막히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와 맞닿고 북은 말갈과 맞닿았으니, 곧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遼陽으로부터

남으로 봉황성鳳凰城에 이르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조선 함경 평안도 등에 이르는 곳이 모두 고구려

 땅이다.

自今開元 廣寧 錦義 寧逺南至葢平 復州 寧海 又東南跨海 極朝鮮之 全羅黄海 忠清等道者百濟也

而新羅之境 東南兼有 今朝鮮慶尚 江原二道 西北直至 今吉林烏拉 又西近開元鐵嶺 出髙麗百濟之間

故百濟之東北 東南皆相隣近 髙麗 介處 其中

오늘의 개원에서부터 광녕 금의 영원, 남으로 개평 복주 영해에 이르고 또한 동남으로 바다를 건너

조선의 전라 황해 충청도 등이 모두 백제이다. 그리고 신라의 영토는 동남으로 오늘의 조선 경상 강원

두개 도와 서북으로는 곧바로 오늘의 길림吉林 오라烏拉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는 개원開元

철령鐵嶺에 가까워서 고려 백제의 사이로 튀어 나왔다. 그러므로 백제의 동북 동남이 모두 고구려와

가까이에 있다.

通考 所云亦在 髙麗東南 奉使行程錄所云 自咸州至同州 (今開原 鐵嶺界) 東望大山 即新羅界

遼志所云海州 (即今海城 始屬百濟 後為髙麗所分 復入渤海 又歸于遼) 東界新羅是也 唐顯慶乾封以後

百濟髙麗之地 多入新羅 東西增九百里 南北增千餘里

『통고』에는 “또한 고구려의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봉사행정록』에는 “함주咸州로부터 동주同州

(현 개원 철령경계)에 이르고, 동쪽으로 대산을 바라보는데 곧 신라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는 “해주海州 (현 해성,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고 다시

 발해에 합쳐졌다. 다시 요나라에 병합되었다.)의 동쪽경계는 신라이다”라고 하였다.

당 唐 현경顯慶 건봉乾封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땅이 많이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동서로 구백리가 더하여

 졌고 남북으로 천여리가 더하여 졌다.

幅員益廣而 唐人篇什往往 以海外稱者 葢西北 為渤海契丹 所隔 必浮海往來 始達其南境 故耳洎

開元元和之際 渤海愈盛 鴨綠江以北 皆為渤海所有 遼志所謂 渤海王大仁秀 南定新羅 開置郡邑是也

폭과 둘레가 더욱 넓어졌다. 당나라 사람이 자주 왕래하였고, 해외에서 말한 것을 보면 모두 서북이

 발해거란에 막혀있어서 반드시 바다를 건너 왕래하는데,  처음에는 그 남쪽경계에 도착하여

정박한다고 하였다. 개원開元 원화元和 무렵에 발해가 점차 강성해져서 압록강 이북이 모두 발해의

소유가 되었는데 『요지遼志』에 말하길 “발해왕 대인수 大仁秀 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군

읍郡邑을 설치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後唐清泰末 髙麗復起 王建襲據 新羅邊邑 建都松岳 元史所謂 在鴨淥江 東千餘里 非平壤之舊者是也

于是新羅 所有僅海城印 及朝鮮數道 非復唐時之境 而自五代 至遼傳國 依然不絶也 至雞林即吉林

雞與吉音既相符 核諸地里亦合葢

후당後唐 청태清泰말에 고구려가 다시 일어났는데, 왕건王建이 신라의 변두리 읍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송악松岳에 도읍을 세웠는데 원사에 “압록강 동쪽 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平壤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때에 신라는 겨우 해성海城의 동쪽과 조선의 여러 개 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나라 시절때의 땅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오대五代 이후 요遼나라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계림雞林은 곧

길림吉林인데 계雞와 길吉의 발음이 서로 부합하고 더욱 핵심적인 것은 지리가 또한 모두 부합한다.

[백송 주] “계림雞林은 곧 길림吉林인데 계雞와 길吉이 음이 서로 부합하고”라고 저자가 말한고 있는데,

 본 번역자가  청나라 당시의 한자어 발음은 상고하지 못하겠으나, 현재 북경어 발음으로 雞林은

JI LIN(지린), 吉林 또한 JI LIN(지린)으로 발음이 서로 같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만주원류고가 편찬된

이후 오늘날까지 북경식 한자어 발음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在龍朔時 既兼二國與 靺鞨渤海壤地 相錯設重鎮 于此 而王自領之 自後相沿 世襲其號 雖吉林故地

旋歸渤海而 都督之號 仍繫新羅 雞林遂為 新羅之通稱 遼宋以後 為髙麗所併 因舉而屬之 髙麗若 王雲之

撰雞林志 王熙 王煦 之封雞林郡公 亦皆沿其舊名耳

용삭龍朔 시기에 이미 두나라를 아우으르고 말갈 발해와 땅을 다투어 서로 중진을 이 곳에 설치하였으며

 왕이 직접 이를 다스렸다. 그 뒤 왕위를 이을때마다 대대로 그 호칭을 이어 받았다. 비록 길림吉林의

옛땅이 발해에 들어간 뒤에도 도독都督이란 호칭은 신라와 연계되었으며, 드디어 계림雞林은 신라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요나라 송나라 이후에 고려에 병합된 이후에도 또한 그대로이다. 왕운王雲이 찬술한「계림지」에는

왕희王熙 왕후王煦 에게 <계림군공>의 칭호를 사용하는데 이 모두가 그 옛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諸史又云 新羅始保沃沮 考後漢書 魏志 通考 俱有東沃沮 南沃沮 北沃沮之 文無 大君長 邑落各自有帥 而

其地或 在挹婁(另條見前) 夫餘之南 或在挹婁之北 或屬元菟  或屬樂浪 或屬句驪 東濵海而 南接濊所載

皆朝鮮句驪 及漢樂浪 諸郡 事則沃沮者 應即今之窩集 盛京邊外 東南北諸處 在在有之 新羅所保

여러 사서에 또한 “신라는 처음에 옥저沃沮를 확보하였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위지 魏志」」 「통고 通考 」등을 살펴보면 모두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는 문자가 없고 대군장이 읍락을 통치하는데 각각 군사가 있다고 하였다. 그 지역은

읍루挹婁 (다른 조에 이미 실림) 부여의 남쪽에 있다고도 하고 또는 읍루의 북쪽에 있다고 하고, 혹은

 원토元菟에 속한다고 하고, 혹은 낙랑樂浪에 속한다고 하고, 혹은 구리句驪에 속한다고도 하였다.

동쪽으로 바다와 맞닿았고, 남쪽으로 예濊와 접한다고 실려있다. 모두 조선朝鮮 구리句驪 및 한漢의

낙랑樂浪 여러 군이다. 즉 옥저는 응당 오늘의 와집窩集 성경盛京의 변두리 바깥쪽 동남북의 여러 곳이

 그 곳이며 신라가 확보하였다.

據毌丘儉傳 在肅慎(另條見前)界 南千餘里 則當在吉林 烏拉之南 近長白山 殆納沁庫 魯訥納 魯諸窩集之

歟王本百濟人 金姓 隋初 已三十餘世 唐武徳 至會昌 又十八世 五代以後 史弗能詳至 其山林 盤互法令

修明道不拾遺 人嫻書射 史稱君子之國 不虚也 若休忍 躭羅諸國 並為新羅所併 其遺迹皆在今朝鮮南界云

‘관구검전’에 따르면 숙신肅慎 (이미 다른 조에 실림)경계에서 남쪽 천여리 즉 지금의 길림吉林 오라

烏拉의 남쪽으로 장백산과 가까운 태납심고 殆納沁庫 노눌납 魯訥納 노제魯諸 와집窩集의 땅이다.

여왕歟王은 본래 백제인으로 성이 김씨이다. 수隋나라 초에 이미 삼십여대를 전하였다. 당

무덕武徳에서 회창會昌 연간에 이르기까지 18대를 이었다. 오대五代 이후 역사는 자세히 알수 없다.

그 나라는 산림이 우거지고 기와로 지붕을 이었으며 법령이 정비되어 있고 사람들은 명도明道를

닦았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다. 사람들은 잘생겼으며  활을 잘 쏘았다. 사서史書에서 군자의

나라로 부른것이 헛된 것이 아니다. 탐라躭羅의 여러나라가 함께 신라에게 병합되었는데 그 유적이

모두 오늘의 조선 남쪽에 남아있다고 하였다.

[백송주] 와집窩集 : 와집은 만주어로 삼림이 무성한 땅을 가리키며,  길림 흑룡강 일대의 원시 삼림

지역을 ‘와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窝集"为满语,才旨森林茂密之地,  吉林、 黑龙江 一带的原始森林,当地称为窝集) (신라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