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1>영남 최대밀집 ‘지석묘 라인’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을 가다]

자연정화 2018. 7. 23. 10:37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을 가다]

<1>영남 최대밀집 ‘지석묘 라인’

샛강 낀 평지 지석묘 200~370기 산재…신라 떨게하던 강국의 흔적

 

출처 : 매일신문 2014. 11. 19. 청도 노진규 기자

 

 

 

삼한시대 초기왕국 이서국(伊西國)은 청도의 자긍심이자 상징이다.

약 2천 년 전 지금의 청도군 영역에서 청도천과 동창천을 젖줄로 출발한 이서국은 구리와 철을 잘 다루던 정치집단으로 나타났다. 가야와 낙동강을 통해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쉽게 받아들인 이서국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죽엽군’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강력했다.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다투던 이서국은 신라가 공격하려 하자 오히려 금성에 쳐들어가 신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서국 역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14대 유례왕 14년(297년)에는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방어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왔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두 대나무 잎을 머리에 꽂고 적군을 쳐부쉈다. 그 뒤에 간 곳을 몰랐는데 많은 대나무 잎이 죽작릉(미추왕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이는 미추왕이 전쟁을 도운 것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서국의 역사와 기록은 두 사서와 지리지에 단편적으로 남아있을 뿐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청도향토사학회에서 세미나를 여는 등 연구를 거듭하고 있고, 최근 도로개설 등으로 구제발굴이 진행되면서 학계와 문화재연구기관의 성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서국의 실체를 밝혀주는 실마리와 흔적을 찾아 따라가 본다.

 

◆청도천, 동창천 200여 기 이상 분포

 

청도 이서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극히 일부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청도 지역에는 왕성으로 추정하는 성터와 산성이 남아있고, 이서국의 뿌리인 청동기 문화 유적이 청도천과 동창천을 따라 산재해 있다. 특히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한 이서국은 선대의 지석묘(고인돌) 유적을 대규모로 남겨놓았다. 그중 청도천을 따라 형성된 지석묘는 어느 정도일까. 경남 창녕과 인접한 청도 풍각면 흑석리는 마을지명부터 흑석(黑石)이다. 마을 앞 논`밭에 검은색의 지석묘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보고 흑석으로 불렀다고 한다.

 

흑석1리 석통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흑석리의 지석묘와 상통한다고 해서 석통마을로 이름이 붙었다. 이곳 한 과수원에는 지름 2, 3m 크기 지석묘 4기가 밭 가운데 여기저기에 있다. 주민들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것이어서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집터와 과수원에서 지석묘를 만날 수 있는 현상은 풍각면 흑석리부터 각남면 신당리~화리~칠성리~화양읍 합천리~범곡리~송북리~청도읍 원정리 방향으로 이어진다. 지석묘는 진행방향을 따라 2열 직선행렬의 형태를 보인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풍각~청도 국도변 바로 옆이 바로 지석묘의 보고였던 것이다.

 

석통마을의 한 집은 지석묘 때문에 집을 대문 쪽으로 당겨 짓고, 뒤편 마당을 지석묘에 내주고 있다. 이 마을 한 주민은 “지석묘는 집안 어른들이 예전부터 신성시했고,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기억했다.

 

칠성리에는 지석묘가 집주인의 치성을 받으며 대문 옆을 차지하고 있다가 최근 집이 팔리면서 방치된 상태다. 청도읍 원정리도 속칭 흑석마을로 불리고 있다. 원정2리 표지판 옆 기단도 지석묘이고, 바로 옆 느티나무 둘레석에도 지석묘가 버티고 있어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지석묘가 있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청도군 관계자는 “청도천을 끼고 작은 샛강이 있는 평지를 중심으로 지석묘가 형성되어 있고, 지석묘가 이만큼 남아 있는 곳은 영남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드물 것”이라고 했다. 학계는 지석묘 분포를 청도천과 동창천을 합쳐 200여 기 이상, 청도향토사학회는 70여 곳 370여 기로 추산하고 있다.

 

◆‘칼의 고장’ 명명 손색없어

 

“한 20년쯤 전이지. 칼 참 참하던데…. 소 쟁기로 논을 갈다 발견했지.” 풍각면 흑석리에서 만난 70대 주민의 설명이다. 그는 당시 돌칼이 종이를 벨 정도로 날카로운 형상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최근 각남면 신당리 마늘밭에서 돌을 건드리니 물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 지석묘를 들어내니 간돌칼(마제석검) 2점이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긴급 수습했다고 한다. 청도~풍각 도로공사로 인한 신당리 인근 교차로 발굴조사에서도 돌칼 수점이 나왔다. 흑석리 한 민가에서는 집을 신축할 때 돌칼이 나왔다고 한다. 돌칼이 발견되는 곳은 대부분 부족장의 무덤 자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청도군 관계자는 “앞으로도 발굴조사를 벌이면 돌칼이 나올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며 “과거 도굴됐거나 논, 밭 속에 숨어 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박승규 영남문화재연구원장은 “이서국의 기반을 이룬 청동기시대 문화의 증거인 지석묘가 산재하고, 돌칼의 수량 또한 많고 크기가 큰 편이어서 청도를 ‘석검의 고장’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청도지역도 새로 발견되는 숫자보다 훼손되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어 지석묘군 정비와 주변 매입 등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문화유적 분포지도 등을 청도군에서 읍면 건축부서까지 제대로 공개하고 알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앞으로 지석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를 신성시하는 마을 어른들에게만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것이다.

 

청도향토사학회는 청도천과 동창천을 중심으로 한 지석군과 화양읍 진라리 대취락 유적, 청도읍 송읍리 유적 등의 발굴로 인해 이서국의 부족국가 면모와 기반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인접한 가야에서 받아들인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신라의 금성을 공격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칼이 증명하는 이서국의 위상-화양읍 진라리 마제석검 길이 66.7㎝ 국내 최장…10여년 전 고속도 닦다 발굴

 

출토 당시 국내 최대 크기로 발견된 진라리 마제석검(간돌칼`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 예전리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국립경주박물관 전시)은 이서국의 국가형성과 관련한 주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지난 2002~2003년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건설 당시 청도 화양읍 진라리 918-1번지 일대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이 있었다. 이때 2개의 석검이 출토됐는데 그중 지석묘 3호에서 나온 마제석검은 국내 돌칼 가운데 가장 큰 칼로 주목받았다. 지석묘 바닥에서 화살촉, 붉은간토기 등과 함께 출토됐다.

 

길이 66.7㎝로 이중 칼몸 길이 49.3㎝, 손잡이 길이가 17.4㎝이며 칼몸 최대 폭은 6.9㎝다.

 

길게 뻗은 칼몸의 끝은 날카롭고 뽀족하다. 이러한 대형 돌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세심한 작업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뛰어난 장인이 부족을 지배하던 지배자에게 바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마제석검은 찌르고 베는 ‘칼’ 이상의 의미로 향후 이서국으로 발전하는 부족의 세력과 지배층 권력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청도 매전면 예전리 산121번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예전리 비파형동검은 중국의 고대악기인 비파를 닮아 비파형동검으로 불린다. 길이 34.8㎝, 폭 7.4㎝로 칼몸 중앙부에 돌기가 있으며 양날의 중앙을 따라 등날이 형성되어 있다. 칼몸과 칼자루를 일체형으로 만들지 않고 따로 손잡이를 만들어 끼울 수 있게 한 점이 특징이다. 정확한 위치와 출토상황이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