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滿洲) 역사
1. 개략적 역사
만주에는 역사적으로 세 계통의 종족이 살아왔다. 중부는 예맥족의 터전이었고, 그 동쪽으로 숙신 계통의 종족이 자리를 잡았으며, 서부 지역에는 동호 계통이 활약했다.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고조선,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건국했다.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한반도 북부에는 옥저 세력도 있었다.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 수-당 시기에는 말갈, 요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는 여진,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로 불렸다. 현재 만족(滿族)으로 불리는 이들의 후손은 2000년 인구조사 기준 1068만 명이다. 물길족은 부여국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말갈족은 고구려 유민과 더불어 발해를 건국했고, 여진족과 만주족은 각각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동호 계통은 다싱안링산맥 서부의 초원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유목민족으로서, 내몽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흉노를 호라 했기때문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 하여 동호라 불렀다. 동호족의 후예로서 오환과 선비, 거란 , 실위가 있다. 동호족이 흉노에게 격파되어 남쪽으로 이동한 뒤에 오환산과 선비산을 근거지로 삼음에 따라 오환, 선비라는 새로운 종족 명칭이 등장했다. 특히 선비족은 세력을 크게 일으켜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모용부는 전연(349~370), 후연(384~409), 서연(385~394), 남연(398~410)이라는 연나라들을 건국했고 우문부는 북주(556~581), 걸복부는 서진(385~431), 독발부는 남량(397~414), 탁발부는 대(338~376), 북위(386~534), 동위(534~550) 서위 (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 송기호, 『동아시아의 역사분쟁』
2. 만주사에 대한 접근
전근대에는 만주라는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주족이 요동을 통일하고 한족의 유입을 막기 위해 유조변을 설치하면서 이 지역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었으며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이런 근대의 만주 발명과는 별개로 전근대 내내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중국과 별개의 영역이었다. 사실 남북국시대까지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가 요동이라는 하나의 인문지리적 영역으로 묶여 있었으며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였다. 지금처럼 만주와 한반도가 칼처럼 나뉘게 된 건 세종이 두만강,압록강을 국경으로 확정하고 만주족이 요동을 점령하여 만주 지명이 붙여지면서부터다.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확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선사관(만주 + 조선)'을 고착시키기도 했다.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이때의 역사 연구 때문에 말갈,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동북공정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을 중심으로 만주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둘 다 자국을 중심으로 만주를 변경 취급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한규 교수는 그의 저서 『천하국가』 및 『요동사』에서 만주 역사의 주도 세력을 크게 예맥계, 동호계, 숙신계로 정의했다[1]. 이 구분에 따르면, 예맥계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에까지 이어졌으며 한반도 북부 및 압록강 ~ 두만강 인근의 만주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했으나 이후 타 세력에 흡수되었다. 동호계는 산융, 동호 - 오환, 선비 - 거란, 해, 습, 실위 - 몽골로 이어졌으며(그러나 선비나 몽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통 논란이 활발하다) 주로 요하 인근을 중심으로 한 만주 서부에 거주했으나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와해되어 몽골에 흡수되었다. 숙신계는 숙신 - 말갈/물길 - 여진 - 만주로 이어졌으며, 본래 만주 동북부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나 두 세력이 소멸한 이후에는 전 만주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본래 수렵 및 약탈을 주로 하고 농업과 가죽 교역 등으로 생활을 보조하는 삶을 살았으나, 점차 타국의 영향을 받아 농경 사회의 역량을 흡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주인들의 중국 이주 및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만주 유입, 그리고 일제의 만주 점령과 중국의 동북 3성 편입 등으로 인해 이곳에 살던 토착민들은 자기 삶을 보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주도권을 많이 빼앗겼으며, 만주어로 대표되는 고유 문화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중국은 이에 탄력을 받아 동북공정을 진행하여 소수민족의 동화를 꾀하고 있다.
정리해보자면, 전근대 만주를 주름잡은 3대 종족인 동호/예맥/숙신은 각자 몽골/한국/만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몽골은 선비, 거란 등의 동호계 제 종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여기며 한국이 고구려, 발해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는 것처럼 요나라 역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반면 만주족은 청 시기에 몽골과 한국(조선)을 지배했음에도 청 붕괴 후 몽골, 한국처럼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해 중국으로 흡수되어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현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주족이 독자적인 민족국가를 세웠다면 몽골, 한국, 중국과 지리한 역사, 영토 다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만주에서 3개의 종족이 교류하며 역사를 써갔다 보니 이들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몽골과 한국이 동족이니 만주와 한민족이 동족이라 하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3. 역사
시대구분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만주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에 나와 있는 것을 큰 줄기로 취했다.
3.1. 고대
신석기시대에는 요하 유역에서 홍산문화가 번영을 누렸으나 이들과 후속 만주 세력의 연계성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는 흔히 고조선만의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이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대변하는데, 실제로는 고조선만의 유물도 아니었고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고조선이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어찌 되었건 청동기시대 만주의 구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학설과 많은 논쟁점이 있다.
기원전부터 산융-동호, 숙신, 예, 맥 등의 집단이 존재했다. 이 중 산융-동호 계통의 경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요서 인근에 등장해 중국과 투닥거렸으나 제나라에 의해 토벌된 이래 위축되었다가, 동호로 재등장해 인근 지역을 통솔했으나 흉노가 성장하여 묵특선우의 대에 토벌당했다. 숙신은 싸리나무 화살, 가죽 등을 판매하는 모습으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
한편 예는 부여 등의 국가를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맥도 서서히 중국 북방에서 동북방인 만주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모르나[2], 적어도 춘추전국시대 중반기에 고조선이 요동 인근부터 한반도 북부을 지배하며 상당한 영토를 지닌 국가가 되었고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왕을 칭할 정도로 세를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초반기에 세가 급작스레 강해진 연나라에 의해 요동을 상실하는 바람에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영토가 줄어들어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기원전 3세기 후반기에 연나라와 진나라가 잇따라 멸망하고 초한쟁패기 들어서자 고조선은 다시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세를 회복하게 되고 위만이 반란을 일으키고나서 세운 위만조선도 옥저와 동예 등 주변국가들을 잇따라 복속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결국 한나라가 팽창정책을 펴서 고조선을 공격하자 꼬박 1년간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기원전 108년 전한에게 멸망당했다.
3.2. 중세
흉노의 쇠퇴로 기원후 2세기 이후 동호의 후신인 오환과 선비가 등장하여 몽골과 화북지방까지 영역을 넓혔다. 오환은 일찍이 중국쪽으로 남하했으며, 선비의 여러 부 중에서도 탁발부와 모용부가 두각을 나타내어 모용부는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걸처 전연과 후연이 되어 요하 유역과 화북을 장악했다. 탁발부는 내몽고에서 대기타고 있다가 화북으로 내려가 북위를 건국하고 후연을 격파하고 5세기에는 화북을 통일했다.
숙신에서는 읍루가 갈라져 나왔다가 5세기 이후 물길이 갈라져 나왔으며, 5세기 말에 부여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6세기 말에 이르러 말갈 7부가 되었다. 한편 4세기 이후부터는 동호의 후신인 거란과 해가 등장하여 주변 강호들인 유연-돌궐, 북위-수-당, 고구려 사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5세기에는 고구려가 주변 지역을 통솔하는 역할을 거의 독점하며 7세기까지 만주를 거의 석권하게 된다. 만주 역사상 최초로 한 왕조가 만주 전체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독주가 5세기 이후 꾸준한 것은 아니었고 북만주 방면에서 5세기 말에는 물길, 6세기에는 돌궐에 의해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를 모두 극복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통일 이후 자신들의 세계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고구려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고구려는 668년 당에 의해 멸망하고 만주는 일정기간 당의 지배하에 놓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강한 저항과 거란의 반란으로 당의 만주 지배는 붕괴된다. 이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은 698년에 만주 동부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고, 9세기까지 만주 동북부를 장악하고 예맥과 말갈 등을 휘하에 편성하였다(단, 흑수말갈은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이후 여진족으로 이어진다). 한편 만주의 서부에서 거란이 송막(요서지방)을 중심으로 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3.3. 근세
3.3.1. 정복 왕조 시대
거란은 자신들과 근접한 해족, 습[3]와 북만주의 실위까지 정복하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를 장악하고 이로써 만주는 한민족의 판도에서 떨어져나간다. 한편 거란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을 이용해 중국 진입을 시도했으나 연운 16주를 획득하는 선에서 침투를 마무리한다.
허나 요는 여진 중 일부만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었고,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요의 공격 당시 송이 이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을 요구하며 남하하여 끝내 화북을 완전히 석권하고 중원 대륙을 남송과 양분한다.
한편 요나라가 망하고 일부 요나라 사람들이 서역과 그 근처를 중심으로 도망쳐 서요를 세운 후, 만주는 금의 영역이 되었고 금은 또한 12세기 동안 몽골 지역을 분할 통치 정책으로 통제하려 하였으나, 몇 차례의 실패 이후 칭기즈 칸에 의해 통합 국가를 건립하게 된 몽골 제국의 폭발력에 휩쓸리고 만다. 이후 몽골 제국의 정통 왕가는 스스로를 원나라로 개칭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여진인들을 부용 세력으로 삼아 금나라를 화북으로 밀어내고(최종적으로는 정복) 만주를 장악했다. 이 지역은 칭기스칸의 형제들에게 분봉되어 동방 3왕가의 주된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과 고려인들의 통제를 위해 심양왕을 설치하기도 했다.
3.3.2. 명나라의 지배와 청나라 치하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여진 및 올량합 지배를 위해 요동도사, 대녕도사, 누르칸도사를 만주 지역에 설치했으나, 실제로는 요동도사만이 군사 기능을 할 수 있었고 대녕도사나 누르칸도사는 책봉의 도구로만 작용하였다. 명은 수백 개로 분열된 여진족, 올량합을 개별적으로 책봉하면서 분할 통치를 꾀했지만, 오히려 조공권을 통합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여진 공동체가 성립되면서 만주에는 국가가 다시 태동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 만주의 마지막 독립 국가인 청나라의 시조)
마침내 건주좌위에서 출발한 누르하치의 가계가 만주 통합에 성공하고, 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요동, 요서, 산해관을 놓고 힐항하며 중국 진입을 시도했다. 청태종의 대에는 특히 당시 후금의 구성원들을 '만주'로 총칭하고 청나라를 건국하며 새로운 역사 구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숭환 등의 분전으로 청의 입관은 최대한 저지되었으나, 이자성에 의해 명이 멸망하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청은 중국에 진입한다. 이후 남명, 삼번의 난, 정성공 등을 제압하며 청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청나라는 유사시 왕조가 멸망했을 경우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잔존한 만주인을 기인(旗人), 즉 팔기군 휘하 제도로 편성하여 농장을 마련해 주었고, 17세기 후반 이후 만주 지역을 만주인 외의 다른 민족이 들어갈 수 없는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족 농민들은 봉금을 무시하고 농경을 위해 만주로 넘어갔고 농경에 익숙하지 않은 만주인들의 토지를 탈취하면서 청 후기에는 이미 만주인들을 압도했다. 여기에 정계비 설치가 무색하게 조선인도 여기에 합세한다(이는 후에 간도 떡밥의 바탕이 된다). 거기다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변수가 등장하고 청이 말 그대로 국가의 전면 붕괴를 맞게 되면서, 청의 만주 보전 계획은 모두 틀어지고 만다.
3.4. 근현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수습 과정에서 외만주 및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고, 제정 러시아가 의화단의 난에서는 20만의 대군을 진주시켜 전 만주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만철도가 있는 북만주와 하얼빈을 차지하고 송화강과 고비 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로 삼으려 하였다.[4]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처발리고 쫓겨났다. 근데 일본이 만주국 세운 게 함정.
1906년 신정으로 청은 만주 지역을 '동북 3성' 체제로 전환한다. 이는 만주가 더 이상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하지 못한 채 중국의 일부로 전환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준다. 만주의 인구는 1812년(가경제 연간) 170만, 1842년에(도광제 연간) 인구가 300만, 봉금 정책이 풀린 1897년 700만 등으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중국인이 봉금을 뚫고 들어가 정착한 탓이 크다.[5] 그러나 청 건국 이후 만주인들이 순식간에 한화되어 사라진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꽤나 잘 유지해서 청말에도 서양인들이 청에 접근할때 한자보다 쉬운 만주어를 배울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 군벌들의 할거와 일본의 만주사변 등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중국 인구가 급속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만주 지역은 마적단 출신의 군벌 장쭤린이 장악하여 사실상의 봉천군벌의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수차례나 관내로 진출하여 안국군 대원수로 취임하는 등 한때 중국 천하를 거의 지배할 뻔 했으나 1925년 쑨촨팡의 오셩연군의 손봉전쟁과 맞닥뜨렸으며 그해 11월 측근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켜서 하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를 어찌어찌 극복하나 이번에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의 북상으로 중국 통일에 실패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통해 화중, 화남을 장악하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언, 베이징으로 진격했고 장쭤린은 훗날을 도모하여 본거지인 만주로 피신했으나 관동군의 음모로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여 폭살당하고 만다. 그 뒤는 장쭤린의 여섯 번째 아들 장쉐량이 이었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통해 중화민국 합류와 국민당 가입을 결정했고 반장전쟁에서 장제스의 편을 들어 장제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함으로 국민당의 손꼽히는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허나 장쉐량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소유의 철로를 압류하려고 시도했다가 분노한 소련군의 명장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끄는 소련군에게 개박살이 나는데 이를 중동로 사건 혹은 봉소전쟁이라고 한다. 장쉐량은 이후로도 계속 무리한 관내 진출을 시도하는 등 내부적인 불만을 샀고 그 와중에 관동군의 참모 이시와라 간지 등은 만주 병탄을 획책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 사건을 구실로 장쉐량을 핍박했고 급기야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탈취했다. 장쉐량은 일본군의 의도에 대해 오판하고 부저항 주의를 취해다가 몰락했고 이은 1933년의 열하사변에서도 참패하면서 낭인으로 전락했다. 일본은 동북 3성과 열하성을 병합해 만주국을 세웠으나,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붕괴하고 일본의 지배도 종식되고 소련이 군정을 시작했다(소련 점령하 만주).
소련은 원래 1946년에 만주를 국민정부에 반환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화북에서 크게 세력을 확장한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영도하는 홍군은 소련군의 협조를 통해 만주로 진입, 만주의 대다수 지역을 장악하고 관동군의 무기로 무장했다. 장제스는 최대의 중공업 지대이자 엄청난 양의 식량을 생산하는 만주를 공산당의 손아귀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46년 국공내전을 재개했으나 열악한 병참선과 미국의 저지로 인해 진격이 정지되었다. 홍군은 한때 위기에 몰렸으나 국민혁명군이 정지한 틈을 타 반격을 시작, 만주의 주요 대도시들을 포위 공격하여 국민혁명군의 정예부대를 섬멸하였고 이어 중국 통일에 성공,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50년대 중반, 가오강(高崗)-라오수스(饒漱石) 반당동맹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사에서는 둥베이 지구의 공산당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실은 1940년대부터 은밀하게 반당 행위를 해 왔고, 이를 적발했으나 두 사람 모두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사실 가오강은 만주를 소련에게 바치려다가 걸린 것이었다. 가오강은 스탈린에게 만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고 만주를 소련의 새로운 주로 삼을 것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그 말을 듣고 "농담으로 알겠소. 장쭤린 동지."라고 차갑게 씹어버렸으며 이 일을 마오쩌둥에게 통보하기까지 했다. 결국 가오강은 처형된다.
1969년 3월에는 만주와 연해주 사이에 있는 전바오다오 섬(러시아명 다만스키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 소련-중국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다행히 중소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공산주의 혈맹이었던 중소 관계는 급격히 틀어져버리고 만다. 또한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분쟁은 2004년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현재 만주는 중국의 영역으로 산업, 경제의 주요 중심지중 하나이다. 옥수수로 유명한 비옥한 곡창지대와 풍부한 철광을 자랑하는 공업지대는 물론 각종 자원이 풍부하게 깔려있다. 다만 중국에서는 만주라고 부르기보단 둥베이(東北) 혹은 동북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으로 지칭한다. 참고로 중국에서 만주국은 '위만(僞滿)'으로 부른다. 거짓(가짜) 만주라는 의미.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정권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한편 이 지역에는 동북공정이 실시되어, 중국의 역사공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만주인 인구는 1000만 명 정도 되고, 그 외에 200만 정도의 조선족과 거란계인 다우르인, 몽골인 등이 있다. 흔히 한국에서 인식하는 바와 달리, 만주족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6]
현대의 만주는 이미 한족들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탓에 더 이상 만주인만의 독립적인 지역으로 만주가 남아 있지 못하였다. 이상하게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만주의 인식은 몇 없는 야만족들만이 뛰어다니는 젖과 꿀이 흐르는 허허벌판의 이미지(...)라 만주 수복을 꿈꾸는 허황된 망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근현대 이전의 일이고 이미 중국인들은 인구 팽창 정책과 산둥성의 기근으로 인한 한족들의 대대적인 이주로 1997년 시점에 이미 1억 697만 명이라는 인구를 차지했다.
한편 북한이 중국에 대한 소련의 견제로 일부를 병합할 수 있었다는 떡밥이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이 한반도 정세에 개입하게 되고 결국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실현되었더라도 이미 이주한 중국인들과 민족 갈등이 벌어졌을 여지가 충분하며, 어쩌면 중국의 북한 병합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 마냥 좋게 볼 일만은 아니다. 뭐, 지금이야 그냥 IF가 되었으니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지만.
각주
[1] 이외에 김한규 교수는 현재까지 '만주'로 불려오던 지역 구분을 '요동'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하고 '민족'이라는 단어를 '역사 공동체'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또한 김한규 교수는 예맥계와 한(韓)계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 중의 한 명이며, 더불어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중국과 '요동(만주)'도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의는 한국 사학계와 중국 사학계 모두에게 거부당하고 있는 형편. 안습.
[2] 애초에 청동기 시대들어서 요동지역에 고조선의 기원이 된 성읍국가가 설립되었다는 것이 통설이기는 하나 고조선 초중가에 대해 제대로 된 사료자체가 전해지지 않으며 그나마 전해져 내려오는 사료도 전설과 신화가 섞인 형태로 조금 내려오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역사는 남아있는 마을-도시 유적이나 비파형 동검, 고인돌 등으로 추측하고 있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실마리를 아주 못 찾은 건 아닌지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요서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 습족(霫): 만주 서북쪽에 있었던 유목민족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백습(白霫)이라고도 부른다.
[4] 제정 러시아가 북만주를 빼앗았다면 중국의 만주 국경은 명나라 초기 때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5] 더불어 한민족도 이때 남만주로 이주하여 간도에 정착하고 현 조선족의 기원이 된다.그리고 간도 떡밥도
[6] 단 만주족들은 거의 한화된 상태로 단 모어로서 만주어는 거의 구사되지 않고 있다.
[7] 참고로 예족은 압록강 중부에도 살았고, 강원도 해안가에도 살았는데 예국은 동예를 의미한다. 압록강의 예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8] 지역으로 본다면 북옥저 지역에만 한정. 다른 옥저는 함경도 해안에 있었다.
[9] 엄밀히 말하자면 퉁구스=만주로 보긴 어렵지만 대부분 다수가 많이 겹친다.시베리아 남부에서 살던 퉁구스 제족들이 아무르강이나 동해, 만주 및 한반도 동북부로 옮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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