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2)濊族,부여

부여는 우리 고대사의 엑스트라 아닌 주인공

자연정화 2018. 7. 24. 19:49

부여는 우리 고대사의 엑스트라 아닌 주인공

 

출처 : 한겨레신문 2015. 10. 01. 허미경 선임기자

 

부여를 세운 부여족은 사슴을 귀히 여기던 사슴족이라 한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사진은 지린시 어귀에 있는,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 사계절 제공

 

‘고조선 박사 1호’ 송호정 교수

최근 발굴·연구 성과 녹여 20여년 묵힌 ‘부여사’ 개관

“우리 고대 역사상 두번째 국가 부여사를 변방 아닌 중심에 놔야”

한나라보다 먼저, 진시황대에 등장 700여년 동안 고유 문화 일궈

 

처음 읽는 부여사 - 한국 고대국가의 원류 부여사 700년

송호정 지음/사계절·1만8000원

 

부여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저 고조선의 말미, 고구려의 초입에 동예·옥저와 함께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랄까, 곁다리 존재랄까.

 

송호정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쓴 <처음 읽는 부여사>는 부여를 주인공 삼은 국내에 보기 드문 책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이루며 등장했던 나라가 부여임을 환기시킨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말(494년)까지 자그마치 700여년을 존속했고, 옛중국 서진(西晋) 사학자 진수(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집필되던 3세기 중엽까지 “한번도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을 정도로 군사력과 통치력이 강했던 나라다. 진수는 부여를 시작으로 하여 고구려·옥저·동예·읍루·한(韓) 순으로 기록했는데, 부여를 “아주 부유한 나라”라 기록했다.

 

송 교수는 예맥족의 한 갈래인 부여족은 오늘날 헤이룽장성과 지린성 일대인 북만주 지역에 나라를 세워 ‘시퇀산 문화’라는 선진 문화를 일구었으며, 그리하여 부여는 지린시 동쪽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보듯 쑹넌평원(쑹화강과 넌강 사이)과 쑹랴오평원(쑹화강과 랴오허 사이)을 개척하며 국가 체제를 마련하고 ‘둥퇀산 문화’를 피워낸 나라였다고 파악한다.

 

부여 왕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둥퇀산. 사계절 제공

 

고조선 멸망 뒤 그 세력범위 아래 있던 여러 지역집단이 흩어져 나라를 세운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고구려가 새로 등장했고 한강 이남에선 고조선 백성들이 마한·진한·변한을 세웠다.” 부여는 그 이전, 고조선과 공존했던 나라다.

 

대개 학계에선 부여가, 한나라가 흉노 동쪽 땅을 평정한 기원전 119년에서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 사이에 출현했다고 본다. 송 교수는 <사기> 화식열전에 나오는 조선·부여 기록이 진시황(기원전 246~210) 시대의 사실을 쓴 내용이라는 점을 토대로 하여, 부여가 이미 진시황 때 고조선과 함께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부여의 성립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이다.

여기, 동명왕 건국 신화가 있다.

 

‘옛날 북방에 ‘탁리’(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 아들을 낳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라 생각해 그 어미에게 거둬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항상 말을 기르게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 했다. 이에 동명이 달아나 (…) 남쪽의 부여 지역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 주몽신화(추모왕 설화)와 똑같은 얼개다. 기원전 1세기 후한 학자 왕충의 <논형> 길험편과 위나라 어환의 <위략>에 나오는 부여 동명설화다. 송 교수는 동명설화가 부여족계의 모든 집단이 공유한 건국 설화로서 고구려 주몽신화에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얘기한다. 자신들을 천신족으로, 자신들의 시조를 천제(일월)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은 단군신화 이래 신라(석탈해·박혁거세)나 가야(수로왕) 설화도 같다.

 

부여 시조 동명설화에서 동명은 왕이 죽이려 하자 달아난다. 남쪽 ‘엄호수’에 이르니 물고기·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줬고,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송 교수는 부여 시조 동명이 남하해 건넌 엄호수를 오늘날 쑹화강으로 본다. 그 동명이 나라를 세운 땅(지린성 일대)엔 선주민인 예족(예인)이 살고 있었으며 동명은 맥족의 일원이라는 것. 선주민이 예족임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록과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권1), <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 고구려조)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곧, 맥족이 북방에서 쑹화강 유역으로 남하해 예(후이)족의 땅에 건국한 나라가 부여다. 예족과 맥족은 인류학적으로 동일한 종족이며, 원래 예 계통의 주민집단이 살고 있던 랴오허 동쪽 지역에 랴오시 혹은 중국 북방으로부터 맥 계통의 주민집단이 이주하고 융합을 통해 예맥이라는 종족 집단을 형성했다고 본다.

 

그러면 동명이 본디 살았던 나라 ‘고리’는 또 어디인가. <논형> 길험편은 부여 시조 동명을 고리 국(북이 탁리 국)의 왕자로 적고 있다. 또한 5세기 광개토왕릉의 비문에는 고구려의 기원이 된 나라가 ‘북부여’라고 적혀 있다. “북부여 천제의 아들 추모(주몽)가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적어도 고구려 왕실에선 자신들의 시조 주몽을 북부여의 왕자로 믿었다.

 

송 교수는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초기 부여에서 이른바 동부여 세력이 나오고 이 세력에서 고구려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이 나왔으며 이 집단이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인 고구려를 세웠다고 본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살던 주민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백제를 건국했다. 백제는 6세기 중반에 남하해 세운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라 하기도 했다.

 

그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적힌 고구려의 기원 ‘북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이라기보다는 부여의 북쪽에 있었다고 보는 부여사 중심의 해석이 설득력 있다고 얘기한다. 북부여는 ‘<위서> 두막루전’, ‘<신당서> 유귀전’에도 등장한다. 요컨대 송 교수는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북부여가 바로 고리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북부여 지역은 쑹넌 평원(쑹화강과 헤이룽강이 합류하는) 일대라고 추론한다.

 

송 교수는 ‘고조선 박사 1호’로 불린다. 20여년 전 부여사 얼개를 정리해 박사학위 논문으로 써볼 요량이었으나, 지도교수가 국내에서 더 관심이 큰 주제인 고조선사를 주제로 쓸 것을 권유하여 고조선으로 박사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그가 오랜 세월 묵히고 연구해온 바탕 위에 2002~2007년 동북공정 기획 아래 중국에서 쏟아진 연구와 고고학 발굴·연구 성과까지 녹여낸 책이다. 중국의 <삼국지> <사기> <논형> <후한서>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을 오가며, 부여의 주민 구성과 국가 형성, 문화의 양상(기반)까지 그 실체에 다가서고자 했다.

 

지은이는 이제는 부여사를 우리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변방·주변이 아닌 본류·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조선 동쪽 땅에 생겨난 동예와 옥저는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사라졌고 삼한은 백제·가야·신라의 등장으로 없어졌지만, 부여는 전성기인 3세기를 거쳐 5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부여 지배층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 발해를 건국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 고대국가 발전의 중요한 연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 가야와 부여를 더해 한국 고대사의 ‘5국시대’를 설정하자는 학계 일각의 제안을 ‘지지’한다.

 

중국 학계는 부여사를 중국 고대사의 주요 범주로 다루고 있다. 중국 학계와 한국 학계가 동의하는 건 부여, 고구려는 예맥이 세운 고대 국가란 점이다. 그런데 중국은 부여를 세운 예맥이 바로 중국 고대의 한족(漢族)이라고 본다고 한다. 2007년 동북공정 기획은 끝났어도, 고조선 이전의 랴오허 일대 문화를 중국 상고문명의 하나로 보는 ‘랴오허 문명론’이란 이름 아래 중국은 보이지 않게 동북공정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지은이는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