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기 (北夫餘紀) [한글번역]
북부여기 / 북부여기(상)
(휴애거사 범장 지음)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 하셨다.
계해 2년(B.C.238년) 이해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지금의 호구를 조사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B.C.232년)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 현자를 아끼고, 태교를 생각하는 법)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B.C.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요나라 부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제나라의 장군으로 동호 즉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다.
나중에 돌아가 조선을 침범하여 조선이 양평에 에 성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다.)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최근 중국의 연구로 북경 북쪽의 창평임이 밝혀짐.)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B.C.220)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계미 22년(B.C.219), 창해역사 여흥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한고조의 공신. 한이 진시왕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값는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역사를 구하였다.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동유중인 진시황 정을 박랑사에서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여기서 자객이 청해역사 여흥성이다.
여흥성은 그 뒤 여흥성의 거사 미수로 수배되어 몸을 숨겨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연결되어 진시황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박랑사는 하남성 박랑현의 동남에 있다.) 과 함께 진나라왕 정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임진 31년(B.C.209), 진승(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 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이다. 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후에 번조선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태자 모리수가 즉위 하였다.
2세 단군 모리수 재위 35년
정미 원년(B.C.194), 번조선의 왕은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매우 풍부 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로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중국 요녕성 해남의 평양성)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신미 25년(B.C.17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B.C.121),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 하였다.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34년
신유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한반도의 압록이 아니라 몽고지방 을강을 뜻함.)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중국의 제후국인 고구려후가 아니라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구려후임이 확실해졌다.)로 삼았다.
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망한 위만의 뒤를 이어 대항한자.)의 나라가 혼란스럽자 번조선인인 최最가 우거를 살해하였다. 뒤에 성기가 반항을 하였으나 그 또한 번조선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러하여 우거가 망하자 한이 4군(이것이 중국측에서 주장하는 한4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이 사서를 믿지 않는 다하더라도 한무제의 태도에서 이 전쟁의 결과를 추측 해볼수있다, 한무제는 전쟁에서 지자 전쟁에 참가했던 육군사령관 순체, 해군사령관 양복, 무제의 사신 위산과 공손수의 네사람을 모두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라는 최악의 사형으로 발기발기 찢어 죽였다고 한다. 만약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개선장군일 이 사람들을 왜 죽였겠는가, 이것의 대답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수있는 사실이다.)을 두고자 병력을 치막시키니,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군을 연파하였다. 이러자 그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군사를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마침내 단제께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 북부여기(하)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장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몽고 역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북만주나 동몽고의 땅으로 비정된다.)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후에 요의 상경 임황부가 되었다.)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바이칼호부근에서 몽고내부까지.)의 땅이었다.
갑오 22년(B.C.86)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2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 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 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시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 불렸다. 이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B.C.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힌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의 나이가 23세 였다. 이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 마리, 협보(주몽의 협력자로 뒷날 일본으로 건너가 다파라국을 세웠다.)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 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쫏아 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북부여기 / 가섭원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B.C.86) 원년 왕은 북부여 때문에 지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산동성부근)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B.C.84) 3년 국상 아란불(동부여제상, 많은 문헌에 등장)에게 명하여 널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 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말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케 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 39년(B.C.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2세 금와 재위 41년
갑술 원년(B.C.47)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 24년(B.C.24)유화 부인이 돌아 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 갑인 41년(B.C.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 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을묘 원년 (B.C.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계유 19년(A.D.13)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 28년(A.D.22)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 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길림성 부근)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시니,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무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떼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갑술(A.D.494)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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