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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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 / 북부여(北夫餘)

자연정화 2018. 7. 25. 12:44

부여[夫餘] / 북부여(北夫餘)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 / 집필자 노태돈|김선주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의 국가. ‘북부여’라고도 한다.

 

1. 형성 및 변천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 기록인 ≪논형 論衡≫과 ≪위략 魏略≫에서는,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쪽 탁리국(橐離國)에서부터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하며,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부여국의 중심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이동 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북류 송화강과 눈강(嫩江)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肇源)의 백금보(白今寶)문화나 대안(大安)의 한서(漢書)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성이 부족하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烏桓)·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挹婁)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長春)·농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扶餘府)인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黃龍府)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金代)에 융안부(隆安府)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황금의 명산지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完顔部)의 발흥지인 아성(阿城)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창도(昌圖) 북쪽의 사면성(四面城) 지역으로 보는 설, 북류 송화강 하류의 오늘날의 부여(扶餘)로 추정하는 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이들 지역에서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산성이 있고 한대(漢代)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부여국의 중심지로 비정하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나아가 길림시 지역이 부여국의 초기 중심지였고, 농안 부근은 후기 중심지였다고 여기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2. 정치체제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選任)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짙게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준다.

 

그 뒤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依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다. 특히, 마여가 죽은 뒤 아들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자상속의 관행이 확고히 정립되지 못했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깊히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 요소는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견사(犬使)·견사자(犬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 가(加)는 수장(首長)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들이 각기의 읍락들을 통솔하였다. 대가(大加)는 수천호를, 소가(小加)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가들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참전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로서 군림했으나, 초월적인 권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의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의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제압하는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20년 위구태(尉仇台)는 부여왕자로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漢)나라를 방문했고, 한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또한 위구태는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公孫度)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244∼245)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부여를 방문했고, 부여는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였다. 양측 간에는 그 뒤에도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한편, 부여는 동으로 읍루족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220년대 초 읍루가 떨어져나가자 몇 번 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끝내 평정하지 못하였다.

 

3. 생활형태 및 사회체제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인들은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장례는 5월장이었다.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婚納金)으로 소와 말을 보내었다.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부인의 질투를 미워해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가져다가 썩게 내버려두었다가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는 혼인 때의 혼납금을 되돌려주는 형식이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였다. 이처럼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이 선호혼(選好婚)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도 취수혼이 성행하였는데 부여의 상황과 비슷한 면을 지녔다.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때에 축제를 거행함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했다. 축제기간 중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기면서 서로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 때 죄수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단행했고, 일부 가벼운 죄를 범한 자들은 석방하였다.

 

수도에 전국의 가(加)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지난 한해를 결산하며 주요 문제를 토의하여,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직도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지방 각지에서 읍락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加)들의 자치력이 강하던 상황에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국의 국가구조에서 기본 단위를 이루었던 것이 읍락이다. 각 읍락에는 우두머리(渠帥)인 호민이 있으며 그 밑에 일반민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읍락민이 하호(下戶)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하호는 당시 중국에서 빈한한 소작농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기록에 의거해 부여의 읍락민을 노예나 농노로 규정하는 설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 부여의 읍락에는 철제 농기구가 부족하고 특히 보습과 같은 대형의 농기구는 주로 호민이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농업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수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읍락민은 농경 등의 일상생활을 호민의 주재 하에서 영위하고 통제를 받았다. 부여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위나라 사람이 보았을 때, 가난하고 열세한 읍락민의 외형상의 모습이 호민의 소작농이나 노복처럼 여겨져 그런 기술을 했던 것이다. 부여의 하호는 노예나 농노가 아니라 읍락의 일반민이었고, 호민은 읍락의 거수(渠帥)였다. 당시의 읍락에는 촌락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호민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요소를 활용함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나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읍락민들도 전래의 관습과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에 의지해 그들의 삶을 유지해나갔던 상황으로 여겨진다. 또한 부여의 읍락민은 모두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읍락민이 호민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들 내에서도 자영농민층과 빈농층의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전쟁 때에는 스스로 무장해 참전했던 이들과 그렇지 못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부대로 참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이러한 읍락을 수개 내지 수십개를 지배했던 것이 가(加)들이다. 가들과 그 일족은 지배계급으로서, 왕의 일정한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각기 지배 하에 있는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통할했으며, 이들 읍락으로부터 징수한 공납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외국에 나갈 때 수를 놓은 비단옷에 모피·갓을 쓰고 금은으로 장식을 하며 호사로움을 과시하였다. 전체적으로 가 계층의 부력은 상당했고,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었다.

 

일반민 아래 노예가 존재하였다. 가들과 호민들은 상당수의 노예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에 때로는 백수십인을 죽여 순장(殉葬)을 하기도 하였다. 순장된 노예는 전쟁포로 노예가 많았을 것이나 가내노예도 상당했을 것이다. 노예에는 전쟁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노예와 부채노예도 있었다.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절도를 할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변상이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빈한한 읍락민 중 일부는 점차 가나 호민의 예속민으로 전락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부여의 사회는 제가층(諸加層), 호민층,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읍락민, 빈한한 읍락민, 노비 등 대략 다섯층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부여사회는 공동체적 유제가 잔존해 있는 가운데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서도 연맹체적 성격이 강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음과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4. 소멸 과정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어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특히, 3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해졌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고, 부여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의라(衣羅)가 왕위를 계승한 뒤 진(晉)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그대로 머물어 토착하였다. 길림 방면의 부여는 그 뒤 계속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많은 수의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당시 부여는 진나라가 쇠망함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더 이상 길림 일대의 원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346년 서로부터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할하였다. 부여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한편 북옥저 방면에 정착했던 부여인들은 본국과 분리되어 점차 자립하게 되었다. 이를 고구려인들이 동부여라고 했고, 길림 및 장춘·농안 방면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동부여는 410년 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물길(勿吉)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松花江)을 거슬러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왕실은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여지역의 통제를 위해 존속시켰던 부여왕실의 명맥은 그 지역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논형(論衡)』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위서(魏書)』

「한국고대국가발달사」(김철준, 『한국문화사대계』 1,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4)

「부여고」(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노태돈, 『국사관논총』 4, 1989)

「扶餘考」(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3, 1936)

「魏志東夷傳のみえる下戶問題」(武田幸男,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 朝鮮史硏究會, 1967)

「夫餘國考」(日野開三?, 『史淵』 34, 九州大, 1976)

「夫餘的疆域和王城」(李健才, 『社會科學戰線』82年 4期)

「夫餘王城新考」(武國勛, 『黑龍江文物叢刊』1984年 4期)

 

 

부여 / 위키백과

 

부여(기원전 2세기 ~ 494년)는 삼국시대 한국의 고대국가로 여겨지는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 아청, 위수, 눙안, 창춘, 솽양, 지린, 옌지, 훈춘, 치치하얼, 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로부터 기원한 국가로 추정된다.

 

1. 개요

 

부여에 대한 국호는 아래의 4가지로 볼 수 있다. 夫餘, 扶餘, 扶余, 夫余

 

기원전 2세기경부터 500여 년간 예맥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라고도 한다. 현재의 북만주 농안(農安)·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여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다. 농안 지역은 소위 동이(東夷)들의 주지(主地) 속에서는 가장 평야가 넓은 곳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 궁궐·성책·창고·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노예로 구성된 피지배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특히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인접 고구려와 자주 투쟁이 있었으나 원래 그들은 경제적으로 호조건을 구비하였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했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추수 후 음력 12월에는 영고(迎鼓 : 맞이굿)라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있었으며, 형법(刑法)은 아주 준엄하여 살인·간음·부녀의 투기 등에 대하여 극형에 처했다. 특히 간음과 투기자는 그 시체를 산에 갖다 버릴 정도로 혐오했다. 일부다처·축첩·순장(殉葬) 등의 풍습이 있었으며, 백의(白衣)를 숭상하였다. 이는 역시 한민족의 현재의 풍습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또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항시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명산물(名山物)로는 말·적옥(赤玉)·미주(美珠) 등과 모피가 있었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의 발굽으로 길(吉)·흉(凶)을 점치는 우제점법(牛蹄占法)이 행해졌다.

 

위(魏)의 고구려 정벌에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은 부여를 재흥케 하였다. 그러나 진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졌다. 285년(고구려 서천왕 16) 선비 모용외(鮮卑 慕容廆)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이때 북옥저 지역에 일부가 남아 동부여를 형성 했다.),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며, 계속 고구려의 보호를 받아오다가 494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2. 역사

 

(1) 북부여

 

오늘날 부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서는 《사기》에서이다. 《사기》에서 열전 화식편 오씨과(烏氏倮)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倮)와 거래하던 상인 가운데 부여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식화열전(食貨列傳)에서 “연이 북으로 오환과 부여에 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망하기 이전,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영역을 “(장성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 북으로 약수(弱水)-약수를 헤이룽강으로 보기도 한다-에 접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 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지방,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하얼빈)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역사가 해부루 왕부터 등장하는데, 솽양에서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기원전 59년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해부루라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또한 하백의 딸 유화에게서 주몽을 낳았다고 전한다. [1] 하지만 해모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인물로 정작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 중에 주몽은 하늘의 아들(천제지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만 할뿐, 해모수는 등장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대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으로 볼때 해모수는 등장 하지 않으므로 실존인물 인지 조차 알수 없다.

 

《논형》에는 동명이 탁리국을 탈출하여 부여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 되어 있다. 북부여의 유민들이 외세에 유린되는 부여를 탈출해 두막루를 세웠다고 신당서 유귀국전에 전해진다.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2) 동부여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받아 들여 지지 않는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으로 인해 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원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 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북사》와 《수서》의 오류이다.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의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 하다가 41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에 멸망 당한다.

 

(3) 졸본부여

 

졸본부여(卒本夫餘)는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도읍지 명칭이나, 《삼국유사》에서는 도읍지를 졸본이라 칭하고 졸본부여는 그 자리에 세워진 나라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졸본 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이설을 적어두고 있다. 〈백제본기〉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아예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비류설을 언급하면서, 졸본 지방의 유력자 연타취발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 집안의 세력과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그 지방의 다른 부족들을 제압하면서 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설화중 첫번째 설화만 정설로 인정 받는다.

 

이로 보아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이거나 고구려의 별칭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졸본부여는 고주몽이 건국한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이전에 많은 문헌에서 등장하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졸본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가 부여계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4) 남부여

남부여(南夫餘)는 백제 성왕이 새롭게 지정한 국호이다. 이 국호나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그를 오래도록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4. 정치

 

부여에는 임금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군주를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군주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주가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채,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 가

 

부여 사회의 중심적 지배 계급을 형성한 부족장의 칭호인 '가'(加)는 씨족장·부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구려에서도 사용되었다. 부족장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는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는데, 이들은 각기 사출도(四出道)의 하나씩을 주관하였다. 이들 대가(大加)는 왕과 마찬가지로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직속 가신(家臣)을 갖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왕과 동질적인 성격을 가진 대가는 군주(君主)인 왕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여러 가(家)는 각자가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였다. 비록 국내에서는 흰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나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에는 비단옷과 중국인이 부러워하는 값비싼 털옷을 입었으며, 모자는 금·은으로 꾸미는 사치스런 옷차림을 하였다. 또한 조두(俎頭)라는 고급 밥그릇을 사용하였고, 죽으면 많은 사람을 같이 순장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권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富)의 소유자로서 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다.

 

(2) 행정 구획

부여의 행정 구획은 사출도(四出道)라 불렀다. 이는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서 사방으로 통하는 네 갈래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앙에는 왕이 있고 4가(加)가 사출도에 있어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를 지배하였다.

 

5. 사회와 문화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고조선의 8조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임금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마다 열렸다. 이 때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우제점법)

 

(1) 하호

하호(下戶)는 부여에서 대부분의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일반 사람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양인(良人)이었지만 노복(奴僕)과 같이 사역을 받는 무력한 예민(隸民)이었다. 또 전쟁이 있을 때는 무기를 들고 싸우지 못하고 군량(軍糧)을 운반하였다. 아마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겠지만 씨족적인 공동체의 유제(遺制) 속에서 제가들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2) 법률

부여에서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던 법률은 초기의 정치적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엄격한 것이었다. 현재 알 수 있는 부여의 법조목은 다음과 같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며 그 가족은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절도를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한다.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부인의 투기(妬忌)를 특히 미워하여 이를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수도 남쪽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단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

 

이상의 조목은 고조선의 법조목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개인의 생명과 사유 재산 및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의 옹호를 위한 것이라는 근본정신은 동일하다. 부여는 특히 가족 제도를 중요시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 투기죄(妬忌罪)에 대한 가혹한 규정은 아마도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풍습이 상류층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우제점법

부여에서 행해진 점복(占卜)의 습관.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도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牛)를 죽여 굽(蹄)이 벌어지면 흉(凶), 합치면 길(吉)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점복은 은(殷)의 갑골점법(甲骨占法)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

 

6. 유적과 기록

 

(1) 유적

유적군은 확인되지 않으나, 길림 주변에 독특한 철기 시대의 유적(포자연유형)들이 발굴되어 이로부터 세력의 범위를 추정하고 있다.

 

(2) 중국 사서에 나타난 부여 기록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이천 리로서 본래 예 땅이다.[2]

 

(3) 부여의 역대 국왕

 

왕호

이름

재위기간

동명왕(東明王)

동명(東明)

? ~ ?

해부루왕(解夫婁王)

해부루(解夫婁)

? ~ 기원전 60년 경

금와왕(金蛙王)

금와(金蛙)

기원전 60년 경 ~ 기원전 20년 경

대소왕(帶素王)

대소(帶素)

기원전 20년 경 ~ 22년

갈사왕(曷思王)

갈사(曷思)

22년 ~ ?

도두왕(都頭王)

도두(都頭)

68년 ~ ?

부태왕(夫台王)

부태(夫台)

?, 2세기

위구태왕(尉仇台王)

위구태(尉仇台)

?, 2세기

간위거왕(簡位居王)

간위거(簡位居)

?, 2세기 ~ 3세기

마여왕(麻余王)

마여(麻余)

?, 3세기

의려왕(依慮王)

의려(依慮)

? ~ 285년

의라왕(依羅王)

의라(依羅)

286년 ~ ?

현왕(玄王)

현(玄)

? ~ 346년

삼국사기(三國史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에 의거

 

 

* 옮긴이 주 : 동명왕을 제외하면 모두 동부여의 왕임.

 

주석과 참고자료

[1] 新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박영규 저, 웅진출판, 1997. p 17.

[2] 중국어 위키문헌 후한서 권85 동이열전(後漢書 卷85 東夷列傳)

夫余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