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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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무령대왕 왕자 흠명천황

자연정화 2018. 7. 25. 13:16

22장. 무령대왕 왕자 흠명천황

武寧大王 王子 欽明天皇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4856

 

[記] 天國押波流岐廣庭命 / [紀] 天國排開廣庭天皇

 

백제에서 무령대왕의 아들인 사귀왕이 535년, 큐슈의 축자 광국에서 구주백제왕이 되고 539년에 혼슈의 대화조정 천황인 흠명천황이 되었다.

흠명천황은 신라에 복속당한 가야를 다시 백제에 속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죽은 계체천황의 구신들이 가야에서 훼방하였다. 백제 성명대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신라군과 왜군으로 함께 고구려를 공략하여 평양성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에게 배신을 당하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무열천황 때에 백제 무령대왕이 보낸 사아왕斯我君이 왔는데 그의 아들이 법사왕法師君이며 왜왕倭君의 선조라고 하였다.

 

법사군은 법사왕, 왜군은 왜왕의 낮춤말이다.

 

여기서 왜倭는 구마모토熊本에서 강을 따라올라가서 큐슈를 횡단하여 산맥을 넘어서가면 교토군京都郡이 된다. 교토군 남쪽은 야마구니가와山國川를 따라내려간 나가쯔시中津市가 된다.

 

600년에, 일본이 수나라와 외교할 때에는, 이 나가쯔시中津市 구주백제왕의 수도 야마타이野馬臺에서 수나라 사자와 접견이 이루어졌다.

 

즉, 의자대왕이 구주백제에 있을 때의 수도였고 왜국이라고도 한 것이다. 뒤에 한자로는 산국山國으로 바뀐 것인데, 읽기는 야마山로서 야마대국이나 같다. 야마천의 계곡 이름도 야마계耶馬谿다.

 

나가쯔시에서는 바로 위에 금천今川(곰천)을 따라서 행교시行橋市가 있고, 그중 어소정御所町이 전방후원분이 세워졌던 주요한 고대 고분 도시다.

 

나가쯔시 남쪽은 중진평야다.

그 아래에 우좌시宇佐市는 구주백제의 왕으로서 민달천황이 있던 곳이다.

 

큐슈 동북부인 오오이타현大分縣 우좌시宇佐市 팔번신궁八幡神宮의 기록에 흠명천황 때에 처음으로 광번廣幡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흠명천황이 큐슈 축자현의 광국에서 이곳 오오이타현에도 백제국 광번기를 꽂은 것이다. 그리하여 흠명천황의 후예가 이곳 왜군의 선조가 된 것이다.

 

이웃한 교토군京都郡 행교시行橋市 부근의 몇 곳에 전방후원고분과 성터, 사원의 유적들이 많고, 이곳에서 일본 천황으로 옮겨간 천황들의 이름자에 그 지명이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현재 왜여왕 비미호 시대의 유적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의 천황과, 백제 영토인 구주백제 광국왕廣國王의 역학관계를 추정해보면, 구주백제가 일본의 거의 모든 병력과 병마를 가지고 있었고,

 

이 구주백제의 왕이자 군사령관은 백제의 태자거나 왕자였다.

구주백제 광국왕은 장차 백제 대왕이 되던지 일본 천황이 된다.

구주백제의 왕과 일본천황의 임명권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6세기와 7세기 일본 대화조정은 천황직이 종신직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세습권이 없고, 독자 외교권도 없고, 오로지 백제에 조세만 거두어 받치는 백제의 위성국가였다.

 

단적인 예가 서기 600년 수나라와 일본의 외교문서인데, 이 당시 일본에는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수나라와 직접 외교한 일본 왜왕 이름은 백제 의자왕자로서 훗날의 서명천황이었으니, 그는 바로 당시 구주백제왕이었으면서 대외적으로 왜왕이라고 칭한 것이다.

 

구주백제 성립 이후로 일본 대화조정은 구주백제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일본 천황의 독립운동은 6세기초부터 7세기까지 근 200년간 계속된다.

또한 백제가 660년에 본토에서 망한 뒤에도, 구주백제왕으로 선광善廣이라는 의자대왕의 아들이 차례로 이어받았다.

 

안한천황의 아들로 조작된 무령대왕의 아들 백제 법사왕의 법사法師가 바로 계체천황의 아들로 조작된 흠명천황欽明天皇(510~571)의 이름인 하루끼波流岐다. 본래 춘기春岐에서 유래하여 춘일시春日市가 되었기도 하지만,

 

天國押-波流岐-廣庭命

 

이는 [고사기]에서 그렇고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에서는 하류기波留岐, [원흥사연기元興寺緣記]에서는 하라끼波羅岐였으니 대동소이하다. 현재 한자로는 개開 또는 춘기春岐로 해석해왔으나. 가운데 “류”나 “라”는 어조사였고 앞과 뒤만 의미있다. 일본 최초 사찰이라는 [원흥사연기]에는 춘기광정天國案-春岐-廣庭-天皇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법을 뜻하는 법法이 하波에 대응하고, 사師가 기岐에 대응한다.

즉 하류기春岐는 법사法師에 해당하고, 광정廣庭은 광법廣法일 수도 있다. 법사와 광법은 불교용어이다.

 

흠명천황을 가외천황加畏天皇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가사袈裟를 입은 천황, 즉 가의加衣 천황을 조잡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동시대에 양나라 무제武帝(재위 502~549)가 가사袈裟를 입고 나라를 다스린 기록이 있는데 이런 유행을 따른 것이다.

 

일본에 불법이 최초로 전래된 것은, 큰 부처, 혹은 큰 보시意富富杵(=大布施)라고 이름했던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 즉 전지대왕腆支大王이 도래한 때이다.

 

큰 보시富杵를 한 것인지, 큰 부처意富-富杵라고 불린 것인지 불명하다.

이때 만들어진 치은사置恩寺가 일본 최초 사찰이다. 이때 만들어진 사찰인 것은 전지대왕의 후예의 성씨가 포시씨布施氏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씨족사氏族寺로서 전승되었지만 포시산布施山 치은사置恩寺가 일본 최초 사찰이다. 포시씨布施氏가 부지富杵에서 유래한 것이다. 포시는 재물을 받친다는 의미의 불교 용어다. 전지대왕의 아들 이름에 사용된 불교용어가 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흠명천황 때에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와 불상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큐슈와 무관하다. 큐슈에는 백제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불교가 들어갔고 일본 본토에는 흠명천황 때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흠명천황은 이미 백제에서 불교를 접하고 큐슈로 건너갔고 다시 대화로 들어간 것이다.

 

이름에 오시(押 혹은 忍)가 들어간 천황은 도래인이다.

 

오시호미忍穗耳, 효안천황倭帶日子國押人命과 그의 형인 오시타라시히코押帶日子命, 그의 부인 오시히메押媛, 그의 아들 히코후쯔오시노마코토比古布都押之信命, 이치베노오시와市邊忍齒王, 윤공황후이자 아신대왕의 딸인 오시카노오호나가쓰히메忍坂大中津比賣命가 있었다.

 

흠명천황은 그 이름에서 천국天國에서 배排하였으니, 백제에서 왜왕으로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국압天國押, 혹은 천국배天國排이다.

 

흠명천황이 백제에서 일본에 올 때 본이름은 사귀왕斯貴王이었다. 그의 대화조정 궁이름이 사귀시마斯貴嶋(법왕제설), 사귀시마斯歸嶋(원흥사연기), 시키師木宮(고사기), 磯城嶋(일본서기)로 각각 기록되었은데 이는 그가 백제 사귀왕斯貴王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령대왕 사마왕斯麻王, 안한천황 사아왕 斯我王, 선화천황 사비왕斯比王 흠명천황 사귀왕斯貴王, 이렇게 이어진 것이다.

 

흠명천황은 선화천황의 서거 후에 일본 천황이 되어서 사귀시마斯貴島에 고마궁金刺宮이라는 대궁을 지었다. 金刺宮은 가나사시로 읽지 말고 백제 도성 이름인 고마성으로 읽어야 한다.

 

사아왕은 안한천황인데 그는 자식을 못낳았다.

따라서 흠명천황은 사아왕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대왕의 아들이고, 성명대왕의 동생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곤지대왕인 청령천황도 자식을 못낳았는데 말다왕, 즉 모도대왕이나 무령대왕을 그의 자식이라고 기록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흠명천황을 굳이 사아왕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대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흠명천황은 선화천황의 딸 이시히메石姬를 황후로 세우고 그 동생을 또한 후비로 세웠다.

 

540년 흠명천황 2년, 아라安羅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과 졸마卒麻의 한지旱岐과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 사이기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 길비신日本府吉備臣과 백제에 함께 가서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의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대왕이 임나의 한지旱岐들에게 말했다.

 

"옛적에 우리 선조 초고대왕肖古大王, 귀수대왕貴首大王의 치세에 아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 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중략)..록기탄㖨己呑(거제도巨濟島)은 가라加羅와 신라의 경계선에 있어 해마다의 침공으로 패배하였다. 임나任那(구주백제)도 구원해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남가라南加羅(금관가야金官伽倻)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길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창원昌原)은 상하 둘로 갈라져 있었다. 군주는 스스로 복종하려는 생각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제 힘을 합하여 임나를 반드시 일으키자."고 하였다.

 

흠명천황이 성명천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은 것이니 성명천황의 동생인 것이 확연하다.

그런데 함안咸安의 안라安羅가 이미 신라와 통하였다. 안라는 528년 지증왕 때에 신라가 소경을 두었었다.

 

성명대왕은 세 사람의 사자를 보내 백제로 귀화하라고 말을 하였다.

 

이때 안라에는 일본부집사日本府執事와 임나부집사任那府執事가 있었는데 이 둘은 백제에 반격한 계체천황의 유신遺神으로 고려되며 신라와 통하였고 백제나 일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 위가가군爲哥可君(=현종천황顯宗天皇)이 그들 때문에 쫓겨났다고도 언급하였다.

 

또한 근강모야신이 임나(=대마도)에서 죽었는데, 이때 임나는 현종천황의 잔류 세력인 좌로마도佐魯麻都 등이 좌지우지하였고, 그는 신라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난데없는 한반도의 임나일본부는 바로 백제에 반기를 들다가 일본 천황 자리에서 쫓겨난 현종천황과 계체천황의 유신들이 가야에 건너와서 웅크리고 발악한 기록이다.

 

542년, 흠명천황은 전라도의 백제군 수령들에게 임나를 빨리 도모하도록 청하였는데, 백제 성명대왕은 일본의 군사 삼천으로 낙동강 서쪽을 치고 6성을 쌓으라고 권하였다.

이해 성명대왕은 고구려와 힘겹게 전투 중이었다.

 

523년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이 죽자마자 고구려가 침략해왔다.

 

성명대왕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다시 패수에 쳐내려왔으나 백제 장군 지충志忠이 나가서 막아 싸웠다. 패수는 동해안의 패수로서 금야강이다.

 

529년에 다시 고구려의 안장대왕安臧大王이 백제의 혈성穴城(=단동시丹東市 수암현성岫巖縣城)을 함락시키고 내려왔다.

 

안장왕은 백제 장군 연모燕謨가 보기병 3만으로 지키던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을 마저 함락시켰다.

따라서 성명대왕은 즉위 7년만에 무령대왕이 회복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북도 강토를 다시 잃어버렸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황해도 오곡군五谷郡을 돌파당하여 다시 대동강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나서, 성명대왕은 충청남도 부여의 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칭하였는데 538년의 일이었다.

 

예성강 북쪽의 부여면夫餘面은 중기 한성 백제가 스스로 부여라고 칭하였음을 의미한다.

고구려 사비성도 본래 만주의 백제가 요양시에 건설한 사비성이었다.

 

성명대왕과 흠명천황이 서로 미루다가 가야 정벌의 기회를 놓치고, 백제와 신라는 불안한 동맹이 되었다.

 

549년, 백제는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죽령 이북의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백제는 한성을 되찾고 대동강의 평양을 뺏어서 백제고지를 되찾았다.

같은 해에 백제 성명대왕이 일시적으로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친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당시 성명대왕은 6군郡을 수복하였는데 평안남도를 포함한다. 여기서 평양은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서 고구려가 짓다가 무령대왕武寧大王에게 함락당했던 오늘날의 평양성이고 한성은 황해도의 평산 한성이다.

그러나 백제는 다시 고구려에 쫓겨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군은 다시 백제의 평산 한성을 차지하였다. 550년,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평산한성 平山 漢城, 예성강 서쪽) 등을 쳐서 빼앗았지만,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金峴城(금천군衿川郡, 예성강 동쪽)을 함락시켜 반격하였다.

 

도살성은 장수왕이 백제 왕자, 왕후 등을 도살하였던 평산 한성인 것이다.

이때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노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기습 공격으로 두 성을 모두 빼앗아 신라가 차지하였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라가 백제의 한성을 쳐서 뺏으니 신라의 우두방이 되었는데 우잠군이라 하였고 이는 예성강의 우봉면牛峰面이다. 신라 진흥왕의 돌연한 배반은 신라의 급속한 성장과 백제의 몰락을 촉발하였다.

 

이해 백제는 금동불상을 일본에 보내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일본은 배 두 척에 무기를 실어서 보내고 병사들도 보냈다.

 

백제 성명대왕은 둘째왕자 민달천황을 552년에 일본에 보내어서 구주백제의 왕으로 삼았다. 흠명천황이 황태자를 세운 기록 시점이다.

 

553년 백제는 가야와 신라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554년에 성명대왕聖明大王의 태자 창왕昌王(=위덕대왕威德大王)이 신라와 전투 중에 고립무원의 위기에 빠져서 성명대왕이 직접 구원을 나갔다가 성명대왕이 신라군에게 포위되어 화를 입어서 이만육천의 병사와 함께 화를 입어 참수당하였다.

 

신라 기록에는 관산성管山城의 싸움에서 신라가 위험에 처하였는데 신라 북쪽의 신주군新州軍이 구원하였고 삼년산군三年山郡의 장수가 백제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관산성管山城은 충청북도 옥천沃川의 고지명이고 삼년산군三年山郡은 보은報恩의 고지명이다. 삼년산성은 보은읍의 동쪽에 있고 관산성은 옥천 서북쪽 환산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562년에 가야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니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서 멸망시켰다. 이때 일본에서 건너갔던 현종천황과 계체천황 구신들의 일본부도 함께 정리되었다.

 

흠명천황은 군대를 보내어 가야를 되찾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임나십국은 ①가라국加羅國(김해金海 금관가야金官伽倻), ②아라국安羅國(함안咸安 아나가야阿那伽倻), ③사이기국斯二岐國(일기도一岐島), ④다라국多羅國(합천陜川 대가야大伽倻), ⑤졸마국卒麻國(진해鎭海 탁순국卓淳國), ⑥고차국高嵯國(고성固城), ⑦자타국子他國(창녕昌寧 비자호국比自㶱國), ⑧산반하국散半下國(진주晋州 반성班城), ⑨걸손국乞飡國(큐슈九州 웅본熊本), ⑩임라국稔禮國(임나=대마도) 등 합해서 10국이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대마도와 일기도, 큐슈에 있던 3국을 제외한 7국을 잃은 것이다.

흠명천황은 회외합판릉檜隈坂合陵에 묻혔는데 138m에 이르는 전방후원고분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