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성명대왕 왕자 민달천황
聖明大王 王子 敏達天皇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4833
552년, 백제는 큐슈 영토의 지배를 공고히 하여,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을 구주백제왕으로 내보낸다. 571년, 일본을 다스리던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서거하자, 민달천황이 큐슈로부터 건너가서 왜국 천황이 되었다.
민달천황은 이복동생인 추고천황과 결혼하여 일본의 황후로 세웠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에 백제라는 지명을 붙였다. 큐슈에 이어서 대화까지도 백제와 병합하려는 것이었다.
1. 민달천황 敏達天皇
[記] 沼名倉太玉敷命 / [紀] 渟中倉太珠敷天皇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이 백제왕 선광善廣(=光)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백제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이는 민달천황이 백제왕가 혈통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그러나 실제 밝혀지는 족보에는 의자대왕의 작은 할아버지가 민달천황이다.
민달천황은 누나카라후토타마시키渟中倉太珠敷天皇라고도 하는데 백제 성명대왕의 차자다. 성명대왕의 이름이 명농明穠이다.
당시 큐슈에는 백제 대왕과 왕자들을 위한 둔창屯倉이 있었으니 농왕穠王의 둔창이 농창穠倉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일본말로 누나쿠라渟中倉인 것이다.
백제 의자대왕 혈통도
즉, 민달왕자는 구주백제왕 시절에 농창穠倉에 있었으니, 성명대왕의 왕자인 것을 시호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시호에 역어전譯語田이라는 지명을 앞세운 것도 있다. 뒷날 대화에서 오사카의 궁을 역어전궁譯語田宮, 혹은 오사다궁他田宮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대화조정에서 세운 궁이름이지만, 큐슈에서의 궁이름과 같은 것이다. 큐슈에서 역어전譯語田 누나카라渟中倉는 오오이타현大分縣 역관천변譯館川邊의 우사궁宇佐宮이다.
민달천황은 [흠명천황기]에서 552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민달천황기]에서는 568년에 황태자가 되어 서로 기록이 다르다. 앞에 552년 기록은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으로서 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뒤에 568년 기록은 일본 본토 천황 황태자로 보면 맞다.
그렇다면 568년에 흠명천황은 실제 천황에서 물러난 것이 되고, 그때부터 민달천황이 오사카를 통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의 백제百濟 대정大井에 궁宮을 지었다. 이름자에 들어간 태주太珠, 태옥太玉을 보면 환丸의 의미이므로 한성漢城이라 불렀을 것으로 고려된다. 오사카 땅에 백제 한성이라는 지명을 최초로 붙인 것이다.
대정大井의 의미는 마을을 만들 때 먼저 하는 기초 공사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이고 정읍井邑을 우물 정井자로 만들기도 했다.
위덕대왕의 사후에 그의 동생인 민달천황이 백제 대왕이 되어서 백제 도읍을 오사카로 옮겨오려는 구상인지, 백제와 일본의 병합을 꿈꾼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의 능은 오사카에 있고, 전장 113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554년, 백제에는 위덕대왕이 즉위하고 568년 일본에 온 민달천황은 구주백제의 왕으로 있다가, 흠명천황이 571년에 죽으니 민달천황(535~585)으로 즉위한다. 민달천황은 불교를 믿지 않았고, 즉위후 15년에 역병이 돌자 불교를 탓하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역병이 더욱 창궐하여 그도 결국 역병으로 죽었다.
민달천황 대에도 큐슈에는 백제에서 새로 온 성명대왕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명천황, 다치바나도요히橘豊日다. 그도 흠명천황의 아들로 조작되었지만, 성명대왕의 아들이며 훗날의 백제 혜대왕惠大王이다.
그는 큐슈 다라국이 있던 아시카라朝倉에 와서 다치바나비리이하궁橘廣庭宮에 있었다. 구려의 광정궁이다.
성명대왕의 아들 용명천황이 구주백제왕이 되고 누이인 추고천황推古天皇(536~628)도 함께 일본에 건너와서 민달천황의 황후가 된다.
용명천황과 추고천황의 모후는 견람원堅藍媛(512~558)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기다시岐多斯라고 읽었다. 중요한 사실은 추고천황 때에 견람원의 능을 새로 일본에 만들면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호칭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 온 백제왕 후비에 대한 호칭이다. 즉 용명천황과 추고천황의 모후는 백제 왕비였다는 것이다.
(주) 민달천황은 그 이름에서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출신으로 보인다. 광주의 옛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인데 무등산無等山이 광주에 있다. 민달敏達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무등산, 무진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에서 무진주를 일명 노지奴只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민달은 일본에서 비다쓰라고 읽는다. 우리말 뜻으로 빛땅이 되는데, 무진주는 뒤에 빛산인 광산현光山縣으로 발전하여 빛고을 광주가 되었다.
법대왕이 백제에서 한왕漢王(=안한천황으로 고려된다.)의 딸인 대고왕大股王과 결혼하여, 지노왕知奴王(~618)을 낳았다. 무진주의 옛이름 노지奴只는 이 지노知奴를 뒤집은 것이다.
582년, 민달천황은 즉위한지 12년에 자신의 일본 왕권을 강화하려고, 구주백제에 있던 신하 일라日羅를 불러서 독립할 방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시 구주백제왕이었던 용명천황의 신하가 미리 알고서 일라를 죽여버렸다.
그 후에도 민달천황은 포기하지 않고 신라와 임나가야에 사자를 보냈다.
또한 백제에서 전해주는 불교와 달리, 전통적인 신사 신앙으로 일본을 결집하려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여승들의 승복을 강제로 벗기고 가두어두었다. 물론 일본 열도에 천연두 전염병이 돌아서 백성들의 인심이 매우 흉흉한 상황이었다.
(주) [일본서기]에서는 민달천황이 역병에 걸린지 5개월만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역병이란 일단 노출되면 한달 후에 30%가 죽고, 70%는 완쾌되어서 곰보 자국을 남긴다. 즉, 민달천황의 사후에 4개월 가량은 그의 죽음을 고의로 숨겼던 것이다.
대신에 구주백제왕인 용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내어 임나, 즉 큐슈를 잘 지키라고 전한다.
민달천황의 부인인 추고천황은 백제에서 오는 자신의 형제들보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전위하고 싶어서 상을 감춘 것이다. 이때 추고천황의 아들인 죽전황자竹田皇子(562~596)가 23세였으므로 왕위를 이을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백제에서 볼 때는 죽전황자보다 성명대왕의 아들들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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