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25장. 의자대왕의 일본 성덕태자 정벌

자연정화 2018. 7. 25. 13:23

25장. 의자대왕의 일본 성덕태자 정벌

義慈大王의 日本 聖德太子 征伐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4787

 

백제 위덕대왕의 적자인 아좌태자가 구주백제에서 죽고, 그 아들 의자왕자가 구주백제왕이 되는데, 백제 대왕으로 법대왕 부자가 차례로 즉위하자, 의자대왕은 백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2품 관제를 시행하고 수나라와 외교하며 백제의 상국을 자처한다.

일본 대화조정의 성덕태자가 구주백제를 치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패전하여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복속된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의 12품관제를 도입하고 성덕태자는 의자왕자 앞에 굴복한다.

 

1. 성명대왕 왕녀 추고천황과 손자 성덕태자

聖明大王 王女 推古天皇과 孫子 聖德太子

 

[記]?御食炊屋姬命 /[紀]?御食炊屋姬天皇

 

592년에 즉위한 추고천황推古天皇(536~628)은 토요미키카시키야히메?御食炊屋姬라고 불렀다. 그녀는 성명대왕의 딸이며 이복 오빠인 민달천황의 황후였고, 용명천황의 윗누이였다.

 

추고천황의 모후는 성명대왕의 황태부인皇太夫人이었던 기다시堅藍媛로서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의 딸이다.

 

[원흥사연기]에서는 토요미키카시키야等與彌氣賀斯岐夜라고 했고 613년에 원흥사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추고천황 즉위 당시에 우헤노미야노우마야도노도요도미미上宮廐戶豊聰耳태자를 황태자로 하였는데, 백제 혜대왕이 되었던 용명천황의 아들이다.

 

추고천황을 세운 때부터 성덕태자는 대화의 조정을 모두 섭정하였고, 만기를 위임받아 실제적인 왕권을 가졌다고 기록되었다.

 

성덕태자는 불교를 장려하여 신하들이 다투어 절을 지었다.

이때 위덕천황은 구주백제왕이던 법대왕을 대신하여 자신의 큰 아들인 아좌태자阿佐太子를 구주백제왕으로 보냈다.

 

 

2. 위덕대왕의 적장자 아좌태자

威德大王의 嫡長子 阿佐太子

 

부자관계인 아좌태자와 의자대왕 혈통도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이 백제왕 선광善廣(=光)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백제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민달천황일까?

 

그런데 [고사기]에서는 민달천황이 광희廣姬와 결혼하여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572~598)를 낳았고 이를 [일본서기]에서는 오시카사히코히토오호에押阪?人大兄皇子라고 하였는데, 그가 서명천황舒明天皇을 낳았다고 전한다.

 

일본 34대 서명천황舒明天皇(재위629~641)이 백제 의자대왕(재위641~660)이 되었다. 이는 재위기간이 옮겨간 것으로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백제 의자대왕이 일본의 서명천황인 것은 여러 가지 기록상 틀림없다. 자세한 것은 뒤에 적는다.

 

그렇다면 민달천황은 선광왕의 증조부가 되고 의자대왕의 할아버지가 된다.

 

[신찬성씨록]과 조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역사 조작이 있다. 일본의 34대 천황인 서명천황이 백제 왕계가 아니라, 일본 천황계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서명천황의 부왕을 백제 위덕대왕에서 떼어내서 그 동생인 민달천황에게로 옮겨붙인 것이다. 물론 민달천황도 백제 성명대왕의 아들이지만 일단은 일본 천황이다.

 

[고사기]에 기록된 서명천황의 부왕인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는 실제로 백제 위덕대왕 때에 구주백제왕으로 임명된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였다.

즉 위덕대왕의 적장자嫡長子였다.

 

백제 아좌태자는 구주백제왕으로서 큐슈 동북부 오오이타현大分縣 우좌시宇佐市의 우좌팔번신사宇佐八幡神社 터의 우좌궁에 있었다.

이 지역의 성씨가 우좌씨宇佐氏와 일자씨日子氏인데,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에서 비롯된 것이 우좌시의 일자씨日子氏이고, 민달천황에서 비롯된 것이 우좌씨宇佐氏였다.

 

본래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 시절 도읍은 오사다譯語田, 즉 큐슈 오오이타현의 우사시宇佐市였고 우사씨宇佐氏를 남겼다. 그러나 이 우사시에 또 일자씨日子氏를 남긴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는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였던 것이다.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의 아들인 서명천황舒明天皇(593~660)에 대해 좀더 밝히면 그의 시호는 능비에서 오기나가-대광액息長帶廣額이었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족일광액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대帶는 타라시라고 읽으라고 [고사기] 서문에서 저자 야스마로가 말했는데 이 대帶가 [일본서기]에서는 모두 족足으로 바뀌었다. 둘 다 우리말 다리와 관련된다.

 

그런데 [수서]에 기록된 서기 600년의 왜왕의 호號가 아배阿輩?彌이면서, 자字는 다라시북고多羅斯北孤라고 했으니 서명천황의 시호 족일광액足日廣額과 똑같다.

 

또한 액額은 고대의 우리말 발음이 “아이”이고, 이는 아배阿輩의 당시 발음인 아히와 비슷하다. 계미?彌는 우리말로 닭미인데 이를 일본에서는 서명천황을 다무라田村 황자라고 하였다.

 

즉 서기 600년에, 구주백제왕이었던 아배계미가 629년에는 일본 서명천황이 되고 641년에는 백제 의자대왕이 된 것이다.

 

보충 증거로는 600년의 [수서] 기록에 나타난 왜왕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다. [수서]에서 600년의 왜국왕비 이름은 계미?彌라고 하였다. 우리말로 닭미인데 추고천황의 딸로서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다미왕多米王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말로 닭(鷄)미왕이 다미왕多未王도 되고 계미?彌왕도 되고 다무라왕田村王도 되고, 그리고 다카라왕寶王((=닭라)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수나라에 간 사자가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으로 섬긴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무대왕武大王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서 아배계미는 백제 무대왕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의자대왕이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원자元子라고 했는데, 이는 위덕대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의 적장자로서 원자元子라고 주장한 것이 된다.

 

대신에, 의자대왕의 후비인 제명천황齊明天皇이 모정왕茅渟王의 딸이라고 했는데 바로 백제 무대왕武大王의 딸이었던 것이다.

 

의자대왕이 백제의 원자라는 사실은 또한 그가 위덕대왕의 동생인 민달천황의 손자가 아니라 위덕대왕의 적손자라는 것이니, 의자대왕의 부왕인 아좌태자, 즉 히코히토태자는 민달천황이 아니라 위덕대왕의 아들인 것이다.

 

아좌태자는 후손으로 일자씨日子氏를 남긴 우좌시에서 구주백제왕을 지냈다. 우좌시에는 흠명천황 때에 처음 광번廣幡이 나타났다.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백제로부터 광번廣幡을 들고 왔던 것이고 큐슈 춘일시의 광정궁廣庭宮國에서 광번이 유래된다.

 

아좌태자는 추고천황의 딸인 다카라왕寶王(~618)과 결혼하였다. 이때 다카라왕을 다무라왕田村王이라고도 했으며, 그래서 그녀의 아들인 서명천황을 다무라황자田村皇子라고도 불렀다. 다카라왕의 또다른 이름은 누카데히메糠代比賣인데 누가데는 액전額田이라고도 기록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좌태자(572~598)는 부왕인 위덕대왕(~598)보다 며칠 먼저 죽었다.

아좌태자의 고분인 히코히토 태자 고분은 나라현의 법륭사 서쪽에 만들어졌는데, 후지노키고분藤木古墳이라고 부르며 원분인데 지름이 48m다.

 

도굴당하지 않아서 매우 많은 귀중한 장식품들이 나왔다. 금동제 마구류와 코끼리 장식, 봉황장식, 귀면 장식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옥구슬과 옥전대도玉纏大刀가 나왔고, 유체는 20세 전후의 남자였다.

 

능비에서 598년 11월 27일에 죽은 것은 확인되었는데 나이가 정확히 해독되지 않았다. 27세로 추정하고 있다.

 

위덕대왕은 12월에 서거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으니 그보다 며칠 앞서 태자가 죽은 것이다.

 

아좌태자의 부인인 보왕寶王의 고분도 역시 618년에 서거한 것만 밝혀지고, 출생년을 알 수가 없다. 오사카 태자정 관음총고분?音塚古墳이라고 한다.

 

위덕대왕의 태자인 아좌태자를 민달천황의 태자라고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조작한 이유는, 서명천황을 백제 왕자가 아닌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런 조작이 아니면 일본 서명천황의 뿌리를 만세일계로 주장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592년 숭준천황이 죽고 추고천황이 즉위하니 구주백제왕으로서는 법대왕이 있고, 일본 대화조정의 황태자로는 혜대왕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있었다.

 

법대왕은 594년에 포로로 잡고 있던 대화의 장군 5명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591년 숭준천황의 큐슈 침공 때에 잡힌 장군들이다.

 

596년 위덕대왕은 자신의 아들인 적장자 아좌태자阿佐太子를 구주백제왕으로 보내어 법대왕과 교체하였다.

 

아좌태자는 큐슈에 가서 우좌시 팔번신궁宇佐八幡神宮에서 다스리면서 일본의 추고천황을 만나러 갔다. 이때 성덕태자의 그림을 일본에 남겼다고 전하는데 현재 일본 국보로 되어 있다.

 

598년 11월말에 아좌태자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죽었다.

위덕대왕은 아좌태자를 대신하여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武大王을 구주백제왕으로 보냈다.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으로 간 것도 추정이지만 확실하다. 무대왕의 아들이 큐슈에 남아 있다가 구주백제왕을 하고, 또 대화의 효덕천황孝德天皇(596~654)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대왕이 큐슈에 가서 세력을 심어놓지 않았다면, 그의 아들에게 기회가 생길 수 없는 일들이다.

 

또한 무대왕의 모후인 오오타마왕大?姬王이 길비황조모명吉備皇祖母命인데, 643년 9월에 일본에서 죽어서 나라현의 암옥산岩屋山에 묻힌 것도 고려해야 한다. 고분은 한변 40m의 방분方墳이다. 물론 이는 백제 법대왕도 일본에 살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무대왕의 다른 이름이 무광왕武廣王이다. 따라서 그가 구주백제왕으로 있던 곳은 후쿠오카현福岡縣 춘일시春日市 광정궁廣廷宮일 가능성이 높다.

 

아좌태자가 죽은 다음 달 598년 12월에 위덕대왕이 서거하여, 동생인 혜대왕慧大王(=용명천황)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혜대왕도 단 1년만에 서거하고, 위덕대왕의 막내 아들인 법대왕法大王이 즉위하였다.

백제 법대왕은 전국에 살생을 금하였다. 독실한 불자佛子였던 것이다.

 

599년, 일본 대화조정의 성덕태자가 반란의 기미를 보였다. 구주백제인 임나를 위한다면서 신라를 쳤다. 이때 대화조정이 대마도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고려된다.

 

[일본서기] 기록만으로 보면 백제 무대왕인 모정왕과 아좌태자는 둘 다 민달천황의 아들이지만, 각기 법대왕의 아들과 위덕대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서기 600년 법대왕이 역시 1년만에 서거하고,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에서 백제대왕으로 옮겨가면서,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아들인 8살의 아배阿輩 왕자가 새로운 구주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뒷날 서명천황이 되고 또 의자대왕이 되었다.

 

백제 무대왕은 아배阿輩 왕자에게 후비로서 딸을 주었는데 제명천황齊明天皇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 무대왕을 제명천황과 효덕천황의 부왕으로서 모정왕茅渟王으로 기록했다.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 백제 무대왕인데 서동을 마동이라고 하며, 이 마동과 모정왕의 발음이 관련된다.

 

 

3. 의자대왕 서명천황의 일본 성덕태자 정벌

義慈大王 舒明天皇의 日本 聖德太子 征伐

 

[陵碑]息長帶廣額命 /[紀]息長足日廣額天皇

 

8살의 아배阿輩 구주백제왕이 수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수서隋書]에서 서기 600년의 왜왕에 대하여 성은 천天(=阿每)이고, 이름 (字)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라고 했는데, 이 왜왕은 바로 서명천황舒明天皇(구주백제왕 재위600~629, 일본천황 재위629~641, 백제대왕 재위641~660) 이름이다. 서명천황의 능비는 오기나가타라시히로누카명息長帶廣額命이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오기나가息長는 시가현滋賀縣의 지명이고, 어머니 다가라왕寶王(~618)이 태어난 고향일 것이다.

 

[수서]의 다리시多利思는 대帶의 일본 발음이다. [고사기]에 대帶를 다라시로 읽으라고 했다. 이를 [일본서기]에 옮길 때는 족足으로 바꾸어왔다.

 

북고北孤는 비고比古, 즉 일자日子다. 따라서 다리시북고는 대일帶日, 또는 족일足日이다. 광액廣額의 광廣은 당시 구주백제 광국廣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액額은 우리말 발음 “아이”가 의자대왕의 호인 아히阿輩에 해당한다.

또 그의 호는 아히-계미阿輩?彌라고 했는데, 계미?彌는 우리말로 “닭미”로서 서명대왕의 호칭이었던 다무라황자田村皇子와 같은 말이다.

 

아히阿輩은 액額인 것이다. 액전촌額田寸은 누카다무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그의 왕비도 계미?彌라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닭미로 읽으면 추고천황의 딸로 기록된 다미왕多米王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다메田眼로 기록했는데 똑같은 말이고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기록이 있다.

 

단, 추고천황이 536년생이고 다미왕이었던 다카라황녀寶皇女 즉, 황극천황皇極天皇은 594년생이므로 추고천황이 58세에 낳은 것이 되고, 추고천황의 남편인 민달천황은 585년에 죽었기 때문에 의자대왕비인 다미왕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서명천황은 이미 600년에 수나라와 교섭하여 스스로 왜왕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당시 왜왕의 후궁이 6~700명이라고 하였다. 의자대왕이 종국에 사비성에서 삼천 궁녀를 거느릴 전조가 보였다.

 

즉, 수나라와 교류한 600년의 왜왕은 겨우 여덟살의 구주백제 의자대왕이었다.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600년의 국서에서 하늘을 형이라 하고 태양을 동생이라 부르는데 “해뜨기 전에 정사를 보고 해가 뜨면 일을 마치고 동생(즉 태양)에게 맡긴다. ”고 하여 수나라 문제를 왜왕의 동생격인 태양에 비유하였다.

 

倭王以天?兄,以日?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

 

[수서]의 기록에 이때 600년에 이미 의자대왕은 구주백제에 12관제를 시행하였다. 덕德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용하여 대덕大德, 소덕小德, 대인大仁, 소인小仁, 대의大義, 소의小義, 대예大禮, 소예小禮, 대지大智, 소지小智, 대신大信, 소신小信 등으로 12관제를 만들었다.

 

구주백제가 백제의 관위를 버리고, 스스로 관제를 만든 것은 본토백제에 대한 독립선언이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그를 섬긴다고 국서에 기록했는데, 스스로 위덕대왕 이후의 적손으로서 본토백제 무대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는 그가 무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607년의 국서에서는 더욱 광오한 표현으로, 수양제를 화나게 하였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고 하였다.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국서에서 신칭臣稱을 하지 않고, 편지를 올린다고 하지도 않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뜨는 태양이, 지는 태양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게다가 수나라 양제를 지는 태양으로 놀렸으니 수양제가 화를 낸 것이다.

 

608년 수양제는 배청裴?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수나라 사자 배청은 백제를 거쳐서 죽도竹島(=진도珍島),남망라국南望羅國(=남해도南海島), 쓰시마都斯麻國(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支國를 지나 큐슈 북부의 축자竹斯國에 상륙하였다. 그 동쪽에 중국인들이 사는 진왕국秦王國이 있었으니, 침류대왕 때부터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다시 10여국을 지나 해안(큐슈 동해안)에 달하니, 왜왕倭王이 소덕小德이라는 벼슬을 가진 아배이阿輩台를 마중시켰다. 이는 의자대왕과 같은 아배阿輩를 사용하니 왕자였을 것이다.

 

이 큐슈 동해안에서 수나라 사자 배청은 왜왕을 만나고 돌아갔다.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에는 수나라 사자가 가지 않은 것이다.

 

600년 기록의 왜국 수도는 야먀퇴邪靡堆, 야마대耶馬臺였다. 지금의 오오이타현大分縣 나가쯔中津市 야마쿠니가와山國川로 보아서 나가쯔시中津市가 당시 의자대왕의 구주백제 수도 위치이다.

 

한편 600년에 의자대왕의 태자로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가 기록되었다. 리利가 이름이고, 가미다(=神田)-불리(佛)는 다리시-북고와 같은 경칭일 것이다. 가미다神田는 큐슈九州 교토군京都郡 가미다정神田町의 지명이다.

 

이곳 주변에 전방후원분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이 남아있다.

 

[고사기]에서 의자대왕의 동생으로 중진왕中津王과 다량왕多良王이 있다. 중진왕中津王은 구주백제의 중진시中津市를 다스리고, 다량왕多良王은 큐슈 다라국多羅國, 구마모토熊本城를 통치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추고천황기]에서 서기 600년, 대마도에서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를 잡아서 유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성덕태자가 신라와 전쟁을 개시하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가마다는 규슈의 쿄토군에 있단 가마다(神田)로 고려되니 신라가 아니라 규슈와의 전쟁이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어서 신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 성덕태자가 공략한 곳은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601년 2월 성덕태자의 이복형인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장수가 되어서 2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구주백제에 상륙하여 축자筑紫(후쿠오카福岡市)와 지마군島郡(후쿠오카 서쪽 경계군 지마군志馬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4개월 뒤인 6월에 장수들이 쫓겨왔고, 래목황자來目皇子는 이듬해 2월에 시체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02년 6월에 구주백제가 왜국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서기]에서는 래목황자의 형인 당마황자當摩皇子를 장군으로 다시 오사카難波에서 출병하여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효고현兵庫縣에 있던 옛 파마국播磨國 서쪽에서 당마황자의 부인이 죽었다고 장수들이 돌아온다.

 

올바로 말하면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 쳐들어왔고, 효고현의 전투에서 구주백제 의자대왕이 또다시 승리하여 당마황자의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추고천황은 나라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했었는데, 이때 백제군의 침입으로 오하리다궁小治田宮으로 옮겨야 했다. 풍포궁이 불탔는지, 혹은 구주백제에서 온 점령자들에게 뺏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날로 성덕태자는 공손하게 의자대왕의 교화敎化를 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600년에 구주백제에 만들어진 12품의 관위제도를 일본에서도 강제로 도입하여 602년에 시행하였다.

 

602년에 성덕태자의 왜국은 구주백제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의자대왕이 만든 12품의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을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로 그 순서를 성의없이 옮겨 적었다.

그리고 603년 초에 헌법 17조가 공표되었다. 모두 좋은 말씀이었다.

 

의자대왕을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광오할 정도로 유식했던 것이다.

 

헌법 17조를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고 의자대왕의 공포일 뿐이다.

의자대왕은 그해 여름에 불상을 만들도록 하면서 성덕태자 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시부터 상궁上宮의 왕으로서, 일본 천황의 보좌역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 나이어린 조카 의자대왕의 아래가 되었다.

 

성덕태자는 600년 2월, 이가루가斑鳩에 궁을 지었다. 반구 법륭사터는 윤공천황의 원비조 궁터였다.

 

592년 추고천황 즉위 때에는 그가 상궁上宮 태자였으니 우에노미야노도요도미미上宮豊聰耳 태자였다.

 

그러나 602년 의자대왕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켜 철저히 패배한 이후에는 상궁태자가 아니라 마굿간 태자가 되니 마야도요도미미廐戶豊聰耳가 된다. 廐戶를 고대에는 마야馬屋라고 기록하였다.

 

즉, 그의 처지가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식으로 화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당나라의 외교 답서를 백제에게 강탈당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오기인데다가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해서 만들어놓은 기사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예속되어 외교권이 없으니 국서를 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다.

 

형식적으로 국서를 강탈당한 왜국 사자는 죄를 논하지만, 강탈한 구주백제왕에게는 항의도 못한다. 또한 수나라 사자는 큐슈에서 돌아간 것이 [수서]에 명백한데 [일본서기]는 대화조정에까지 왔던 것으로 조작했다.

 

추고천황은 모후인 황태부인 견람원의 능을 화려하게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를 만들었는데, 뒤에 소아씨蘇我氏의 난으로 불타버렸다. 소아씨는 의자대왕의 수족이 되어 전횡하였으므로 주요한 역사 기록이었을 것이다.

 

622년에 비운의 성덕태자(574~622)가 49세로 죽었다.

 

성덕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준동할 것을 염려했는지, 구주백제왕인 의자대왕이 아예 산배대형의 수족을 죽여서 경고하였다.

 

628년에는 추고천황도 93세로 죽었다. 그러나 능을 따로 만들 형편이 아니라서 596년에 죽은 죽전황자竹田皇子의 능에 합장하였다.

 

추고천황이 죽자 629년에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은 대화조정에서 서명천황舒明天皇(593~641)으로 즉위하였다.

 

위덕대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598)의 적장자였고, 모후는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의 딸인 누대희糠代姬였는데, 훗날 다카라왕寶王으로 추증되었다.

 

아좌태자의 구주백제 왕궁을 큐슈의 우좌시宇佐市로 밝혔는데, 의자대왕의 구주백제궁도 [수서]에 의하면 중진시中津市이거나 우좌시宇佐市가 된다.

 

서명천황은 큐슈에서 추고천황의 딸인 황극황녀皇極皇女, 즉 다미왕인 보황녀寶皇女(594~663)를 통하여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명천황은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1)을 통하여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天智天皇614~671)와 진인황자眞人皇子(=天武天皇622~686)와 간인황녀間人皇女(~657), 그리고 선광왕善光王을 낳았다.

 

그런데,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제명천황은 백제에서 고향왕高向王의 아들을 낳았었으니, 이는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이며 아직 아들이 없던 의자대왕의 양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명천황에게서는 선광왕까지 2남 1녀를 낳은 것이 된다.

 

서명천황이 죽을 때에 동궁이 16세라고 하였는데, 이는 429년 의자대왕이 큐슈의 구주백제에서 대화조정으로 떠날 때에 중대형황자의 나이다. 이후 구주백제왕은 제명천황이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제명천황의 아들인 부여풍장은 대화조정으로 들어가고 중대형황자가 남아서 동궁이라고 하였다.

 

서명천황은 또 소아도대신蘇我島大臣의 딸 법제랑원法提郞媛(588~636)을 통하여 고인대형황자古人大兄皇子(~645)를 낳았다. 서명천황은 다시 본토백제에서 은고恩古 황후를 통하여 백제 태자 융隆을 낳았다.

 

서명천황은 630년 대화에 오카모도궁岡本宮을 지었다.

 

631년에 왜국의 인질이 되었다는 의자대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자이며, 구주백제에서 모후인 제명천황과 떨어져 대화조정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631년, 당나라 사자 고표인高表仁이 왔는데, 왜국 왕자와 서로 예법을 다투다가 당나라 사자가 그냥 쫓겨갔다. 이 당시도 당나라 사자는 큐슈九州까지 왔을 것이고, 왜국왕의 왕자가 큐슈 책임자로 있었으니, 바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였을 것이다.

 

서명천황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대화의 백제천百濟川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다. 의자대왕은 640년 백제궁을 지어 옮겨갔다.

 

본토백제에서는 639년에 무대왕이 익산益山 미륵사지로 천도를 시도하였다.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에서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로 천도하여 새로 사찰을 지었다. 그러나, 639년 겨울 11월에 크게 번개치면서 비가 왔는데, 제석정사帝釋精舍, 법당法堂, 부도浮圖들이 다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하였다,

 

지모밀지地慕蜜地는 금마저金馬渚 지반현支半縣(당나라 도독부시대때 금마의 칭호)의 다른 표기니 익산益山이다. 무대왕의 능이 제석사 터에 있는 쌍릉이다. 모밀지慕蜜地에서 [일본서기]의 모정왕茅渟王이 유래한다. 무광왕武廣王, 무강왕武康王과 같고, 시호는 무대왕武大王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모정왕도 민달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삼국사기]에서는 무대왕이 법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일본서기]에서 민달천황의 아들들이라고 기록되었던 많은 형제들이 사실은 위덕대왕과 법대왕의 아들들로 마구 섞여 있다. 민달천황도 흠명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도 실제는 그 형인 성명대왕의 아들이었다.

 

641년, 백제 무대왕이 서거하자 의자대왕은 백제왕위를 받기 위해서 본토백제로 향했다. 이때 일본 대화조정에는 의자대왕의 황후였던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의자대왕 세부부가 각기 본토백제와 구주백제, 일본을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일본에 만들어진 의자대왕 서명천황릉은 오시카 단총고분忍阪段ノ塚古墳이라고 하는데 하방상원분下方上圓墳이다.

 

아래는 삼단의 방형 제단이고 위는 2단의 원분으로서 직경 42m이다.

삼단의 방형제단은 백제와 구주백제, 그리고 대화조정을 상징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