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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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의자대왕비 제명천황과 부여풍장 천무천황 1

자연정화 2018. 7. 25. 13:26

27장. 의자대왕비 제명천황과 부여풍장 천무천황 1

義慈大王妃 齊明天皇과 扶餘豊璋 天武天皇 1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4761

 

[陵碑]大海人天皇 /[紀]天渟中原瀛眞人天皇

 

중대형황자는 황태자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황극천황과 부여풍장을 시코쿠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큐슈로 탈출하여 다시 구주에서 나라를 세우고 황극천황은 구주백제의 여황이 된다. 이에 큐슈를 빼앗긴 효덕천황이 간인황후와 중대형황자로부터 버림받아 죽고, 중대형황자는 모후인 제명천황을 대화의 천황으로 세우고 계속 황태자로 남는다.

중대형황자는 간인황후와 밀통하다가 그녀의 아들마저 모반죄로 죽여 버린다.

 

의자왕과 제명천황, 천무천황, 천지천황의 혈통도

 

천무천황의 능비에는 대해인천황大海人天皇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누나카하라오키노마히도天渟中原瀛眞人天皇라고 하였다.

 

아메天는 성이고 이름은 무武다. 대해인大海人은 존경해서 높인 말이다.

 

누나카하라渟中原는 모정왕茅渟王이라고 했던 무대왕이 도성으로 삼으려던 익산益山 지방의 옛이름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와 관련되는데, 백제가 망한 뒤에 그는 백제 부흥을 위하여 김제金堤의 벽성避城(=碧城)에 도읍했다가 주류성으로 옮겼던 적이 있다.

 

오키노마히도瀛眞人는 영瀛이 대해를 의미하고 특히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동영東瀛을 의미한다. 마히도眞人는 마히도間人 황녀처럼 어릴 때 왕자로서 붙인 이름이 된다.

 

소아대신을 죽이고 황극천황을 폐위시키며 효덕천황을 세우고 스스로 황태자가 된 중대형황자는 자신의 모후였던 제명천황을 받들어 일본 천황으로 모시고, 이전의 황극천황은 시코쿠四國島 고지시高知市로 유배하였다.

 

시코쿠 고지시高知市의 조창신사朝倉神社에 황극천황이 지금도 모셔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론 의자대왕의 적자인 부여풍장도 함께 보내버렸다. 황극천황이 중대형황자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부여풍장을 살리기 위해서 데려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황극천황과 부여풍장, 그의 부인 누카다히메額田姬가 어느새 시코쿠에서 큐슈九州로 탈출하였다. 이때 누카다히메額田姬는 흥겨워서 노래하였으니 [만엽집萬葉集]에 시코쿠의 북쪽 항구 숙전포熟田浦에서 큐슈로 희망차게 떠나는 노래가 남아 있다.

 

황극천황은 큐슈의 축자筑紫에 옮겨가서 구주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부여풍장을 태자로 세웠다. 황극천황은 활발하게 외교를 하였고, 의자대왕의 백제는 잃었던 구주백제 대신에 새로운 구주국과 다시 우호적이 되어서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날, 구마모토熊本市의 아나국사血戶國司가 하얀 꿩白雉을 잡아받치니, 황극천황은 상서로운 조짐이라 하여 650년에 연호를 세워서 백치白雉로 개원하였다. 큐슈를 일본과 백제로부터 독립국으로 선언한 것이다. 당시 나라 이름은, 큐슈의 아스쿠라군朝倉郡이나 시코쿠의 아스쿠라신사 등으로 유추하건데 아스카라朝韓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책에서는 구주국이라고 부른다.

 

650년, 황극천황은 새 나라의 신년하례를 미경궁味經宮에서 하였는데, 황극천황의 도읍인 후쿠오카福岡縣의 축자태재부筑慈太宰府의 궁이었다. 2100명의 승려를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2700개의 등을 밝혔다. 당시 고승인 민법사旻法師는 후쿠오카의 아담향阿曇鄕 아담사阿曇寺에서 설법하였다.

 

후쿠오카 축자태재부筑紫太宰府 위치에 관세음사觀世音寺를 지었고, 백제는 개국 선물로서 금동불상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부여풍장을 따라서 아우인 새성塞城, 충승忠勝 등이 오사카로부터 따라왔었고 큐슈의 황극천황은 이들을 환영했다.

 

이때에 오사카 대화조정에서는 지금 신라를 치자고 의논하였으니, 사실은 새나라 구주국을 치자는 논의였다.

 

(주)[일본서기]에서 효덕천황의 백치白雉 원년은 황극천황이 큐슈에서 다시 등극한 백치 원년을 왜곡해서 기록한 것이다. 효덕천황이 두 번 개원한 것이 아니라 큐슈의 황극천황이 구주국을 만들어서 새로 개원한 것이다.

 

중대형황자는 큐슈라는 큰 배경을 잃어버린 효덕천황을 구박하고서, 효덕천황의 황후이자 자신의 정부인 여동생 간인황녀와 제명천황, 그리고 모든 신료들을 데리고 나라현으로 옮겨갔다. 혼자 남은 효덕천황은 쓸쓸히 죽었다.

 

효덕천황 고분은 왕능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능이다.

 

중대형황자는 아직도 천황이 되기에는 출신이 미약했으므로, 모후인 제명천황을 대화의 새로운 천황으로 새로 세우고 계속 황태자를 하였다.

 

백치 5년인 654년에 태국인(승려?)들이 큐슈에 왔는데, [제명천황기]에는 3년에 온다. 또 [제명천황기] 7년에 이세왕伊勢王이 죽는데[천지천황기] 7년에 똑같은 기사가 있다. 즉 [제명천황기]와 [천지천황기]의 중복을 의미한다. 실제는 새로운 구주국의 [황극천황기]와 대화의 [제명천황기]가 뒤죽박죽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는 구주백제와 구주국의 기록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고대사에서 백제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이었다.

 

제명천황 원년 655년에 공중空中에 용龍을 탄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공중은 본래 가라伽羅, 韓를 말하고, 이는 당시 큐슈九州를 의미하는 것이니, 부여풍장이 큐슈에서 등극하여 아스카라朝韓國, 즉 구주국의 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황극천황과 부여풍장은 큐슈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황극천황이 즉위하였지만, 655년에 부여풍장이 양위받아 즉위하였던 것이다.

 

제명천황은 오사카 대화조정에서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 다무봉多武峰 위에 관궁觀宮, 혹은 천궁天宮을 세웠는데 부왕인 백제 무대왕武大王을 기린 것으로 고려된다.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나라현 수마사須磨寺의 오륜탑五輪塔도 무대왕을 축원하는 것이었다.

 

제명천황 4년에 중대형황자는 애인이자 여동생인 간인황녀의 아들을 모반죄로 몰아 죽여버린다. 간인황녀의 애통함이 시가로 [만엽집]에 남아있다. 중대형황자는 간인황녀가 죽었을 때는 승려를 330명이나 만들어 출가시켰을 정도로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잠재적 위협은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