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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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백제 멸망과 천지천황

자연정화 2018. 7. 25. 13:28

28장. 백제 멸망과 천지천황

百濟 滅亡과 天智天皇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4755

 

[陵碑]中大兄皇子 /[紀]天命開別尊

 

660년 백제가 멸망하니 구주국에서는 부여풍장을 백제대왕으로 즉위시켜서 백제 부흥을 위해 백제로 보내고, 천지천황은 그 틈에 큐슈를 빼앗아서 황극천황을 죽인다.

부여풍장의 백제 부흥군은 천지천황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복신은 부여풍장의 암살을 기도한다. 부여풍장은 복신을 죽여야 했으나, 이로 인해 각 곳의 백제 성주들이 부여풍장을 불신하고 당나라 장수로 다시 돌아온 백제 태자 부여융을 보고 투항하게 된다.

부여풍장은 일만의 왜병과 함께 백강촌에서 당나라 수군과 결전을 하는데 허무하게 패전하고 백제를 포기하니 백제 부흥의 불길이 꺼져버린다.

 

천지천황天智天皇(614~671)은 제명천황이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낳은 아들이며 어려서는 교기翹岐라고 불렀다.

 

중대형中大兄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중황中皇이라고도 했던 제명천황이 낳은 소생 중에서 장남이라는 뜻이다.

 

그의 시호인 아메미코토하루키와케天命開別는 하루키와케開別에서 구주백제왕이었다는 기록이 된다. 즉 흠명천황처럼 춘일시春日市의 장진궁長津宮에 구주백제왕으로 두 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655년 백제 의자대왕이 타락한 조짐을 보인다. 천재로 태어나 모든 권력을 가졌는데, 늙어가면서 주지육림의 탐욕에 사로잡힌 것이다. 656년 환락을 제어하려는 충신 성충成忠 등을 감옥에 보낸다.

 

그리고 660년에는 너무나 쉽게 나당연합군에 패전하여 당나라 소정방에게 사로잡힌다. 소정방의 수군이 사비성에 이른지 3일만인 7월 13일에 왕성을 함락당한다.

 

의자대왕은 당나라 수도에 끌려가더니 곧바로 병을 얻어죽고 낙양에 묻힌다.

성주풀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낙양성 십리밖 북망산의 의자왕의 생각난다.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무대왕의 조카인 복신福信이 임존성任存城(=예산禮山)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서 버티고,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도도기류산都都岐流山(부안扶安)에서 농성하였다.

 

바로 그때도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신라를 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으니, 이는 본토백제가 아니라 구주백제의 부여풍장이 별도로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660년 9월, 복신福信이 구주백제의 부여풍장에게 본토백제의 참상을 전하고서 백제본토로 들어와서 부흥군의 구심점으로서 백제대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또 태후인 황극천황에게 부탁하니, 황극천황은 즉시 부여풍장을 백제대왕으로 즉위시키고 왜국 군대로 호위하여 백제로 보냈다.

 

복신의 사자는 대화조정에도 이르러서 역시 의자대왕비였던 제명천황과 중대형황자(천지천황)에게도 참상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천지천황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부여풍장이 백제로 출전하여 자리를 비운 큐슈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점령하였다.

 

당시 동요에 파리떼가 서쪽으로 갔다고도 하고, 말꼬리에 쥐가 새끼를 낳았다고도 하였으니, 천지천황의 비열함을 노래한 것이었다.

 

천지천황은 큐슈의 축자로 건너가서 춘일시의 장진궁長津宮에 행궁을 마련하여 군대를 통솔하였다.

 

이때 황극천황은 축자에서 남쪽으로 산을 넘어서 조창군朝倉郡의 귤광정궁橘廣庭宮에 있었다.

 

천지천황은 추격하여 조창궁에 불을 지르니, 황극천황이 서거한다. 조창궁에서 관을 만들어서 장례를 시작할 때에 귀신이 큰 갓을 쓰고 장례 행사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당시 민심이 무도한 천지천황을 겁주는 것이었다. 천지천황은 황극천황의 관을 배에 실어서 대화로 보냈다.

 

백제땅의 전장에서 이 소식을 들은 부여풍장은 애도의 시를 지었다.

 

“모천황께서는 늙어 쇠하셔도 보물(枳舸羅=다카라=寶皇)이셨다. 어른(姑)이 자꾸 늙어가니 위력도 약해져서 이런가?(舸矩野)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무모(武謀=천무천황)를 슬프게 하는구나. 모천황의 은혜를 갚으리라. 枳瀰我梅能 姑衰之枳舸羅儞 婆底底威底 舸矩野 姑悲武謀 枳瀰我梅弘報梨”

 

(주) 애도시의 마지막 귀절 지미아마홍보리枳瀰我梅弘報梨로 보아서 지미아마枳瀰我梅는 경칭이다. [수서]에서 왜왕호는 아바이계미阿輩雞彌,왕비는 계미雞彌라고 불렀다. 왜왕은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이미 스스로 해뜨는 곳의 천자라고 적었다. 따라서 계미는 황皇이고, 아배계미阿輩雞彌는 부황父皇 혹은 어버이천황天皇이라는 뜻이다. 싯귀의 지미아매枳瀰我梅는 아바이계미阿輩雞彌를 뒤집었다. 지미(皇) 다음에 아바이我梅를 붙였는데, 역시 어버이의 의미가 된다. 역시 어버이천황이나, 이 때는 어머니천황, 즉 모황母皇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황극천황이 천무천황의 친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래서 집안의 여자 어른을 의미하는 고姑자가 사용되었다. 즉. 큐슈에서는 백성들이 천황을 부황 또는 모황이라 높혀 부른 것이며 천무천황도 역시 그렇게 불렀지만, 개인적으로는 친척 여자 어른을 뜻하는 고姑라고 기록한 것이다.

 

황극천황은 [능비陵碑]에서 다카라천황寶王天皇이라 하였으므로 枳舸羅는 다카라(寶)로 본다. 계미왕을 다미왕이라고도 했고 다카라왕이라고도 했었다. 가구야舸矩野는 이럴까? 하는 감탄사로 본다. 무모武謀는 천무천황을 가리킨다. 홍보리弘報梨는 큰 은혜를 주셨으니 결국 은혜를 갚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현재 [일본서기]에서는 이 싯귀를 천지천황이 자기 어머니 제명천황의 죽음을 애도하며 붙인 시로 소개하고 있는데 고姑자로서 부정된다. 친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고姑라고 하지 않는다.

 

천지천황은 스스로 큐슈의 왕을 칭하고서, 백제왕 풍장에게 물품과 군사들을 보내었다. 그래서 쥐가 말꼬리에서 출산을 하게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제 본토로 건너온 부여풍장이 백제를 부흥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복신이 장수인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병사들을 빼앗아 전권을 휘두르고 부여풍장에게는 제사만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복신이 부여풍장의 암살 계획을 세우니 부여풍장이 먼저 복신을 잡아 죽였다. 이때 복신은 천지천황의 밀지를 받았었는지 복신의 후예에게 천지천황이 후대하였다.

 

한편, 의자대왕의 태자였던 부여융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살아돌아와서 당나라 병참을 책임지는 당나라 장수가 되었는데, 부여풍장이 장수를 죽인 일을 악용하여 백제 각 곳의 다른 의병들에게 복신처럼 억울하게 죽지말고 부여풍장을 배반하여 자기처럼 잘 살라고 선무하였다.

 

662년 가을에 부여풍장은 군산 앞바다에서 당나라와 일전을 겨루기로 하였다. 왜국에서 일만의 병사가 오기로 되었는데, 배로 400척이었다.

 

그런데 왜군은 전투를 급하게 서두르다가, 170척의 당나라 수군에게 백촌강의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왜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왜군은 보급품이 너무 적어서 전투를 서둘렀을 수도 있다.

 

결국 부여풍장의 백제 부흥은 실패하였다. 부여풍장은 조용히 배를 타고 전장을 떠났고 뒤에 남아있던 주류성은 항복을 하게 되었다.

 

부여풍장이 패전 후에 고구려로 갔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한 줄 첨가되어 기록되었고 이를 [삼국사기]도 기록하였다. 그러나 부여풍장의 패배가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된 [중국기록]에는 원래 이런 대목이 없다.

 

그가 일본에 돌아가 다시 천황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의 사가가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