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1]

자연정화 2018. 7. 28. 11:57

잊혀진 제국 / 중국과 일본을 다스렸던 비류백제

 

잃어버린 고대사중 대륙백제와 한반도 웅진을 중심으로 한 비류백제, 광개토대왕의 침입으로 인한 일본으로 간 백제를 통한 한·일고대 관계의 올바른 역사전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2003. 9.30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한 교육인적자원부 후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민족사학자들의 견해와 기존 국내사학자들과의 역사이론을 비교함).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1]

 

고대 백제의 기원

 

먼저 우리가 아는 백제에 대한 기본 상식은 먼저 시조가 온조이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세력으로서 고이왕 때 정치제도를 본격적으로 갖추었고, 근초고왕 때 최대영역 판도를 얻었으며, 침류왕 때 불교가 들어왔고 수도가 한성에서 공주로 옮겨진 후 부여로 천도되었으며 의자왕 때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AD 660년)되었다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고대 백제는 한반도 한성부근에서 호남지역까지 있었던 그런 간단한 작은 지역국가가 아니라, AD 4세기말에는 중국대륙 옛 요서 지방부터 남으로 양자강 연안까지 해안지역(대륙백제)과 한반도 지역(반도백제) 그리고 왜열도 근기지역(열도백제)을 본체로 하여 해외의 22개 담로국을 갖춘 동방의 로마제국 같은 대해상 국가였기에 연구해보면 볼수록 그 국가 실체가 무궁무진한 신비의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 사학계에서는 일본이 만든 반도사관에 의거, 한반도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남부 지역의 백제만을 신봉한다.

 

백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름 고추모)의 행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고추모(高鄒牟)는 동부여의 금와왕을 피해 졸본 부여로 피해오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우이국(宇台國) 족장의 미망인 소서노(召西奴)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아들 온조(溫祖)를 낳게 된다.

 

한편 소서노는 전남편 우이(優台)로부터 얻었던 온조의 이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고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BC 58년). 고구려 건국후 동부여 시절에 결혼하였던 예부인과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오자 소서노의 재력과 세력으로 건국하였던 고추모는 자신의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동부여에서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한편 고추모가 유리태자를 책봉하자 그의 사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서노와 비류, 온조형제는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피해 달아나 현 중국 난하 서쪽 발해만 내륙지역(옛 대방고지)에서 어머니 소서노와 장남 비류를 중심으로 남부여족과 함께 초기 형태의 백제국 어라하(於羅瑕)나라를 이룩하게 된다(BC 18년경).

 

 

비류백제의 탄생

 

중국대륙 대방지역에서 건국이후 인접한 낙랑군 말갈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비류와 온조형제 및 남부여족 계통 100개 가문은 선단으로 발해만을 떠나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미추홀로 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백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뜻에서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반도에 온 후 평야지역에서 안정적인 정착을 원했던 온조계 해(解)씨 세력들은 형 비류계와 갈라져서 백가의 1/10을 이끌고 나가 온조 십제(十濟)국으로 분국하고, 반면 비류계 진(眞)씨 세력들은 한반도 남부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목지국 등 토착 마한세력을 정복하고 웅진(현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비류백제국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책을 쓴 김성호 선생은 대륙백제계가 한반도로 들어와 비류백제국을 세운 것이 AD 18년경으로 본 반면,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을 저술 한 홍원탁 선생은 비류계와 온조계가 왕위 주도권을 하던 중 온조계 제13대 근초고왕이 비류계 선왕 제12대 계왕을 처치하였을 때 계왕 후손 비류계가 AD 370년경을 전후로 하여 한반도 웅진지역과 왜열도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고대 백제는 처음부터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수지역에서 최초로 건국이 되었다가, 우리가 아는 온조백제 외에 성씨가 다른 비류백제가 동시에 같이 존재하였는데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비류 백제계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벌로 AD 4C말 왜열도로 달아나 일본의 고대국가(야마토 왜, 大和倭)의 기원이 되게 된다. 즉 비류 백제는 일본으로 간 백제의 통칭이 되며 소위 일본에서 불리는 백제의 명칭 구다라(久多良)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류 백제의 역사가 우리교과서에서 슬며시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할 때, 일본국 생성의 근원이 되는 비류백제의 역사를 은폐하게 되었고 삼국사기에서도 온조백제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 관계로 일본인 사학자에게서 배운 친일 식민사관 학자들이 해방후 국내 강단 사학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식민사관이 이들에 의해 수정 없이 보급되어 이처럼 비류백제의 역사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중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추가로 알아야 하는 고대 백제의 성씨관계를 살펴보면, 고추모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온조계는 해(解)씨, 고(高)씨, 부여(夫餘)씨등의 왕씨성을 가졌으나 이복형 비류는 소서노의 전남편 우이의 아들인 고로 위(倭)족 계통인 진(眞)씨, 모(牟)씨, 우(優)씨등을 사용하게 되었다.

 

 

먼저 우리가 교과서에서 온조백제의 역사만 배우고 국내 사학계에서도 비류백제를 초기에 망한 것으로 보아 온조백제만 인정하는 이유는 고려 인종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는 비류와 온조가 한반도 미추홀에 와서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로 분국을 하는데 비류가 미추홀 지역에 살다가 갑자기 바닷물이 짠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여 의문을 남기고 이후 온조계가 비류계 세력을 흡수하여 백제를 하나로 계승시킨 것으로 서술된다.

 

허지만 그 서술 배경을 잘 살펴보면 삼국사기를 편찬할 시기(AD 1145년경)에는 비류백제계가 왜열도로 들어가서 야마토왜(AD 400년경)를 거쳐 일본국(AD 670년)으로 변신된 지 이미 수백년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남아 있었던 온조백제 위주로 서술할 수 밖에 없었고 신라 경주출신이었던 그의 역사관은 신라를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보아 그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의 대해상국가를 이룩했지만 일본으로 간 비류백제의 역사는 자연 그 흔적과 지문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민족 사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논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민족 사학계에서는 비류와 온조계를 모두 인정하는 반면에 왕권의 형성지배구조와 왕국 위치에 대한 추정에 있어서만은 약간의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첫번째 주장은 한성근처의 온조십제는 웅진(현 공주)을 중심으로 한 비류백제의 담로국(擔魯國)으로서 존재하였고 AD 1C∼AD 4C말까지 2개의 국가가 한반도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비류백제계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왜열도로 망명하게 되자 AD 5C초부터 온조 백제 하나만 한반도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주장은 만일 비류백제가 위의 주장대로 한반도에 온조와 별도로 함께 있었다면 온조계처럼 역대왕의 계보 즉 왕력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떤 역사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점에 기인하여 하나의 백제왕국에서 두개의 세력이 왕권을 잡기 위해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비류계와 온조계가 순위를 바꿔가며 서로 왕권을 나눠 차지했다는 주장이다.

 

마지막 논쟁은 왕국의 위치문제로서 온조백제 수도 한성(漢城)은 지금의 서울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옛 백제가 도읍했던 중국 요서 발해만 내륙의 대수지역에 위치했던 장소를 나타내는 것인데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반도사관에 의거 잘못 해석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즉 원래 백제왕국이 처음부터 의자왕 때까지 대륙에만 있었다는 설과 AD 4C말경 근초고왕이 대륙백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류계 세력을 한반도 서남지역 및 왜열도로 진출하게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근거로서 만일 기존 주장대로 한성백제가 한반도의 서울근교에 있었다면 공주천도(AD 475) 전까지 거의 500년간 존속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서울 인근에서 백제 토성들은 일부 보이지만 역대 한성백제계 왕릉과 유물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사실을 제시한다.

 

이런 여러 주장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최근 발견된 공주 수촌리 백제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등 유물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등 과학적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며 대륙백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중국측 학자와의 학술대회를 통한 문제제기와 중국측 사료조사 및 유물 합동 탐사등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백제의 해외진출과 해상강국 위상확립

초기 온조 비류계와 공존 / 근초고왕 시 왜열도 정벌

 

국내 교과서에는 제8대 고이왕(AD 234∼286)에 이르러 본격적인 정치 체계를 갖추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온조계 왕권이 비류계 세력과 함께 유지되다가 제7대 사반왕 때 비류계 고이왕이 왕권을 찬탈한 후 최초로 양세력이 통합된 정권이 탄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큐슈등 왜열도 남부 지역은 먼저 고대 가야계 세력이 들어가 지배하였고 AD 2C부터는 백제계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고이왕 시절에는 안정된 정권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이 가속화되어 먼저 왜열도 큐슈지역에 있던 야마타이(邪馬台)국의 신공황후(이름 히미꼬, 卑彌乎)가 자신과 결혼한 현지 백제계 왜왕 중애왕을 독살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목라근자 장군을 파견하여 히미꼬의 복속을 받아온다.

 

이어서 AD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쳐 환도성이 함락되자 좌장 진충을 요서 지역으로 보내 관구검의 후미를 쳐서 이를 제압한 뒤 발해만 지역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여 태수 궁준을 제거함으로써 중국의 대방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륙 재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또한 AD 4C초에는 고구려와의 동시 협동 공격으로 고구려의 낙랑군 병합과 함께 백제는 그 남쪽 대방군 지역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양쯔강 유역에도 백제 자치지역인 광릉군과 성양군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백제의 최전성기 제13대 근초고왕(AD 346∼375) 말기에는 태자 근구수와 함께 현 난하 서쪽의 요서지역과 북경지역까지 장악하여 요서군, 진평군등 백제군을 설치한 후 주세력권에 두었고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중국 동진(晋)과 결전을 벌여 이미 구축한 양쯔강 상해부근의 기존세력 지역까지 서로 연결하는 성과를 얻었으며 고구려의 요동 지역 일부와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니 황해를 백제내해로 하는 말발굽형의 강대한 국가를 이루어 놓았다.

 

또한 근초고왕은 처남 조정 좌평 진정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비류계 제12대 계왕의 친손 응신(應神, 이름 호무다)에게 명하여 신공황후의 야마타이 정부가 망한 후 당시 100여년간 주도 세력 없이 힘의 공백이 생긴 왜열도를 정벌하게 만들어 백제계 세력을 다시 한번 재구축 한다.

 

이리하여 백제의 영토는 AD 4C말에는 중국 해안의 대륙 백제와 한반도의 본백제, 일본의 근기지역까지의 왜백제등 3개 지역을 본체로 하여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등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이르는 해외 22개의 담로국을 보유한 동아시아의 거대한 해상제국을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