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2]

자연정화 2018. 7. 28. 12:01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2]

 

온조백제(북부여 해씨) / 비류백제(졸본부여 진씨, 모씨)

 

解氏계 眞氏계

제1대 온조왕, 제2대 다루왕, 제3대 기루왕 제8대 고이왕, 제9대 책계왕

제4대 개루왕, 제5대 초고왕, 제6대 구수왕 제10대 분서왕, 제11대 비류왕

제7대 사반왕, 제13대 근초고왕, 제14대 근구수왕 제12대 계왕

제15대 침류왕, 제16대 진사왕, 제17대 아신왕

제18대 전지왕, 제19대 구미신왕 牟氏계(공주 천도)

제22대 문주왕, 제23대 삼근왕

餘氏계 온조백제(남부여 부여씨) 제24대 동성왕

제20대 비유왕, 제21대 개로왕, 제25대 무령왕

餘氏계 남부여(부여 천도)

제26대 성왕, 제27대 위덕왕, 제28대 혜왕

제29대 법왕, 제30대 무왕, 제31대 의자왕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난 역사

 

광개토대왕 비문은 AD 4C말에서 5C초까지의 고대역사, 즉 고구려와 백제관계 및 한일 고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비밀을 담고 있다.

 

이 기념비는 1880년 압록강 연변에서 개간을 하던 중국 농민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비의 높이는 6.4m이고 비문은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 장수왕이 선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AD 414년에 건립했다는 것으로 현재 중국 집안 현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시절 관동군 참모본부 소속 관서국에서는 첩보원을 만주전역에 파견해 이 비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던 중 우연히 발견되자 관서국 소속 사꼬오 중위에 의해 비문탁본이 만들어져 처음 공개되자 광개토 대왕의 공적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명치 17년, 1884년에는 일본의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고 합리화하고자 관동군에 의해 비문 내용이 재해석되었고 재일 사학자 이진희 선생은 1972년에 이 비문이 관동군에 의해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글자에 회칠을 하여 변조되거나 조작되었다고 주장, 한일 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러면 비문에 나오는 기사를 통해 숨겨진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군이 국경남쪽 백제 18성을 공취했다(功取壹八城)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AD 391년 즉위부터 시작된 백제 공략 기사로써 18성에는 백제수군의 요충지였던 관미성(關彌城)도 포함되어있는데 국내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만을 상정하여 이들 여러 성들이 한강좌측 서해안의 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만, 필자는 근초고왕 때의 요서백제 세력을 고려해 볼 때 발해만 내륙의 난하 및 대수(帶水)지역의 성들을 전략상 먼저 공략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참고로 이 비문에는 왜(倭)라는 문자가 자주 나오는 데 이는 웅진에 있다가 왜열도로 달아난 나라 백제(대화왜)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비문에는 영락 6년(AD 396년) 병신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요서백제 제압 후 수군을 통해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58개성을 탈취한 기사로 여기에는 비류백제의 수도 웅진 거발성(居拔城)도 포함된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어서 비류백제의 도성(웅진 거발성) 친후에도 백제 잔병이 불복하고 감히 나와서 계속 항거하자 대왕은 아리수(한강)을 건너 성(북한산성 추정)을 포위하여 백잔주(온조계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아신왕이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기록이 나온다.

逼其國城 不服義 敢出迎戰.... 渡阿利水 遣自迫城...<百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從今以後 永爲奴客

 

위 비문을 보면 백제는 하나뿐이라는 선입관을 벗어나게 하는 잔국(殘國)과 백잔(百殘)이라는 두 단어가 나오는 데 본 연구회가 개최한 고대 한일관계 학술회의에서 김성호 선생은 <잔국>- 웅진에 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토벌되어 일본으로 사라진 비류계 백제, <백잔>- AD 396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여 한반도에 생존한 온조계 백제라고 설명하여 2개의 백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광개토호태왕 6년 비문에 기록된 백잔국(百殘國)

 

비류계 응신 천황의 비밀

 

일본서기에는 최초의 일본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를 세운 천황으로 응신(應神)이 나타나는 데 앞서 근초고왕 때 비류계 선왕 계왕의 후손으로 칠지도를 받고 한반도와 왜열도로 진출했다는 수수께끼 인물로서 이름에 神자가 붙은 것으로 볼 때 왜열도로 도래한 한국계 지도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 민족 사학계에서는 응신이 근초고왕의 명령으로 왜열도 정벌후 전남 영암지역에서 비류 백제계 현지 담로왕으로 있다가 AD 390년 웅진에서 어라하 천황으로 즉위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이 위 비문에서 보듯이 AD 396년 웅진성을 토벌할 때 그곳에 있었던 응신이 자신이 개척한 당시 백제의 식민지인 왜열도의 난파지역(현 오오사카) 대별국(大別國)으로 도피, 그 후 나라지역에 망명정부(나라백제)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망명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앞서 신공황후가 세운 야마타이국이 멸망하는 년도(AD 269년)에 연결시켜 응신을 신공황후의 아들로 편입시켰고 AD 270년에 일본에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응신 원년(AD 390년)보다 120년 앞선 인물로 조작함으로써 광개토대왕에게 패하여 왜열도로 도망간 사실을 감추려 하였다.

 

고대한일관계 학술회의 논문집(2003. 9. 30,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교육인적자원부 후원)

 

한편 대조선 제국사를 그린 김산호 선생은 응신을 일본에 천자문을 전달 가르쳐 준 왕인(王仁)박사와 동일한 인물로 보았으며 (일본서기에는 응신을 AD 270년대 사람으로 왜곡하였고 AD 405년에 도왜한 왕인을 학자로 서술하여 서로 다른 인물로 만들고 있다) 두 사람의 일본식 발음이 크다(大), 많다(多), 높다(高)는 의미의 오오진으로 똑같이 읽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개토대왕과 응신천황의 대결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족 계통의 형제국으로 서로 화평을 유지해 오다가 AD 4C초 발해만 완충지역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두 나라에 의해서 병합되자 요서지역에서 양국의 국경이 접해지는 상황에서 자연히 국경분쟁에 노출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AD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요서백제를 선제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패수 근처에서 백제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퇴각하다가 북평양성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AD 390년 웅진백제에서는 응신이 천황으로 즉위하였고 불과 1년 후에는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열제 보위에 등극하게 되자 동시기에 두 정치적 영웅의 출현은 악화된 양국 외교상황에서 서로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근초고왕이후로 백제는 대해양 제국의 최 전성기를 맞고 있던 중 변방의 신라만이 조공관계를 거부하므로 웅진백제의 응신왕이 신라정벌을 선언하자 당시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실성태자를 질자로 보내 군사동맹을 맺고 구원을 요청하자 외교적 명분을 얻은 젊은 패기의 광개토대왕은 조부 고국원왕의 복수도 겸하여 백제와의 한판 승부를 시도한다.

 

영민한 광개토대왕은 최근 백제와의 전투에서 고전한 이유가 요서백제와 한반도 백제가 고구려 양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구려가 어느 한 방향으로 공격하면 반대쪽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불리함과 수군의 상대적 열세 때문이라고 판단되자 먼저 AD 392년 요서지역 백제수군의 중심지인 관미성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20여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동양 최대의 막강한 수군력을 지녔던 대륙백제는 황해 제해권을 상실하고 그 세력도 황하 산동반도 이남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광개토대왕은 관미성에서 4년 간 수군양성 및 군선제조를 하게 한 뒤 비문에 나타난 대로 AD 396년 병신년 9월 대왕자신이 직접 수군을 통솔한 채 해상 침투작전을 과감히 전개한다.

 

여기서 우리는 약관 20세 초반의 어린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왕은 육군 보기군으로 하여금 한반도 하평양을 거쳐 한강 이북으로 위장 공격케 하여 백제군으로 하여금 한강 북방으로 전병력을 전진 배치하게 유도한 후 실제로 대왕자신은 수군 약 이만명을 특공대로 조직하여 일부는 황해를 건너 한강 서해안 경기만과 아산만 지역으로 해상 상륙작전을 시도하고 웅진 거발성을 직접 공략한다.

 

이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위장전술로 백제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수군을 동원한 절묘한 승부로서 대왕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에 허를 찔린 역전의 노장 응신도 반격을 포기하고 당시 비류백제계의 세력이 있었던 왜열도 나라지역으로 도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광개토대왕은 응신의 추격을 포기하고 부대를 보기군으로 재편성한 후 공격방향을 웅진 거발성에서 북한산성으로 돌려 온조계 아신왕을 계속해서 공격한다. 한편 응신의 패주소식을 전해들은 백제군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천황의 뒤를 따라 왜열도로 도망가는 형편이었으므로 아신왕은 군신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을 한다.

 

이에 대왕은 아신왕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남녀포로 일천명과 세마 일천필 등 전쟁배상금을 받은 후 개선하자 그 결과 동아시아의 패권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다시 넘어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