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3]

자연정화 2018. 7. 28. 12:05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3]

 

광개토대왕에게 패해 웅진에서 탈출한 응신 천황 및 그의 망명집단 세력들과 이들을 뒤쫓아가는 백제 신군(神軍)의 대 선단들은 왜열도로 향해 가서 큐슈 서북단 지역 축자(筑紫, 현 기타큐슈)에 도착하였다.

 

당시 큐슈에는 신공왕후가 세웠던 야마타이(邪馬台)정부가 망한 후 일정한 주도 세력이 100여 년간 존재하지 않다가 근초고왕 때 비류계 응신(이름 호무다, 譽田)을 왜열도로 보내어 재 정벌하게 하여 그 기반을 이미 구축한 바 있었기에 대소 1000여척의 응신의 선단이 AD 396년 12월 북큐슈 쓰쿠시(筑紫) 지역에 도착하자 가야계 임나(加那), 야뫼도(山門), 웅습(熊襲)등 주변국들이 조공을 보내 알현하였다.

 

AD 397년 정월 응신 일행은 북큐슈를 떠나 日向國(현 미야자키현)을 거쳐 기내(畿內, 오오사카)지역에 도착한 후 백제 담로 통치지역이었던 하내왕조 대별국(大別國)으로 들어가 임시정부를 세웠다가 몇 년후 이웃 나라(奈良)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선언하게 된다(AD 400년경).

 

 

응신은 이곳 나라 망명정부로부터 백제의 모든 담로국을 친정한다고 통보하니 천황의 어명을 받은 주위 담로왕들은 앞으로의 정책방향을 알고자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이때 그 중에는 멀리 한반도 백잔국에서 온 사신도 있었는데 백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과 군신관계 맹약을 맺은 사실을 뒤늦게 안 응신이 이는 정치적 배신행위라고 백잔국 사신을 크게 문책하자 아신왕의 항복은 천황의 망명소식과 더불어 백제군의 사기저하로 패색이 짙어지자 성(城)과 백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강변하면서 형제국 관계 복원을 간청하였다. 이것이 광개토대왕 비문(영락 9년 조)에 있는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與倭和通)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자 나라백제의 응신 천황은 양국의 정치적 연합관계가 회복되기 위하여 아신왕의 친자를 볼모로 나라백제에 보낼 것을 요구하자 AD 397년 5월 백잔 아신왕은 자신의 아들 전지 태자를 질자로 보내는 대신 한반도 내의 옛 백제 땅-침 미다례(현 제주), 현남(차령 산맥 이남), 지침(차령 산맥 서쪽), 곡나(산동 대륙 백제 지역), 동한지지(현 경남 해안)를 할양 받게 된다. 그 후 백제 계 양국간의 화평 관계는 태자를 포함한 왕의 친인척들을 질자로 보내면서 이백여 년 간 지속 된다.

 

 

나라(奈良) 백제 / 응신(應神)의 대반격

 

한편 나라백제는 동쪽의 강력한 하이 족과 큐슈 남동쪽 일향국 세력을 제압하고 명실공히 왜열도의 주인이 되었다. AD 403년 당시 백제 유민의 도왜 책임자 궁월군(弓月君)이 나라 천황궁에 건너와 약120현민(대략 일만오천명 규모)이 신라 정부의 다물 임나(부산) 항구 폐쇄로 억류되어 포로 된 채 왜열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나 항구를 신라에게 넘겨 준 고구려에 대해 응징하고자 총동원령을 내려 공격을 감행하였다(AD 404년, 갑진왜란).

 

즉 나라백제와 백잔국, 그리고 대륙백제 등은 대연합 수군을 결성하여 과거 광개토대왕이 웅진 거발성을 친 것과 같이 응신의 직접 지휘아래 요동의 북평양(요동반도의 현 요양으로 추정, 여기서 고조선의 왕검성인 옛 평양은 난하 북동쪽 현 승덕지역 추정,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 때 설치한 예비수도 하평양을 지칭-이처럼 역사적 시기를 달리하여 평양의 위치가 변천하였으나 국내 사학계는 일제의 반도사관에 의거 북한의 평양만 인정)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400여척 규모의 대연합 수군이 발해만을 통과하여 패수(현 태자하로 추정, 일부 학자는 발해만 지역 현 난하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국내식민사학자 경우는 북한의 대동강으로 확정)로 진입하였을 때에는 이미 백제의 전령선을 납포하여 공격 첩보를 알아낸 고구려 군이 미리 군선을 연결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을 퍼부어 백제 연합 선단을 괴멸시켰다.

 

응신은 북 평양성 공격의 실패로 웅진으로의 복귀가 실질 상 어려워지자 AD 405년 나라백제에서 야마토 왜(大和倭, Daiwa)로 국명을 바꾸게 되고 이것이 일본의 고대국가의 기원이 된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다물 임나항에 있는 백제계 120 현민을 데려오기 위하여 응신은 AD 405년 4월 궁월군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 계림근처에 있는 명활산성을 기습하여 처음에는 신라군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동년 8월, 목도 숙미와 전 숙미 장군을 이만명의 특공대와 함께 파견하여 임나항 탈환을 위한 신라와의 명활성 전투를 다시 전개하였다.

 

신라 실성왕은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응신의 야마토 왜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임나항을 백제유민의 도왜 출항기지로 내어주고 백제유민 인솔 책임자 습진언(襲津彦)을 풀어주었으며 선왕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 왕자를 오히려 질자로 보내게 된다.

 

이처럼 임나항은 당시 야마토 왜와 웅진지역과의 정치 교류를 잇는 사활적 이해관계가 있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야마토 왜의 임나항에 대한 결연한 탈환의지를 알고 이를 내어 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한일 고대 역사의 의문인 임나일본부의 진상인 것이다.

 

 

야마토 왜의 응신은 AD 407년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다시 감행한다. 이번에는 기병 속공전으로 전술을 바꾸어 요동반도의 비사성(현 대련)을 집결지로 하여 요동반도를 타고 올라 광개토 대왕이 있는 국내황성으로 급습하여 대왕을 사로잡는 과감한 작전을 세우게 된다.

 

야마토 왜 일만명, 백잔국 일만명, 대륙백제 일만명으로 차출된 연합 기병대를 구성한 후 신라 명활산성 전투의 명장 목도 숙미를 상장군으로 삼아 지휘 통솔케 하여 비사성을 출발, 황성으로 가기 위해 태산(현 안산)을 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의 오만 보기 군과 정면 충돌하였으나 연합기병대의 지휘 혼선으로 참패하였고 요동반도의 백제세력을 거의 잃게되었다.

 

왜(倭)의 실체와 야마토왜(大和倭)의 발전

 

우리가 흔히 왜(倭)라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 읽을 때 ‘위와 왜’의 두가지 발음이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멸칭할 때 쓰이는 왜는 작고 왜소할 矮를 말하는 것으로 倭와는 다른 의미이다. 즉 倭를 ‘위’로 읽을 때에는 위(上)라는 의미로 위족(倭族)이란 자신들이 속한 부족이름을 영광스럽게 표현하는 호칭이다.

 

여기서 학술대회 김산호 선생에 의하면 일본으로 간 비류 백제계가 야마토 倭로 자신의 국명을 붙인 것은 그 실체가 우리말로는 상족(上族)을 나타내는 것으로 순박하고 고귀한 민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倭가 일본에서의 발음은 야마토로도 읽혀져 신성한 태양의 터전이라 간주되었고 달리 다이와(大和)라고 읽혀지기도 한다.

 

한편 야마토 왜의 응신은 광개토 대왕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웅진 수복의 꿈을 접어두고 나라에 강원궁을 지어 비류 백제계의 확고한 정권을 세우게 되었고 이후 나라를 중심으로 한 아스카(飛鳥)문화가 발전하여 백제 천황가의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게 된다.

 

응신 천황은 AD 410년경까지 남쪽으로 큐슈 일향(현 미야자키 현)으로부터 북쪽 센다이(仙台)까지 대장정 끝에 왜 열도를 평정하여 국가를 확고하게 정착시킨다. 그 후 AD 425년 야마토 왜의 응신은 송나라로부터 안동대장군 왜국 왕으로 인정받아 왜 열도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는다.

 

이처럼 비류 백제계로부터 형성된 천황가는 AD 660년 나당 연합국에 의해 반도에 있던 백제세력이 멸망하자 나당 연합국의 왜열도 침입을 막기위해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끊기 위해 AD 670년 천지(天智) 천황이 倭에서 국호를 日本으로 바꾸어 새로운 국가로 변신을 도모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동북공정 작업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역사 왜곡하여 남북 통일 후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우리의 고토 회복주장을 사전에 막고 자신의 영토로 확보하려는 영원한 이민족 중국의 패권(覇權)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적 근원과 양국 민족의 동질성을 밝혀 장래 통일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 연합국가 재구축을 시도함으로써 21C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