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4]

자연정화 2018. 7. 28. 12:09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4]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사라지고 태자 거련(巨連)이 제20대 태열제 장수대왕(AD 413-491)에 오르게 되었다. 선왕 때 항복하여 한반도에 살아남았던 온조계 백잔국이 군신맹약을 어기고 야마토왜(大和倭)와 다시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해오자 장수대왕은 백잔을 응징하고자 AD 427년 수도를 황성에서 북한의 하평양으로 옮긴 후, 남진 정책을 계속하여 추진하였다.

 

한편 백잔에서는 아신왕이 죽고 그사이 왜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 온 전지왕에 이어, 구이신왕, 비유왕이 거쳐 갔고 제21대 개로왕(AD 455-475)이 통치하고 있는 시절에는 온조계 해(解)씨와 비류계 진(眞)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개로왕의 이름 부여경(扶餘慶)에서 엿볼 수 있듯이 부여씨로 세력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보낸 첩자 중 도림의 계략에 빠진 개로왕은 궁궐을 수축하고 국고를 탕진하여 국정이 피폐해지자 장수대왕은 백제 정벌의 호기를 잡게 된다. 또한 개로왕의 실정으로 당시 상좌평 문주(文周)와 목협만치(木協滿致) 장군이 결탁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 탈취를 모의하는 혼란한 상황에 이르자 세력의 열세를 느낀 개로왕은 대륙백제 상곡지방 주둔 현지 사령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AD 461년 대화왜에 질자로 보내져 있던 아우 곤지(昆支)를 급히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중신들의 반역 모의를 분쇄할 만한 왕권을 상실한 개로왕은 자기아이를 임신한 젊은 후궁을 곤지에게 맡겨 대화왜에 보내 이 상황을 전하게 한다. 곤지는 첩으로 얻은 개로의 후궁과 더불어 왜열도에 들어가던 중 북큐슈 축자 앞 각라도에서 폭풍을 만나 섬에서 후궁이 후일 무령왕이 될 아이를 분만하게 되자(AD 462년) 왜열도에서 자신의 양아들로 키우게 된다(삼국사기에는 대화왜의 실재를 부인하기 위해 분만된 아이가 산모와 한반도로 되돌아와 산 것으로 서술).

 

 

한편 고구려 장수대왕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예감한 개로왕은 반대세력인 상좌평 문주와 목협만치 장군을 신라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게 하고 조미걸취 장군도 비류계 웅진으로 파견하여 현지 담로왕들의 지원을 요청한다. 드디어AD 475년 장수대왕은 백제 정벌을 단행하여 먼저 아차산성을 차지한 후 한강(아리수)을 건너 북성(현 몽촌토성 추정)을 포위하여 초토화시킨다.

 

남한산성을 달아나던 개로왕은 자기에게 불만을 품고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계 장수인 고이만년과 재증걸루에게 붙잡혀 아차성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BC 7년에 시조 온조대왕이 세운 한성백제는 통산 20대 왕조, 482년만에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정설이다.

 

반면 국내 사학계에서는 혈통이 달랐던 문주를 개로왕의 아들로 둔갑시킨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거, 온조 백제 왕국이 계속 존재한 것으로 보나 실은 문주는 역성혁명으로 왕위를 찬탈한 모(牟)씨 성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었다(이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한반도에 잔존한 온조계 백제 위주로 만세일계를 만들려고 했던 의도적인 역사서술이었다).

 

상좌평 문주와 목협만치는 신라의 원병 결정이 늦어져 뒤늦게 일만명의 구원병과 함께 올라 왔으나 이미 왕과 자식들은 모두 죽었고 한성은 폐허로 변하여 있자 과거 비류백제의 수도였고 도성과 진(眞)씨계 담로 지지세력이 있던 공주로 천도하게 된다.

 

공주에 온 문주왕은 개로왕의 후계자가 없음을 알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대화왜 정부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곤지를 신왕으로 삼아 공주로 보내었다. 허지만 문주왕이 왕위 양도를 거절하고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자 곤지는 당시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힘을 합하여 문주왕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이들 세력에게 밀리자 곤지와 목협만치는 AD 476년 왜열도 나라로 망명한다(여기서 삼국사기는 곤지의 사망으로 서술).

 

이번에는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를 왕위 찬탈의 이유로 살해한 후 자신이 한성백제를 재건하려 하였으나 진씨계 담로세력 진남(眞男), 진노(眞老)등은 일단 문주의 어린 아들 삼근왕을 세운 후 해구세력을 토벌하고 삼근왕마저 제거하였다.

 

그런 후 진노 장군은 대화왜 정부에게 왕위 계승자를 요청하자 대화왜 응략천황(곤지와 동일인물이라 주장하는 설도 있음)은 곤지의 둘째아들(모대 牟大-남제서, 말다 末多-일본서기)을 왕으로 결정하여 AD 479년 4월, 왜열도 나라에서 공주로 보내는데 이가 곧 제24대 동성왕(AD 479-501)이다(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출신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갑자기 삼근왕 다음으로 나타나는 데 이는 대화왜와의 관계를 끊고 온조계 위주로 만들려는 또다른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왜열도 대화왜서 온 두명의 백제 왕들

동성왕의 대륙백제 경영과 무령왕(武寧王)의 북방정책

 

 

 

웅진에서 젊은 나이로 즉위한 동성왕은 초기 곤지의 섭정 하에 있었으나 점차 군왕의 위엄을 갖추고 독자적 정치를 하게된다. 국내적으로는 AD 487년 임나항의 담로왕 기생반숙미가 삼한왕을 자칭하면서 백제의 군량 수송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횡령하자 동성왕은 고이해 장군을 파견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임나항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유 이민항으로서 기능을 회복시켰고 신라, 가야와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AD 488년 중국 하북성 일부, 산동반도 지역의 백제 세력에 대한 북위(선비족 탁발씨가 AD 386년에 세운 국가)의 공격이후 498년까지 10년동안 총 다섯 번에 걸친 대외적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 북위에게 넘어간 옛 요서 백제 영토를 수복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고구려와 북위가 북부동맹을, 대화왜·백제·남제가 남부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AD 488년 북위의 침입을 막기위해 동성왕 자신이 산동반도 수도 내주( 州, 현 옌타이)로 직접 가서 격퇴하였다.

 

그런데 동성왕에 패한 북위가 AD 489년 외교상 적대국 관계였던 남제와 정치우호 조약을 맺자 백제와 남제와의 동맹관계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국제 외교상의 변화에서 AD 490년 북위의 고조는 보기군 10만명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역의 백제군을 공격해왔다.

 

동성왕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파견하여 북위 군대를 크게 격파한다. 이 당시 동성왕의 북위군 격퇴 기사가 남제서(백제전)에 <경오년 위나라 군대를 밤에 공격하니 북위군이 무너져 총퇴각하였고 백제군이 적을 뒤쫓아 마구 무찌르고 목을 베니 적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피가 온땅에 붉게 물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去庚午年...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湯 乘奔追 屍丹野

 

 

한편 남제는 왕위찬탈 등 내부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자 백제는 남제에 대한 지배적인 외교자세를 갖고 AD 495년 남제에 외교표문을 보내 과거 AD 490년의 북위 전쟁을 재확인하면서 당시 전쟁승리 유공자들에 대한 작위를 하사하고 대륙백제 각 영지에 백제 직할 태수를 임명한 사실을 통보한다.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북위는 AD 493년 문제때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백제는 산동반도와 회수이북 제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대륙백제 멸망시까지 70여년간 유지하게 된다. 그후 계속해서 북위는 각각 AD 494년, AD 497년, AD 498년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에 전쟁을 걸어왔으나 백제와 남제 연합군에 참패하게 되자 제남 회수지역을 백제에게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한편 북위와의 전쟁으로 인해 동성왕이 공주를 오랫동안 떠나있으면서 AD 500년 산동 내주에 임류각 궁궐을 짓고 통치하게 되자 공주 왕실과 토착 담로세력들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 위사좌평 겸 가림성주였던 백가(伯可)를 동성왕에게 보내어 대왕이 공주로 되돌아 와 통치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있던 대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백가가 공주의 통치를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자 대왕이 대노하여 백가를 죽이려하니 백가는 돌연 자객으로 변해 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이로써 근초고왕에 이어 중국대륙 내에 광대한 백제식민지를 건설한 동북아의 영웅 동성대왕은 AD 501년 12월 어이없게 자신의 신하의 칼에 맞고 죽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동성대왕의 왕릉은 현재 산동반도 내주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왕의 피살소식이 공주와 나라에 전달되자 대화왜에서는 곤지의 양아들 무령왕을 후임왕으로 임명하여 백제에 새로운 왕으로 보내게 된다(삼국사기에서는 이복 형제간인데도 불구하고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하여 부자지간으로 왕위 계승한 것으로 기록).

 

대왕을 죽인 백가가 무령왕의 취임을 거부하고 반란을 도모하자 무령왕은 우두성 성주 해명을 시켜 이들 세력을 물리쳐 죽이고 공주에서 제25대 신왕(AD 462-523)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령왕은 AD 502년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에게 빼앗긴 수곡성를 탈취하여 북방의 영토를 황해도까지 넓혔고 AD 503년, AD 506년 고구려와 말갈족의 연합군을 연속으로 격퇴하였으며, 섭라(섬진강 주변의 가야땅)를 놓고 벌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대화왜와 친밀한 관계를 위해 나라에서 어린 시절 곤지 밑에서 형제같이 자란 이복 동생 계체(繼體)천황에게 AD 503년 백동 200관으로 만든 청동경을 보냈고 AD 507년 자신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천황의 왕후로 삼으니 대화왜는 웅진백제의 부마국이 되었다(그래서 AD523년 62세로 무령왕이 붕어했을 때 대화왜의 계체천황은 이를 몹시 애도하여 금송으로 특별히 만든 관을 보내 왔던 것이다-국립 공주박물관 소장).

 

한편 섭라에 대한 가야와의 영유권 분쟁이 국제화되자 AD 513년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조정을 설득시켜 섬진강 무역중심지 섭라에 대한 백제의 주권을 인정받는다. 한편 당시 공주에는 천황계 진씨들이 대거 왜열도로 이민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졸본부여계 대신 남부여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어서 무령왕은 AD 509년 백제유민 보호정책을 펼쳐 도왜 이민을 제한하여 인구감소를 막았고 임나지역에서 유랑하고 있는 백제유민들을 백제 본관지에 재편입시켜 귀향조치 하였다.

 

이로써 왜열도에서 온 두명의 왕들은 백제를 강국으로 일으킨 치세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남제에서는 동성왕을 진동(鎭東)대장군 백제왕으로, 양나라에서는 무령왕을 영동(寧東)대장군 백제왕으로 불려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