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6]

자연정화 2018. 7. 28. 12:17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6]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양국 군사동맹을 맺은 후 남부여부터 침공한후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당 동맹의 대가도 수월치 않아 신라는 독립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김유신 장군은 뇌물로 매수한 남부여 좌평 임자를 통해 무녀 금화를 의자왕에게 접근시키는데 성공하자 왕은 그녀의 점술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가 충신 성충과 윤충형제를 감옥에 가두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연맹까지 붕괴시킨 신라의 국력이 급상승하게 되자 남부여에서는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사이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제31대 의자왕(AD 641-660)때에 이르러 동서전쟁으로 격화된 선왕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즉위 후 AD 642년 상좌평 부여 성충(成忠)과 가잠성(현 괴산) 성주 계백(階伯) 장군을 소집하여 먼저 신라 제1의 요충지 대야성(현 합천)을 빼앗은 후 계속하여 옛 가야 영토였던 지역의 40여 개의 성과 식읍 들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의 김춘추는 의자왕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찾았고 이때 마침 남부여에서도 신라침공의 배경을 외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성충을 고구려에 보낸지라 삼국간 외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신라 측은 남부여가 탈취해 간 영토의 즉각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남부여 측은 점령한 곳이 본래 백제의 속국인 가야연맹의 땅으로 신라가 훔쳐간 것을 다시 되찾은 것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맞서게 되어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두 나라가 영토 분쟁을 그치고 오히려 삼국이 대동단결하여 중원의 중화족을 정벌하여 영토를 공평히 나누어 갖자고 주장하니 신라 김춘추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 귀환하였고 반면에 남부여 성충은 고구려와 외교적으로 화친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앞서 남부여의 무왕은 자신의 딸 보황녀(扶餘寶, 의자왕의 친누이))를 대화왜 서명(舒明, 조메이) 천황에게 시집보내어 양국간 혈연 관계를 유지한 바 있었는데 AD 641년 서명이 갑자기 죽자 황후 보황녀가 즉위하게 되니 이가 황극(皇極) 여왕이었다.

 

또한 의자왕의 친동생 경황자(扶餘輕)는 당시 남부여국의 일본 외교대표부 역할을 했던 일궁부(日宮部)의 현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후 의자왕은 일궁부 경황자를 나라(奈良)로 보내 친누님되는 황극 여왕을 보필하게 하고 그 대신 아들 풍장(扶餘豊璋)을 일궁부의 군(君)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여 양국의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한편 대화왜에서는 천황은 상징적 대표 인물이고 정치 실권은 대신이 갖고 있었는데, 백제계 목협만치(곤지와 함께 도왜한 백제 장군)의 대화왜 후손으로 창씨 개명한 소아가(蘇我家)가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어 천황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황극여왕은 아들 중대형(中大兄, 후에 천지 천황으로 등극)을 통해 신라계 겸자련(鎌子連)과 의논하여 소아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라 김춘추가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요청하였다. 신라 김춘추는 남부여의 왜열도 배후세력을 치고 신라의 지지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대해인(大海人)장군을 원정군 대장으로 출병시켜 왜열도 신라지역인 단마(但馬, 현 도톳리 현)에 상륙시킨 후 일명 새잡기(鳥取)작전을 벌여 예상을 깨고 일궁부 풍장군의 아스카군을 누르고 아스카에 무혈입성 하게 된다.

 

AD 649년 신라 대해인은 먼저 소아입록(蘇我入鹿) 대신을 제거하고 황극 여왕 대신에 경황자를 새로운 효덕(孝德)천황으로 세우고 수도를 난파(難波, 나니와 현 오오사카)로 옮기고 대해인의 자문을 받아 신라식 정치제도와 연호를 사용하는 대화개신(大和改新)을 단행하였다.

 

나당 연합군의 남부여 침공

 

남부여와 신라가 서로 물고 물리는 전투를 계속하던 AD 648년, 신라 김춘추는 왜국에서 신라 세력을 구축한 후 본격적인 남부여국 공략을 위해 직접 당나라 장안성으로 들어가 당태종을 만난다.

 

 

당태종은 이미 AD 645년 고구려군에게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장안성까지 추적한 연개소문 장군에게 항복을 한 상태여서(한단고기 태백일사의 고구려 본기- 이 전투로 당나라는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속국임을 인정) 신라 일행을 군왕으로 예우 영접함으로써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양국 군사 동맹을 맺은 후 먼저 남부여부터 침공한 후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당 동맹의 대가도 수월하지 않아 신라는 독립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당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신라 관원들의 복식도 당의 복식을 따라 입기로 정했으니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이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술책이 이미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AD 649년 남부여 사비성에서는 나당 동맹 회담의 결과를 주시하면서 먼저 일궁부 자신의 아들 풍장이 주축이 된 백제세력은 백치(白雉, 흰꿩) 반정을 통해 신라세력을 기반으로 오른 친동생 효덕 천황을 폐위케 하였고, 수도를 아스카로 옮겨 친누이 보황녀를 다시 제명(齊明)여왕으로 복위시켰다.

 

이어서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계백 장군에게 전 부여군을 동원시켜 좌장 은상(殷相)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초기 신라군의 전력열세로 남부여군에게 서부 전선의 석토성 등 7개 주요한 요새들이 함락되자 신라도 왜열도 파견 조취군 중에서 대해인 별동군만 남기고 모두 불러들여 긴급 대항하는 처지였다.

 

남부여국의 압도적인 승세 속에서 양국의 정치적 변화가 생겼으니 AD 654년 신라에서는 태자시절부터 국제적 외교 감각과 경험을 갖춘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등장하여 처남인 김유신을 서불한(舒弗翰,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병권을 장악하자 정권이 안정된 반면에 남부여국 의자왕은 남부여 야마토 왜의 연합이 회복되고 신라에 대한 초창기 공격의 승리로 신라성 30여개를 탈취하자 전승 무드와 자만에 젖어 태자 부여효(扶餘孝)를 위해 태자궁을 짓고 대왕포(낙화암 근처)에 망해정을 설치하여 주색 가무에 빠지자 부여성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국가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라 김유신 장군은 뇌물로 매수한 남부여 좌평 임자(任子)를 통해 무녀 금화를 의자왕에게 접근시키는 데 성공하자 왕은 그녀의 점술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가 충신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를 감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마저 귀양보냈으며 군신인 서부은솔 복신(福信)마저 파면시키게 된다.

 

신라 무열왕은 반간계가 성공하자 김유신 장군을 불러 군사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편 태자 법민(法民)을 당나라로 보내 당고종의 왕비 측전무후에게 접근시켜 동맹군 파병을 요청하게 한다(AD 659년).

 

당고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공략하기로 정하고 북방군은 설필하력이 고구려를, 남방군은 소정방이 신라군과 연합하여 남부여를 각각 치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AD 660년 3월 신라 왕자 김인문과 당장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명이 덕물도(현 덕적도)에 도착하자 태자 법민이 군선 100척을 거느리고 맞았고 양군 연합군은 남부여국을 수륙 양면으로 침략하였다.

 

신라의 대각간 김유신은 5만명의 군사로 대야성을 출발하여 탄현(현 보은 근처)을 통과 부여 사비성으로 공격하고 있었고 태자 법민은 당군과 함께 기벌포(백마강 입구 서천)로 진격, 저항없이 상륙하였다.

 

탄현과 기벌포를 사수하라는 충신 성충은 이미 죽었고 남부여군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노장 좌평 의직(義直)만이 수군으로 백강의 입구를 막으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돌파 당하게 되었다. 또한 탄현을 아무 저항없이 넘은 제2군 김유신 5만 군사는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의 항전으로 황산벌에서 고전하였으나 어린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극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다.

 

한편 김유신이 싸우고 있는 동안 제 1군 신라 법민 태자와 당군 우군 지휘관 김인문의 연합군은 부여 사비성을 이미 함락하였으니 의자왕의 개인적 어리석은 독단과 정치적 방심이 국가 멸망의 화를 부른 것이었다.

 

한편 의자왕이 태자 부여효와 함께 부여성과 백성을 버리고 다급하게 웅진성으로 도피하자 왕자 부여태와 부여융이 항전없이 항복하였고 간신 임자가 보낸 군사에 의해 의자왕과 태자일행도 곰나루산성에서 달아나다 사로잡히자 당나라 소정방은 백제 재건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허락을 받아 왕과 태자, 왕족, 신하, 장령등 93명을 포함 1만2807명의 백제인 포로들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부여에는 당장 유인원과 당군 1만명, 신라 왕자 김인태와 신라군 7000명으로 구성된 웅진 도독부를 세워 성을 관리하게 하니 이로써 남부여 세력은 왜열도의 백제 세력만 남기고 소멸하게 되었다.(AD 6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