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백제(百濟) ➀ 역사

자연정화 2018. 7. 29. 12:56

백제(百濟) ➀ 역사

 

삼국(三國)의 하나로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

 

개설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에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온조(溫祚)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60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 간 치열한 부흥운동(復興運動)을 전개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熊津都邑期: 475∼538),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를 구성한 주민들의 계통을 보면 선주토착민은 한인(韓人)이었고, 여기에 예인(濊人)들이 섞였다. 한성도읍기에 지배층은 부여족 계통이 주류를 이루었다. 4세기 이후 삼국간의 접촉과 중국 및 왜(倭)와의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신라인·고구려인·왜인·중국계통의 사람들도 지배세력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적석총(積石塚)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加耶)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공유(共有)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

1. 건국과 성장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해 내려와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기본사료인『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의 초기기록과『삼국지(三國志)』동이전 한전(東夷傳 韓傳)의 내용이 상충하는 점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영역과 관련하여『삼국지』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마한(馬韓) 54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나온다.

 

반면에『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서기전 1세기 초에 백제온조왕(溫祚王)이 전라북도 고부(古阜)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배체제와 관련하여 동이전에는 국의 지배자인 국읍(國邑) 주수(主帥)가 읍락(邑落)의 거수(渠帥)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백제본기에서는 3세기 중엽 경에 이미 6좌평(佐平)·16관등제(官等制)라고 하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두 사서가 보여주는 백제의 모습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자료를 택하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초기기록을 신뢰하는 입장과 동이전의 내용을 강조하는 입장 등이 나왔다. 여기서는 3세기까지 백제국은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었다는 동이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에 보이는 영역 확대 기사는 후대의 것이 부회(附會)된 것으로 보는 절충론(折衷論)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실려 있다. 온조 중심의 설화에 의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朱蒙)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瑠璃)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해 위례(慰禮)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한다.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비류는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改嫁)해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했다고 한다.

 

건국설화에 의할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집단은 부여족 계통의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후 십제는 미추홀(현 인천광역시 일대)의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고 하는 시조 형제설화(兄弟說話)는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형제설화에서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연맹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든 무리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는 것은 그 후 어느 시기에 온조계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기는 초고왕(肖古王)이다. 초고왕은 정치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기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백제의 성장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발달한 한강유역의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 기반과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농업생산력의 증대 및 내륙 지방은 물론 서해안과 잘 통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 한강의 지정학적인 조건 등이 작용하였다.

 

이후 백제의 성장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연맹 내의 세력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지배력 강화는 우보(右輔)·좌보(左輔)와 같은 직에 지역 세력들을 임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외부 세력은 백제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중국 군현(郡縣)과 약탈적인 침략을 해오는 말갈(靺鞨)로 표현되는 예(濊)세력이었다. 백제는 이들과 공방을 치루면서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246년에 진한(辰韓)의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대방군(樂浪·帶方郡)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마한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목지국(目支國)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목지국을 제압하고 새로이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

 

그 시기가 고이왕(古爾王)대이다. 고이왕은 주변 세력들을 아울러 북으로는 예성강(禮成江), 동으로는 춘천(春川), 남으로는 안성(安城)·성환(成歡), 서로는 서해에 이르는 지역을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좌장(左將)을 설치해 병마권(兵馬權)을 장악하고, 좌평을 설치하여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금령(禁令)을 선포하고 솔계(率系) 관등과 덕계(德系) 관등을 토대로 하는 관제를 만들어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2. 한성시대

3세기말 4세기 초에 중국의 서진(西晉)은 ‘8왕의 난(291∼306)’이라고 하는 왕족들 사이의 반란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오호(五胡)]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에 위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백제는 낙랑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지만 책계왕(責稽王)과 분서왕(汾西王)이 낙랑 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책계왕과 분서왕의 피살을 계기로 초고왕계인 비류왕(比流王)이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은 김제에 대규모의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하는 등 수리시설을 확충시켜 농업경제력의 기반을 확대하였고, 활쏘기 연습을 장려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서제 우복(優福)주 01)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는 진씨(眞氏) 세력과 결합해 정치적 기반도 안정시켰다. 이 토대 위에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즉위하여 초고왕계(肖古王系)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하였다.

 

즉위 후 근초고왕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여 아신왕(阿莘王)대까지 진씨 왕비족시대를 열었으며, 귀족세력들의 상하 서열을 분명히 하기 위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역을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담로제(擔魯制)라 한다. 담로제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직접지배로 바뀌었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시키고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기반 위에서 근초고왕은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일본서기』신공기(神功紀) 49년(수정연대 369)조에 의하면 왜가 비자벌(比子伐)주 02)·남가라(南加羅)주 03)·안라(安羅)주 04)·가라(加羅)주 05))등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古奚津)주 06)에 이르고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주 07)를 정벌하고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伴古) 등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 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왜가 백제에 땅을 주었다는 것은『일본서기』편찬자의 왜곡과 윤색이 분명하다. 이 기사의 역사적 실상은 근초고왕이 가야지역으로 진출해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했다는 것과 전라도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남으로 영산강(榮山江) 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근초고왕은 남진해 내려오는 고구려세력과 대결하였다. 특히 371년(근초고왕 26)의 평양성전투(平壤城戰鬪)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어 수곡성(水谷城)주 08)까지 영역으로 하였다.

 

 

백제 초기의 대중관계(對中關係)는 낙랑·대방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근초고왕이 동진(東晋)에 사신을 파견하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의 작호(爵號)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조공(朝貢)은 한반도 내에서의 역학관계를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던 외교행위였다. 백제의 중국에 대한 외교는 지리관계상 주로 남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조(北朝)와의 교섭도 추구하였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삼국사기』에는 우호적이고 상호 원조하는 형태로 나온다. 이는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계 사람들이 왜정권(倭政權)의 핵심에 자리한 것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근초고왕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양국관계는 칠지도(七支刀)에 새져진 금상감명문에서 엿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을 후왕(侯王)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는 왜에 학술·기술 등 선진문물을 제공하였고, 그 대신 왜는 백제에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백제가 왜에 박사 왕인(王仁)을 파견하여『천자문(千字文)』과『논어(論語)』를 보내준 것은 전자의 사례가 되며,「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왜군이 백제를 도와 고구려. 신라군과 싸운 것은 후자의 예가 된다.

 

침류왕(枕流王)대에 와서 백제는 동진으로부터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를 예로써 맞이하면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불교 공인을 통해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확립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침류왕이 죽은 뒤, 동생 진사(辰斯)는 조카 아신(阿莘)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7년 뒤 아신은 숙부 진사왕(辰斯王)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왕족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의 배후에는 왕비족으로서의 진씨 세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진씨 세력은 군권(軍權)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공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고구려광개토왕은 적극적인 정복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신라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인 뒤 백제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58성(城) 700촌(村)을 점령당하고,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한반도에서의 세력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태자 전지(腆支)를 왜에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다. 또 고구려에게 빼앗긴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신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태자 전지를 지지한 해씨(解氏) 세력이 왕제 혈례(碟禮)를 지지한 진씨 세력을 누르고 전지왕(腆支王)을 옹립하였다. 해씨세력은 진씨를 대신하여 왕비를 배출하였다. 이로써 실권(實權)세력은 진씨에서 해씨로 교체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은 상좌평(上佐平)을 설치하여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게 하는 등 실권귀족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은 구이신왕(久爾辛王)대와 비유왕(毗有王)대에도 지속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매우 미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왕이 정복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천도를 추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장수왕은 대외 정복활동을 자제하였지만 427년에 천도를 단행한 후 남진을 재개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는 신라에 우호관계를 요청하여 비유왕 8년(434)에 동맹이 맺어졌다. 이 동맹은 백제가 주도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라동맹(濟羅同盟)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동맹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해 공동으로 방어하는 공수동맹(共守同盟)의 성격의 것이었다. 나아가 비유왕은 송(宋)에 사신을 보내 역림, 식점과 더불어 요노(腰弩)를 요청하여 받았다. 요노라고 하는 신무기의 도입으로 백제 무기체계를 새롭게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유왕은 흑룡(黑龍)이 사라진 후 죽었다는 기사와 무덤도 제대로 조영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상징해 주듯이 비명에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蓋鹵王)은 후반에 와서 실권귀족중심체제를 극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개로왕은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했으며,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전제화정책(王權專制化政策)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국가 재정을 탕진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북위가 군사원조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475년에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장수왕이 친히 거느린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도(王都)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백제는 웅진천도(熊津遷都)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웅진시대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劦滿致)·조미걸취(祖彌桀取)의 보필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으로 천도를 하게 된 데는 웅진 지역에 기반을 둔 백씨(白氏)세력의 도움이 컸다. 금동관, 금동신발, 장식대도, 중국제 청자가 다수 출토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백씨 세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천도 후 문주왕(文周王)은 왜에서 귀국한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책봉해 왕실의 안정을 꾀하면서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은 자체분열을 일으키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감으로써 대중국 접촉도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병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三斤王)을 세워 전권을 휘두르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해구의 반란은 덕솔(德率) 진로(眞老)에 의해 평정되었고 삼근왕도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에 진로는 왜에 있던 동성(東城)을 옹립하였다.

 

동성왕(東城王)은 비록 옹립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어려운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왕족인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면서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 신진 지방세력들을 중앙에 등용해 한성에서 내려온 기존 세력과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북위에 대해서는 위로(魏虜), 흉리(匈利)로 폄하하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동성왕은 19년(497)에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신진세력의 하나인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동성왕이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위세가 커지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동성왕은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를 가림성(加林城)의 성주(城主)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백가는 도리어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였다.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였다. 무령왕은『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무령왕릉지석(武寧王陵誌石)」과『일본서기』에 인용된『백제신찬(百濟新撰)』을 종합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모형이 된다. 즉위 후 무령왕은 먼저 백가의 난을 평정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단행하는 등 공세적 입장을 취하여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귀농(歸農)시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을 적극 개발해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에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였다. 나아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남원·하동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한성을 상실한 이후 축소된 경제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토대 위에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하였고 양(梁)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아 국제관계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령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4. 사비시대

웅진 지역의 지리적 조건은 방어하기에 좋은 요충지이나 한 나라의 수도로서는 협소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은 무령왕대에 이루어진 안정 기반을 바탕으로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를 이루기 위해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 지역은 금강이 감돌아 방어에 유리하고 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리한 곳이었다.

 

사비로의 천도는 성왕의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과 성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비천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으로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세력인 사씨 세력과 한성에서 남하해온 목씨(木氏) 세력 등이었다. 성왕은 사비에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축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시가지는 방리제(方里制)에 입각해 정비한 후 538년(성왕 16)에 천도하였다.

 

성왕 동상(충남 부여)

 

천도 후 성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제반 조처를 추진해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강화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모시박사(毛詩博士)·강례박사(講禮博士) 등을 초빙하여 문화의 질을 높이고, 선진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다. 그리고 중인도(中印度)로부터 오부율(五部律)을 갖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 백제적 계율종(戒律宗)을 설립시키고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중앙통치조직으로 좌평을 1품으로 하고 극우(剋虞)를 16품으로 하는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부사제(部司制) 등 중앙의 중요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수도의 행정 조직은 5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 아래에 5항(五巷)을 두는 5부-5항제로 완비하였고, 지방은 전국으로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郡)과 성[城: 현(縣)]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편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22부가 정치운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는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천도를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상류의 점령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히 고구려와 결탁한 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 신라의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양국 사이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원로 대신인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여창(餘昌)주 09)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백제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마침내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성왕은 신라 복병에 의해 사로잡혀 전사함으로써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士卒) 3만여 명이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에 나가 있던 왕자 여창도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관산성전투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기로들은 위덕왕(威德王)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해나갔다. 이로써 사씨·연씨·해씨·진씨 등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표현되는 가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실권귀족들은 좌평의 정원을 5명에서 6명으로 확대하여 6좌평회의체(六佐平會議體)를 최고 귀족회의체로 만든 후 정치운영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위덕왕은 10년(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陵寺)를 창건하고 여기에 사용할 도구의 하나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만들었다. 금동대향로는 성왕이 추구한 유교·불교·도교 삼교(三敎)의 공존과 상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20년(577)에는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이는 위덕왕이 초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왕권강화를 추구한 것을 보여준다.

 

 

법왕(法王)은 위덕왕대에 지어진 왕흥사를 국가적 차원의 사찰로 그 격을 높여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실권귀족들의 반대로 재위 2년의 단명으로 죽었다. 이에 실권귀족들은 익산(益山)에서 마[薯]를 캐며 살던 몰락한 왕족 출신인 무왕(武王)주 10)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 무왕의 출자에 대해『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지만『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지룡(池龍)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서동(薯童)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보면 그는 몰락왕족 출신이라 할 수 있다.

 

무왕은 귀족들의 정략적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진평왕(眞平王)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하였다.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빈번히 전쟁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결혼이 매우 설화적이라고 꼬집는 견해가 있다.

 

또 근래에 미륵사지서탑(彌勒寺址西塔)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나온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왕실과 왕실 사이의 결혼은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될 때 이루어진다는 점, 고대사회에서는 왕비가 동시에 2명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혼 시기는 신라진평왕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청군표(請軍表)를 쓴 608년 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왕은 익산을 경영하여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은 후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무왕은 제석사(帝釋寺)를 만들고,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무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겨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익산천도 계획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5. 멸망과 부흥운동

무왕은 재위 33년(632)에 왕자 의자(義慈)를 태자로 삼았지만 익산으로의 천도가 좌절된 이후 점차 환락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측근들이 권세를 농단하기 시작하여 정치정세는 매우 어지러워졌다. 무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의자왕(義慈王)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유교이념에 투철하였지만 친위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였던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유력 귀족 40여 명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미후성을 친히 공격하면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대외적으로 고구려·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는 등 압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15년 이후에 궁정의 측근세력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은고(恩古) 세력의 작동과 의자왕의 병환이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의자왕은 왕의 행동을 비판한 성충(成忠)을 투옥하여 죽이고 말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지배계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및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와 정권의 천단은 백제의 지배질서를 더욱 문란하게 하였다.

 

또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중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패배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이런 빈번한 전쟁은 국력을 피폐시키고 농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와의 결합을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신라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들어가 당태종(太宗)과 나당군사동맹(羅唐軍事同盟)을 맺었다. 나당연합군의 결성은 백제를 더욱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은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660년 6월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炭峴)을 무사히 통과하였고, 당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기벌포(伎伐浦)에 상륙하였다.

 

화급해진 의자왕은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출전하게 하였다. 비장한 각오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린 계백은 황산벌전투(黃山伐戰鬪)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전사하였고, 백강(白江) 하구에 상륙한 당군은 신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泗沘城)으로 진군하였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태자와 더불어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을 갔다. 이에 왕자 태(泰)주 11)가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민심이 동요하고 이탈자가 많이 생겨나자 당군에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을 지키던 방령(方領) 녜식(禰植)이 의자왕을 겁박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하였다.

 

백제부흥군의 중심 인물로는 정무(正武)·지수신(遲受信)·흑치상지(黑齒常之)·복신(福信)·도침(道琛)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661년 3월도침이 거느린 군대는 웅진강(熊津江) 전투에서 당군에 패배하였지만 복신의 군대는 1달 여 동안 지속된 두량윤성(豆良尹城) 전투에서 신라 대군을 격파하여 신라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후 복신과 도침은 중심지를 임존성에서 주류성(周留城)주 12)으로 옮긴 후 661년 9월에 의자왕의 아들 풍(豊)주 13)이 왜에서 귀국하자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부흥백제국이 성립되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후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을,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을 칭하면서 신라가 사비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당연합군의 지배지역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부흥군 지휘부 내의 내분과 암투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여 내사지성(內斯只城: 현 대전광역시 유성 등 금강 동쪽의 거점 성들과 거열성(居列城)주 14) 등 남방 지역의 거점 성들이 신라에 함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신은 풍왕(豊王)을 암살하려다가 도리어 풍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틈을 타서 나당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에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해 왜는 2만 7천명의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풍왕은 왜의 수군과 연계하여 백강과 주류성에서 나당연합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강구전투(白江口戰鬪)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과 4번 싸워 크게 패배했고 황급해진 풍왕은 일본 야마토로 철수하면서 복귀 했다. 곧이어 주류성도 신라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때 지수신은 임존성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로 망명하여 임존성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백제부흥군의 부흥전쟁·부흥운동은 끝을 맺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