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5]

자연정화 2018. 7. 28. 12:15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5]

 

“대륙백제의 몰락은 백제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성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공주 토착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었다”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는 위덕 태자가 신라 관산성(현 옥천 부군)을 공격하다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선왕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속죄의식으로 만들어 바친 향로”

 

AD 523년 무령왕이 붕어한 후 공주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군주를 잃어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옛 졸본부여 비류백제계 진씨 세력들은 무리를 지어 왜열도 대화왜로 이민을 계속하였고 공주의 토착인구는 계속 줄어가고 있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신왕으로 즉위할 즈음에는 이제 공주에 남았던 주력 세력들은 남부여계 족속으로 대화왜의 지명을 받은 비류계 진씨 왕이나 온조계 해씨 왕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다.

 

또한 임나지역 4현의 영유권 문제로 가야의 구형왕은 혼인 정책을 써서 백제와 등을 지고 신라와 정치적 제휴를 하자 백제, 대화왜, 가야의 삼국 혈맹관계는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백제를 응징하기 위하여 군사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신라는 이와 같은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의 기회를 포착하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남부여계 신세력파인 제26대 성왕(AD 523-554)이 등장하여 대륙백제의 영토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고구려군이 AD 523년 8월에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륙백제를 선제 공격해 왔을 때 좌장 지충에게 기병 일만명을 주어 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퇴시키게 하였다.

 

그렇지만 AD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새인 혈성을 함락시켜 버렸고 그 이후 3년간 백제의 대륙군은 고구려 군에게 계속 밀리다가 결국 AD 532년 대륙백제군의 대패로 대륙 기지를 거의 상실하는 위기에 이른다.

 

대륙백제의 몰락은 백제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성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흐트러진 민심을 새롭게 하면서 또한 공주의 기존 토착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AD 538년(성왕 16년) 수도를 부여 사비성으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과감히 바꾸었다.

 

이는 향후 남부여국이 백제가 부여의 후예라는 점을 천명하고 고구려가 차지한 부여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북진정책을 표명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왜열도 대화왜와는 직접적인 정치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갖추고 국정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AD 541년 대화왜에서 임나항을 임나일본부(그 당시 일본이라는 국호가 성립되기 전이었으므로 후에 일본서기를 개작할 때 일본을 추가해서 쓴 것으로 추정)로 승격시키고 길비신(吉備臣)을 초대 장관으로 파견하여 당시 임나항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여국 군령성주에게 임나항 관할권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남부여 측은 대화왜 정부에 뜻을 따를 의사가 없어 양자간 협상이 어렵게 진행되었으나 마침내 AD 544년 남부여국의 의사가 잘 반영되어 합의가 성립되었다. 즉 임나항의 통치권을 종전대로 남부여 측이 담당하고 낙동강 하류지역 신라와 안라(현 함안)간에 위치한 6성에 남부여군이 배치되는 대신에 임나항의 왜국 이민선의 출입을 보장하고 대화왜에서 파견된 임나 주둔군 500명에 대한 군사 보급을 남부여 측이 맡기로 하자 대화왜 정부는 길비신 등 파견 신하들을 즉시 왜국으로 소환하였다.

 

허지만 임나 지역을 놓고 주변국 신라, 가야, 대화왜의 정치 외교적 공방과 대립으로 성왕의 북진계획은 미뤄지고 있었는데 AD 548년 정월 고구려가 동예족을 앞세우고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해 오자 신라군의 이사부 장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패퇴시켰다.

 

3년 뒤 AD 551년 당시에는 고구려가 돌궐족의 침입으로 신성과 백암성이 포위되었고 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어서 이때를 노려 성왕이 직접 수만 병력을 이끌고 신라 가야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 지역을 쳐서 되찾았고 양군의 전투 공방 끝에 이들 백제군은 고구려의 하평양(대동강 유역)까지 진격하여 6개의 군을 회복하고 신라는 한강유역과 죽령 북방의 10개의 군을 얻는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신라의 융성(AD 553년)과 가야·임나의 멸망(AD 562년)

 

정치적 불안을 느낀 백제인들의 왜열도 이민이 본격화되자 남부여국은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었고 돌궐군이 물러난 후 고구려가 전열을 정비하고 영토 회복전을 개시하자 이런 국제정치 분위기를 타고 신라 진흥왕은 오히려 고구려와 손을 잡고 남부여에 도전하고 나섰다. AD 553년 조국애로 가득찬 화랑군을 앞세워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 이북의 백제영토를 공략하여 이를 탈취하니 옛 신라 서라벌 고토를 약 150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신라 세력의 약진에 남부여 성왕은 AD 553년 자신의 공주를 진흥왕과 결혼시켜 동맹을 맺고 신라와 굴욕적인 화친관계를 도모하였으나 진흥왕이 배신하여 고구려와 군사적 동조관계를 맺고 남부여국의 동북부 지방을 침탈하였다. 결국 성왕은 AD 554년 대화왜의 파병 지원을 받아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장군 가량(加良)을 대동하고 신라의 관산성(현 옥천 부근)을 직접 공격하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오히려 전사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민족 사학자가 주장하는 사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일본 나라현 호오류우지(法隆寺) 본존 동원(東院) 몽전(夢殿)의 구세관음 비불상(救世觀音 秘佛像)이 현재 알려진 대로 가공인물인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상이 아니라 백제 성왕의 얼굴과 몸을 표현했다는 것으로, 이는 신라 전투에 선봉에 선 태자가 신라 김무력 장군에게 포위되자 아들을 구원하려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아깝게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아들 위덕(威德)태자가 선친을 애도하면서 만든 등신불이라고 역설한다.

 

또한 불상과 함께 위덕 태자는 선왕을 추모하는 속죄의식으로 향로를 만들어 바치는 데 이것이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고분 옆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라는 주장으로써 우리는 이들 예술작품에서 웅혼한 백제 문화의 멋과 향기를 맛볼 수 있다.

 

한편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AD 555년 남쪽의 가야동맹을 와해시킨 후 AD 562년 고령에 있는 대가야마저 물리쳐 통합 귀속시켰고 같은 해 계속해서 임나항을 공격하여 이를 봉쇄하자 이로써 임나항은 응신 천황 도왜(AD 396년)이후 160여년 만에 왜열도 이민 출항기지로서의 역할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가야연맹 세력도 멸망하자 가야인들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선주세력이 있던 왜열도로 탈출해 나가니 왜열도에서 아야(安羅)씨를 이루었고 고대 백제인들과 함께 일본고대사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대륙백제의 멸망(AD 576년)

 

졸본부여계 웅진백제가 점차 한반도의 남부여국과 왜열도의 대화왜 정부로 양분되고 성왕 사후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은 채 백제세력이 약화되자 고구려의 평원왕은 이 기회를 타고 AD 572년 사위 바보 온달장군을 보내 대륙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온달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이 요서 지역의 갈석산을 빼앗고 요충지 유림관(현 북경 근처)마저 토벌하니 BC 18년에 세웠던 발해만 지역(옛 대방고지)의 고대 백제 영토는 약 590년만에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어서 AD 576년 북제의 종주국 역할을 했던 대륙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무너지자 이웃에 있던 북주의 무제는 이때를 노려 북제의 서경, 진주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여국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도 집권을 놓고 잔존 졸본부여계 진씨와 남부여족간의 내부갈등과 신라와의 전투에서 국력이 소진되어 대륙백제를 구원할 군사를 파견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북주의 무제가 계속하여 북제의 왕성인 업성을 공격하자 드디어 북제는 항복하여 북주와 통합되었다.

 

북주 무제는 이제 한반도 백제 세력이 더 이상 대륙백제에 대하여 관여할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산동반도에 있는 백제 식민지 세력마저 격파하자 이로써 남부여국은 대륙백제 관할 발해만 지역과 산동반도 모든 지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후 양자강 상하구에 위치했던 남쪽의 백제 식민지 성양군, 광릉군 역시 북쪽의 요서군, 진평군 백제 식민지의 상실로 이들과 서로 고립되어 분리되자 중국 남쪽에 위치한 진(陳)이 쳐들어와 이들마저 병합되자 대륙에 있었던 백제 식민지 세력은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중국 통전(通典)에서는 대륙백제에 대해 <성밖의 백제 잔류민들은 차츰 모든 기력을 잃고 돌궐족이나 말갈족으로 투항해 흩어졌으며 대륙백제의 왕 부여숭과 부여씨 군장들은 멸망해 버린 옛 영토로 돌아갈 수 없어서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