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7]

자연정화 2018. 7. 28. 12:21

잊혀진 제국 비류백제 [7]

 

남부여 다물군의 주역은 무왕의 조카인 임존성 성주 부여복신(扶餘福信)과 서부달솔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이었다. AD 661년 다물군은 진현성 탈환을 시작으로 하여 웅진 도독부 유인원 부대의 일부를 포위하여 전멸시켰고 승병장 도침(道琛)은 백마강 근방 주류성을 점령하여 부여 사비성과 웅진성 사이의 바닷길을 봉쇄했다.

 

이에 복신 장군은 주류성(周留城)을 임시 수도로 받아 잔존 성주들을 총집결시켜 우장군에 복신, 좌장군에 도침을 임명하여 다물군의 조직을 재정비했고 대화왜와 탐라 담로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한편 의자왕의 패배 소식과 당나라 포로로 끌려간 사실이 아스카 정부에 알려지자 제명여왕(의자왕의 누이)은 남부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즉시 수도를 아스카에서 큐슈 나대진(나노쓰, 현 후쿠오카)으로 천도하여 아들 중대형 왕자와 신라계 겸자련에게 군선제조와 출병준비를 진행시켰다.

 

 

AD 661년 복신 장군의 다물군이 왜 구원병과 함께 사비성을 총공격하였을 무렵 신라 무열왕도 이런 치열한 전투에 직접 가담하였다가 금마군(현 전북 익산)에서 전사하였고 또한 다물군을 지원하던 야마토 왜의 제명여왕도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지병으로 별세했다.

 

복신은 남부여 전역을 다물군이 거의 확보하게 되자 나라를 통솔 할 왕이 없음을 인식하고 사신을 왜열도 나대진으로 파견하여 의자왕의 아들 일궁부의 풍장이 신왕으로 오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일궁부의 풍장 군은 여왕의 뜻을 좇아 동생 부여용(扶餘勇)을 야마토에 남겨 자신을 지원하게 한 후 남부여국을 재건할 목적으로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남부여 국왕으로 다물군을 지휘하기 위해 귀국하게 된다.

 

한편 남부여 복신 장군의 다물군이 웅진성 좌우 칠갑산과 계룡산을 탈취하고 당군을 역포위하자 당장 유인원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당 고종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후 당군의 증원군이 제3차에 걸쳐 도착하여 웅진 도독부 구출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왜열도에서 귀국한 풍장은 왕위에 올랐으나 현지 사정에 어둡고 다물군의 장수들이 복신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제껏 영토회복 다물전쟁을 해 온 탓으로 풍장 왕의 군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자 왕권을 확보하려는 풍장 왕과 군권을 유지하려는 복신사이는 점차 금이 가고 있었다.

 

더욱이 모든 다물군의 신망을 받고있던 복신을 시샘하던 도침이 풍장 왕에게 붙어 그를 견제하자 복신은 곰나루성의 유인원과 밀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던 차에 도침을 반역혐의로 몰아 풍장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형에 처한다.

 

이런 불안한 정국 상황에서 AD 663년 큐슈 나대진을 출발한 군선 400척, 정병 2만7000명으로 구성된 야마토 원군이 도착하자 풍장 왕의 입지는 강화돼 이제 복신 장군을 다물군의 일선 지휘에서 후퇴시키려 하자 복신이 왕명을 거부하고 다물군을 계속해서 이끌려고 하니 풍장 왕은 복신 장군을 마침내 제거하게 된다. 이는 역사의 아이로니(IRONY)로써 풍장 왕을 남부여 왕으로 초청하신 분이 복신 인데 내부 지휘권의 다툼으로 인하여 거꾸로 풍장 왕이 복신을 죽이는 참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여성 탈환을 눈앞에 두고 다 이긴 전쟁에서 일사불란하던 다물군의 단합은 깨지고 엄청난 전력의 손실을 초래하였으니 이처럼 남부여 자체의 갈등과 분열로 다물 부흥운동이 다시 자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왜열도에서 온 풍장 왕이 등장한 소식을 들은 당고종은 이에 맞서기 위해 장안으로 데려 간 태자 부여융을 웅진 대도독 부여왕으로 임명하여 원군 27000명을 이끄는 손인사 장군과 함께 다시 보내자 남부여군들은 어느 편을 자신의 왕으로 모실 것인지 내부분열이 되어 정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풍장 왕이 복신 장군을 죽인 것에 배신감을 느끼면서 갈팡질팡하던 흑치상지 장군과 그 부하 장수들도 부여융이 상륙하자 전병력과 자기 관할 200여성을 들어 부여융 왕에게 바쳐 항복하였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 합세하여 AD 663년 8월 다물군의 본부 주류성을 총공격하니 성내 다물군은 흑치 장군의 이탈로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게 되었다.

 

이에 열세에 놓인 풍장 왕은 야마토 수군 400척을 출동시켜 백마강에서 당 수군 170척과 맛 싸우게 하였으나 급조된 야마토 군선들은 자신들의 것보다 거의 10배나 큰 당의 군선에게 화공으로 무참히 깨지고 4번에 걸친 해상전투에서 전멸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촌강(白村江) 해전이다.

 

 

주류성 항복에 이어 임존성에 주둔한 다물군의 남은 군대와 야마토 육군마저 당군의 포위속에 모두 전멸되자 3년 간 이어진 백제의 다물 전쟁은 끝나게 되었고 이로써 남부여국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AD 663년).

 

야마토 왜(大和倭) 일본국 변신

 

남부여국의 광복을 위해 다물 전쟁을 지원했던 대화왜의 부여용과 제명여왕의 중대형 황자는 다물군이 항복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야마토 군마저 패배하여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자 이제는 남부여를 지원한 대가로 나당 연합군이 이를 응징하기 위해 왜열도까지 공격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에 대마도, 일기도, 북 큐슈 축자 지역에 백제식 산성을 쌓고 방어군을 두어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노력도 병행하게 된다.

 

본국 백제가 이제 망하고 없으므로 왜열도 정부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정리하고 왜열도 내에 새로운 국가의 실체(Identity)를 이룩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정책으로 대두됐다.

 

그리하여 AD 668년 내란을 딛고 어렵게 천지 천황에 오른 중대형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신라계 구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대해인과 겸자련을 중용하였으며 AD 670년에는 국명을 백제인들이 왜지를 늘 불러 온 대로 ‘해뜨는 땅’, 일본(日本)이라 정하여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게 된다.

 

결국 일본이란 국호의 채택은 외교적으로 더 이상 한반도의 백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고 별개의 나라로 살아 남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고 이를 위해 AD 671년에는 전승국 신라와 당나라에 대하여 비단, 명주, 가죽 등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후 처리가 일단락 되었다.

 

그 후 일본에 와 있는 한반도 출신 가야인, 백제인, 신라인, 고구려인 등 여러 지역 출신들의 인화(人和)와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의 본토 출신지와 정치적 관계를 조명할 수 있는 모든 과거 역사기록을 없애기 위하여 즉 일본과 한반도 역사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하여 새로운 역사 국서를 기술하게 되는데 AD 720년까지 고사기, 일본서기를 완성시키게 된다.

 

 

특히 백제서기를 변조시킨 일본서기는 백제에서 온 초기 기록을 전부 말살하고 일본이 마치 처음부터 왜열도에서 독자적으로 생긴 국가인 것같이 위장하기 위하여 일본국이 하늘에서 천손이 강림하여 생성된 나라라고 서술하여 고대 한일 관계를 말살하고 새로운 신민(神民)사상의 역사관으로 대체한 최초의 역사 왜곡이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후 AD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삭제하고 왜열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일본의 모체가 되었던 비류 백제계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은 마치 자신의 역사인양 편입시켜 서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탄생이 원래부터 왜열도에서 일어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서기는 천손강림 설이나 고대 왕명 및 왕력의 연도 조작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도, 동일한 국가세력이었던 비류 백제가 역사적 시기만 달리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을 일본의 역사로 유리하게 채택하는 이중적인 역사왜곡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본식 역사해석으로 본다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러 왜열도에서 일본세력이 서진(西進)해온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전개 방향을 정반대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은 작은 의미로는 임나항(부산)에 대한 지배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은 AD 4C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비류백제의 가야, 임나등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역사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는 한반도와 왜열도에서 서로 지배하였다고 주장되는 동일한 지역 즉 서로 다른 역사 시기를 두고 공통으로 겹쳐지는(overlapping)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국내 사학계가 비류백제 등 고대 한국인들의 왜열도 진출을 밝히지 못하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것이 백제이고 한반도 안에서만 생성 원인을 설명하려는 기존 역사관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왜열도에서 고대 한국인의 영향 없이 저절로 일본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학계의 입장을 현재처럼 수용한다면, (다시 말해 고대 한일양국이 지역적으로 분리된 채 서로 아무런 정치적 연관 없이 독자적인 국가세력으로 각각 발전하였다는 종래의 학설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 마찰과 정치적 분쟁이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며 아마도 불행한 과거가 앞으로 계속 되풀이될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과거 19C말∼20C초 일본 정치가의 정한론 및 고토회복 주장, 일본 역사학계의 내선일체, 대동아 공영권 등 식민지 지배이론으로 합리화되었던 것이고 한일 간의 불행한 정치 관계를 낳았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몇 년 전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도 이러한 일제시절의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부활의지로 볼 수 있으며 일본을 재무장하려는 맥락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역사 왜곡 작업도 한국 등 주변국에 대한 영토 침탈을 합리화하려는 사전적 역사이론 작업의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일단 편입해 놓으면 장차 북한 정권이 붕괴 시 북한 지역도 과거 고구려 영토에 포함되었던 것을 감안하여 중국의 고토로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남겨두는 동시에 정치 외교적으로 자동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국가 전략의 한 수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금번 역사 기고를 통해 기존 한국의 사학계가 고대사의 경우 이를테면 한일 간의 역사 전개가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진행되었다는 역사이론에 대한 한가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일제가 심어 논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점을 일반 독자들에게 문제 제기하여 경종을 울리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과거 비류백제의 역사 현장에 있는 공주주민에게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싶은 진정한 의도도 있었다.

 

끝으로 북한의 파탄과 핵 개발로 인해 한반도 정세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황이 급변할 수 있는 또 다른 위기 국면에 빠진 이때 우리의 잃어버린 고대 역사상에 있었던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분석과 점검을 통해 유연한 대책과 해법을 찾아내어 주변국과의 외교 협력관계를 적절하게 이루어 냄으로써 21C 우리나라를 세계의 유력한 국가의 하나로 부상시켜야만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