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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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 의자대왕 왕자 부여풍장 천무천황 2

자연정화 2018. 7. 25. 13:30

29장. 의자대왕 왕자 부여풍장 천무천황 2

義慈大王 王子 扶餘豊璋 天武天皇 2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4746

 

[陵碑] 大海人天皇 [紀] 天渟中原瀛眞人天皇

 

부여풍장은 홀로 쓸쓸히 큐슈로 귀환하지만 이미 그의 큐슈 국왕 자리는 천지천황이 가로채서 오로지 고행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0년후 천지천황이 죽으니 천무천황은 위기를 모면하고 옛 장수들을 모아서 천지천황이 정한 새 천황 대우황자와 전투를 벌였다. 천무천황이 이겨서 마침내 일본천황에 즉위하였다. 그는 본래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장자였다.

 

부여풍장은 패장이 되어 전장을 떠나서 쓸쓸하게 큐슈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구주백제왕 자리는 이미 천지천황이 차지한 뒤였다.

 

부여풍장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록은 [일본서기]의 왜곡된 기록이고 이를 [삼국사기]가 그대로 옮긴 것이며 중국의 당시 기록에는 없다.

이때 많은 백제인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부여풍장은 다시 일본에 돌아와 백제 유민들을 선무하였고, 천지천황은 그 유민들을 전국에 분산 배치하였다.

 

663년에 천지천황은 눈에가시인 천무천황을 제쳐놓고,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동생인 선광善光에게 주었으며, 큐슈가 아닌 오사카에 살도록 하였다.

 

663년 6월에 제명천황이 죽고, 다음해 간인황녀도 죽으니, 천지천황은 두 사람을 합장하였다. 나라현 다카시奈良県高市郡에 있는데 월지강상릉越智崗上陵이며 45m 직경을 가진 원구이다.

 

667년 천지천황은 교토京都로 천도하고 대진궁大津宮을 쌓았으며 제명천황 서거후에 미루어 두었던 천황의 즉위식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고인대형태자의 딸 왜희왕倭姬王(629~698)을 황후로 세웠다. 통합을 내세워 반란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자신의 서자인 대우황자大友皇子(648~672)를 총애하여 천무천황의 딸인 십시황녀와 결혼시켜서 대우황자를 황태자급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부여풍장은 배반하지 못하도록 항상 가까이 두고 일을 부렸다.

 

천지천황은 일본 요지에 방어를 위한 축성을 하여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교토로 천도한 것도 당나라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671년, 천지천황은 병이 깊어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부여풍장을 시험하여 왕위를 이으라고 하였다. 왕위를 잇겠다는 욕심을 보이면 죽이려는 계산이었다. 부여풍장은 천지천황의 황후인 왜희왕을 천황으로 세우고, 천지천황의 총명한 아들인 대우황자를 황태자로 세우라고 말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당장 출가하여 중이 되어 천지천황의 극락왕생을 빌어주겠다면서 사지를 빠져나왔다. 그날로 부여풍장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절이 많은 나라현으로 떠났다.

 

천지천황이 교토에서 죽었다. 고분은 교토京都에 있는데 서명천황과 같이 하방상원분이다. 상원의 변경은 45m 하방의 변의 길이는 76m

 

천지천황이 죽자, 대우황자가 즉위하고, 반년만에 부여풍장을 죽이려고 조여왔다. 부여풍장은 급히 산을 넘어 동쪽으로 피하였다가 점차 사방에서 모여드는 지원 군대를 모아서 거꾸로 도성으로 진격하였는데, 대우황자를 일거에 무찌르고 일본천황이 되었다. 유명한 임신란壬申亂이다.

 

이때 그를 직접 도운 장수들은 구주백제 출신들이 많았고, 또 당시 큐슈의 성주들은 대우황자의 동원령을 거부하고, 전장에 달려오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부여풍장을 도왔다. 대우황자는 궁지에 몰려서 자살하였다.

 

천무천황이 된 부여풍장은 다시 나라현으로 천도하였다.

그의 능비에는 대해인황자大海人天皇라 하였고,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누나카하라오키노마히도天渟中原瀛眞人天皇라고 하였다.

 

아메天는 성이고 이름은 무武다.

대해인大海人은 바다를 주름잡았다는 뜻이다.

 

누나카하라渟中原는 모정왕茅渟王이라고 했던 무대왕이 도성으로 삼으려던 익산益山 지방과 관련되는데, 백제에서 그는 김제의 벽성避城(=碧城)에 도읍했다가 주류성으로 옮겼다. 누나渟中를 누나農難으로 발음하라고 720년에 기록한 것은 백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키노마히도瀛眞人는 영瀛이 대해를 의미하고 특히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동영東瀛을 의미한다. 마히도眞人는 마히도間人황녀처럼 어릴 때 왕자로서 붙인 이름이 된다.

 

천무천황의 황후는 천지천황의 딸인 지통천황持統天皇(645~703)이다. 당나라 측천무후와 동시대 인물인데 천무천황의 후사로서 유력했던 오오쓰황자大津皇子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묶어두고서 스스로 천황이 되었다.

 

천무천황은 교토로부터 다시 나라현으로 천도하여 기요미하라궁浄御原宮에 살았다.

고분은 아스카明日香村에 있다. 동서 58m, 남북 45m의 원형 고분이다.

그의 사후에 천지천황의 딸이자 천무천황의 비였던 지통천황이 통치하였다.

 

백제는 이렇게 초고대왕 이래 160년부터 의자대왕의 660년까지 500년간 일본을 통치하였다.

 

천무천황의 아들 사인친왕舍人親王이 720년에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남겼다. 이때 역사를 조작하여 뿌리인 백제로부터 일본의 호적을 파내버렸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었다.

 

조작이 너무도 치밀하여 일본인과 세계인을 1300년이나 속여왔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때로는 더 재밌기도 한 것이니 이제 일본 고대사는 중국의 삼국지보다 재미가 생겨났다.

 

진정한 민족의 자존심은 진실의 토양에서만 자라나며 거짓 위에는 열등감만 고이고 소아병小兒病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