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馬韓) / 목지국(目支國)
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目支)·백제(伯濟) 등 54개국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百濟)국이 마한세력을 통일했다.
개요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 [3]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역사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신라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6]에 세운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국처럼 북방계 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3세기 전반 마한소국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삼국지》에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고,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국이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국으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국과 연합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
문화 사회적 특징
마한의 문화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성곽은 없으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
청동기 유물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집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벽을 세웠으며, 문을 윗쪽으로 내었다.
옥을 좋아하고, 금, 은, 비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농업과 잠업에 힘썼다.
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마한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 지대에는 어업(漁業)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제정은 서로 나뉘게 되었다. 마한의 여러 국읍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사람을 각각 따로 두어 이를 천군(天君)이라 일렀다.
그리고 마한 여러 나라의 특별한 지역에는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매고 귀신을 제사하던 곳인데, 본래 이것은 단군설화에 보이는 신단수의 유풍을 받은 것으로서 만주 풍속의 신간(神竿)과도 같이 신역을 상징하는 것이며, 방울과 북은 신을 즐겁게 하는 악기였던 것이다.
이 신역에서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법률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던 곳인데, 이것 역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 그리고 천군은 종교적으로 보면 단군의 원류를 받은 것으로, 뒷날 향무(鄕巫 : 골무당 또는 단골무당)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이 밖에 마한에서는 연중행사로 5월에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여럿이 모여 주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수십 명이 같이 손발의 장단을 맞추어가며 추었다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남아있는 전라도 지방의 ‘강강술래’와 같은 노래춤 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한에서는 이러한 제삿노래를 10월에도 행하였다 하는데, 이는 상고 농업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행하여진 것으로 5월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이고 10월에는 풍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후하게 지냈다.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을 쓰고 곽(槨)[9] 은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도 모두 장사에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축을 순장(殉葬)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풍습은 뒷날 백제의 문화 기초가 되었다.
마한 54개국
마한의 인구는 큰 나라는 1만여 호 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라고 하며, 총 10여만 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추산한 총인구수는 약 50만 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감해국(感奚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건마국(乾馬國), 고랍국(古臘國), 고리국(古離國)
고비리국(古卑離國), 고원국(古爰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포국(古蒲國), 구로국(狗盧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구소국(狗素國), 구해국(狗奚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노람국(怒藍國)
대석삭국(大石索國), 막로국(莫盧國), 만로국(萬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모수국(牟水國)
목지국(目支國), 백제국(伯濟國), 벽비리국(辟卑離國), 불미국(不彌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운국(不雲國), 비리국(卑離國), 비미국(卑彌國), 사로국(駟盧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소위건국(素謂乾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신분활국(臣濆活國), 신소도국(臣蘇塗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신흔국(臣釁國), 아림국(兒林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염로국(冉路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원양국(爰襄國), 원지국(爰池國), 일난국(一難國), 일리국(一離國)
일화국(日華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지반국(支半國), 지침국(支侵國)
첩로국(捷盧國), 초리국(楚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치리국국(致利鞠國)
목지국(目支國)
삼한시대 마한(馬韓) 54개 소국(小國) 중의 하나.
개설
『삼국지(三國志)』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지국(目支國)은 초기 철기시대 이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 지역에서 형성, 발전되어온 토착 정치 집단의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 연맹체(小國聯盟體)의 중심 세력이었다.
자연환경
목지국의 위치는 인천,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 충청남도 직산(稷山), 예산(禮山), 아산만 일대 등지에 비정되기도 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전라북도 익산(益山), 금강 유역,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榮山江) 유역 등지에 비정되기도 한다.
또한 사료상 목지국이 웅천(熊川) 이남에 위치한다는 점, 그리고 대체로 북에서 남으로 나열된 마한 50여국 중에서 백제국의 여섯 번째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위치가 아산만 이남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이는 고조선준왕(準王)의 남주(南走) 기록이나 청동기 유물 및 고분군의 분포 상태 등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상호 결합하여 제시된 견해들이다.
형성 및 변천
목지국의 신지(臣智)인 진왕(辰王)은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서 진한(辰韓)·변한(弁韓) 소국의 일부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왕은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마한 소국 연맹체의 연맹장이 될 수는 없는, 정치 권력이 아직 미약한 지배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왕은 삼한 소국에 대한 통제권을 기반으로 한군현(漢郡縣)과의 교섭을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왕의 역할은 마한 소국들에 대해 상징적 대표권과 실질적 통제권 양자 모두를 지닌 것이었다. 이로 보아 진왕의 성격을 연맹체적인 지배권을 동반한 교섭 주도권, 조정권, 상업·무역을 둘러싼 진왕국연합체(辰王國聯合體)의 주도권, 교역주도권 등으로 파악한다.
목지국의 존속 시기 및 진왕의 지배 영역과 지배 성격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양하다. 목지국진왕은 삼한 전체를 통솔한 지배자라는 해석과 부족 연맹장(部族聯盟長)으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존재라는 해석, 3세기경의 백제고이왕(古爾王)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목지국 왕의 진한·변한 소국 지배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도, 이를 중국 군현(郡縣)에 근접한 한(韓)소국과 멀리 떨어진 소국 사이에 형성된 공납 관계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국 군현과의 교역 과정에서 경상도 방면의 일부 정치 집단들에 대하여 확립된, 마한 소국의 우월한 위치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목지국과 관련해서는 진왕 문제와 함께 그 중심 연대, 지배 영역, 지배 성격 등을 둘러싸고 아직 많은 쟁점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1∼3세기 진왕(辰王)의 성격 변화와 삼한 소국(三韓 小國)의 대외교섭」 ( 이부오 ,『신라사학보(新羅史學報)』창간호,2004)
▷ 『삼한(三韓)의 국(國)에 대한 연구(硏究)』 ( 권오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6)
▷ 『한국 고대(韓國 古代)의 생산과 교역』 ( 이현혜 ,일조각(一潮閣),1998)
▷ 「고고학적 측면(考古學的 側面)에서 본 마한(馬韓)」 ( 최몽룡 ,『마한백제문화연구(馬韓百濟文化硏究)』9,1986)
▷ 「목지국고(目支國攷)」 ( 김정배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1985)
▷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 이현혜 ,일조각(一潮閣),1984)
▷ 「준왕(準王) 및 진국(辰國)과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의 제문제(諸問題)」 ( 김정배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13,1976)
▷ 「목지국고(目支國考)」 ( 천관우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24,1979)
▷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 이병도 ,박영사(博英社),1976)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신채호 ,1931)
▷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三上次男, 吉川弘文館, 1966)
4~6세기 백제의 세력 및 활동
'홍익인간·인류공영 > 2)濊族,부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한(弁韓) / 구야국(狗邪國) (0) | 2018.07.26 |
---|---|
진한(辰韓) / 사로국(斯盧國) (0) | 2018.07.26 |
두막루(豆莫婁) / 부여[夫餘] (0) | 2018.07.25 |
갈사국(曷思國) / 부여[夫餘] (0) | 2018.07.25 |
동부여 [東夫餘] (0) | 2018.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