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辰韓) / 사로국(斯盧國)
출처 : 위키백과
진한(辰韓)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馬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모두 12개의 국가로 되어 있었으며, 사로국이 이들을 병합하여 신라(新羅)가 되었다.
형성
《삼국지》, 《후한서》 및 《후한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한은 중국 진(秦)에서 한반도로 옮겨온 유민인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이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원 거주민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의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辰王)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한의 진왕(辰王)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진한(辰韓)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 (i) "신수두"의 건설과 (ii)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i)해마다의 조알(朝謁)과 (ii)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로국(후일의 신라)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세력을 성장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진한 12개국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을 이루는 12개의 소국은 사로국(斯盧國)·기저국(己柢國)·불사국(不斯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염해국(冉奚國)·군미국(軍彌國)·여담국(如湛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우유국(優由國)이다. 이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의 규모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외에도 아래와 같이, 훗날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음즙벌국 : 102년 병합
압독국: 102년 병합
실직곡국 : 104년 병합
초팔국 : 108년 병합
비지국 : 108년 병합
다벌국 : 108년 병합
소문국 : 185년 병합
감문국 : 231년 병합
골벌국 : 236년 병합
경제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보리·기장·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였다. 철전(鐵殿)을 사용하여 주변국과 무역을 하였다. 성(城)과 울타리가 존재하였다.
사회
마한과 언어가 달랐다. 단, 양서 제이열전에서는 진한이 사용하는 어휘가 중국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한과 다르다고 해서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마한과 진한은 언어 자체가 다른 게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 땅에 중국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오기 이전에는 진한의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고 진한 땅이 본래 마한의 영토였던 걸 감안하면 진한의 토착민은 본래 마한과 언어가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풍속이 유순하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褊頭) 풍속이 있어서, 머리가 납작하였다. 남녀에 구별이 있다.
문화
수렵에 능하고, 가무를 즐겼다.
참고문헌
진수(3세기),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中 진한전 (辰韓傳) 및 변진전(弁辰傳) 〉
일연 (1281). 〈권제1 왕력 제일(王曆第一)편 진한 조(條)〉. 《삼국유사》.
김광, 《대동사강(大東史綱)》, 대동사강사, 1926
신채호 (1931). 〈제4편 제4장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조선상고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한" 항목
사로국(斯盧國)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집필(1995년) 김정학, 개정(2017년) 김병곤
진한 12국 중의 하나로 나머지 진한 소국들을 통합하여 고대국가인 신라로 발전하였다.
형성 및 변천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전」을 보면 오늘날 영남 일대에 진변한으로 통칭되는 총 24개의 소국명칭이 나열되어 있으며, 그 중에 사로국(斯盧國)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서기전 57년 혁거세는 조선 유민들로 구성된 육촌민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혁거세가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매우 자세할 뿐만 아니라 서라벌이라는 국호의 이칭으로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기록된 진한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이 바로 혁거세가 건국한 서라벌 곧 후일 신라로 발전한 소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사서에는 오로지 사로국의 국명만 소개되었을 뿐이므로, 사로국의 건국과 초기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삼국사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찍부터 일본의 사학자들을 필두로 국내의 일부 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불신론에 입각해 사로국 형성 기반인 육촌의 실재를 불신하거나 건국 기년인 서기전 57년을 후대의 조작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경주 일대에서 조영된 서기전 2세기대의 구정동, 입실리, 죽동리 유적들과 서기전 2세기말 ~1세기 초 전후로 비정되는 황성동, 조양동, 덕천리 등의 널무덤[목관묘] 유적들이 서북한 지역의 고조선 문화와 연계된다. 그런 까닭에 기원전 위만조선의 성립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 설치 이후 한(漢)의 지배를 피해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하한 조선 유민들이 경주 일대에 정착하는 와중에 사로국이 건국되었음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런 까닭에 후대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국가 기원이 조선 유민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라의 불분명한 건국 기년을 조선 멸망 이후 최초의 갑자년인 서기전 57년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경주일대에서는 2세기 중엽 무렵부터 덧널무덤[목곽묘]이 축조되는데, 덧널무덤은 시신을 이중으로 보호하고 더 많은 부장품을 넣을 수 있는 구조이다.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과 구어리 1호 덧널무덤처럼 지배층의 무덤에는 쇠로 만튼 창과 같은 무기나 도끼, 덩이쇠를 바닥에 가득 깔아놓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풍부한 부장품을 가진 유적들은 정치력은 물론 경제력과 군사력을 겸비한 정치 지배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더불어 사로국이 주변 소국에 대한 통합전을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의 소유를 반영한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전」이나 『진서』 「진한전」에는 280년대 진에 조공한 진한의 왕이 있는데, 이는 사로국왕으로 여겨진다. 대체로 사로국의 영토 팽창은 3세기 중후반대부터 본격화되어 울산 포항을 시작으로 동해안 방면의 우시산국(于尸山國, 울주)-거칠산국(居漆山國, 동래)-음즙벌국(音汁伐國, 안강)-실직국(悉直國, 삼척)으로, 이후 서북방의 압독국(押督國, 경산)-대구-선산-감문국(甘文國, 김천)-사벌국(沙伐國, 상주)-추풍령 조령과 골벌국(骨伐國, 영천)-조문국(召文國, 의성)-안동-영주-풍기-죽령 방면으로 진출했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이러한 대외 정복은 1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지만 3세기 중반의 사실을 객관적 시각에서 기록했다는 『삼국지』에는 사로국이 여전히 진한 12국 중의 일국에 불과하다는 기사와 상충되는바 오랫동안 불신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 기록의 기년을 조정하거나 통합된 다른 소국의 행적이 사로국의 역사로 편입되었다거나 벌(伐), 내항(來降), 토평(討平), 취(取) 등으로 구분된 다양한 통합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이해가 제시되고 있다. 최종적으로 사로국이 진한 제국을 통합하며 후대 신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삼국지
▷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신라왕권성장사연구 (김병곤, 학연문화사, 2003)
▷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이종욱, 일조각, 1993)
▷ 「사로국의 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이청규,『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6,2005)
▷ 「사로국의 발전과 국읍의 변모」(이형우,『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6,2005)
▷ 「사로육촌과 국가의 성립단계 시고」(강인구,『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학연문화사,1997)
우유국(優由國)
우유국(優由國)은 진한(辰韓) 12개의 소국에 속한 나라였다.
우유국은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에 있었다. 청도천은 우유국과 이서국의 부족국가를 탄생하게 하였다.
신라 금성을 함락직전까지 몰고간 강대한 이서국은 삼한시대 부족국가중의 한 소국이었던 우유국(優由國)이 이서국(伊西國)의 모체였을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서국은 지금의 화양읍 백곡을 중심으로 하였다.
우유국과 이서국은 왜와 교류가 있었고, 그들과 연맹하여 금성을 공략했다는 시각이 있다. 경주에는 왜 계통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우유국은 청도와 울진에 거쳐 있었다. 일본의 하타씨가 우유국 출신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울진 봉평비에 파단(波旦)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파단(波旦)은 일본식 발음이 "하타" 이며, 하타씨(秦氏)의 시조(始組) 설화와 연계되어 있다. 이 사실에 주목하여 울진을 하타(秦)씨의 근거지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청도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으며 옛이름은 이서, 대성, 도주 등이였다.
이서국(伊西國)은 삼한 시대에 있던 변진(弁辰) 계통의 부족국가로, 신라 초기에 복속하였다.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과 화양읍 일대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유례왕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금성(金城)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신라는 대병으로 막았으나 역부족이었으며 이에 위협당하고 있을 때 홀연히 이병(異兵)이 나타나 신라병을 도와 이서국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유례왕에 의해 신라에 점령당하고(서기 42년) 경덕왕때 대성군(大城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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