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한민족 고대사

➉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혼이 난 선비족의 정체

자연정화 2018. 8. 1. 07:33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➉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혼이 난 선비족의 정체

흉노에 이어 중국사의 중심에 선 선비족

 

출처 : 프리미엄조선 2014. 03. 24.

 

1. 선비족의 기원과 화북을 제패한 화려한 등장

 

몽골고원을 근거로 거대국가를 이루었던 흉노에 이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마유목민족이 선비(鮮卑)족이다. 선비족은 몽골-퉁구스계로 추정되는 유목민족으로, 몽골 동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나 몽골고원과 만주의 경계에 있는 대흥안령산(일명 선비산)에서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였다. 시라무렌강은 내몽골 적봉시 북부에서 발원하며, 바로 홍산문화지역의 중심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는 ‘호(胡), 선비족은 오환과 함께 ‘동호(東胡)’로 불린다.

 

선비족은 1세기초부터 흉노의 지배를 받았으나 흉노가 남·북 흉노로 분열하자 후한과 연합하여 북흉노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몽골고원을 차지해 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 AD 156년 ‘단석괴’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의 옛땅을 차지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선비는 동호의 남쪽 일파인 오환까지 통합하여 몽골고원-바이칼호-만주-오르도스 지역 일대를 장악하면서 최대 영토가 490만㎢에 달했다. 이때 선비는 중국(후한)을 침략하는 등 힘을 과시했지만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내몽골에서 할거했다. 대릉하 유역의 ‘모용부’, 시라무렌강 유역의 ‘우문부’, 그 남쪽의 ‘단부’, 내몽골 현 호화호특시 방면의 ‘탁발부’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후한 멸망 후 중국을 진이 통일했으나 ‘8왕의 난’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선비·갈·저·강’의 5개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지방에 각각 정권을 세웠다. “오호십육국” 시대(AD 304~439)로, 북방의 오호(五胡)와 한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135년 동안 흥망을 거듭했다.

오호는 다음과 같다.

 

① 흉노 분열 후 내몽골 지역에 있던 ‘남흉노’는 북쪽 선비 세력의 압력으로 황허강의 오르도스 지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만리장성 내 중국영역에 자리 잡았다. 남흉노의 직계 후손인 ‘유연(劉淵)’은 외척이 한나라 출신이어서 한나라 후예라는 명분으로 오호족 최초 정권인 한(漢·前趙)을 건국한다(AD 304).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의 아틸라’로 불리는데, 진나라 낙양을 점령하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인물이다. 당시 북중국을 장악한 흉노세력을 피해서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간 중국왕조가 동진이다.

 

② 전조의 유총 사후 흉노의 다른 계통으로 갈족인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고 전조를 멸망시켰으나 불과 20년만에 선비족 모용씨에게 정복당했다(AD 352).

 

③ ‘선비족 탁발씨 부족’은 내몽골 호화호특을 근거로 하다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하여 산서북부에 자리 잡고 시조 ‘역미’의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다(AD 310). ‘선비족 모용씨 부족’은 현재의 요녕성 창려를 근거로 만주 남부 요동과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모용 황’이 연국(燕國 : 전연·후연·서연·남연)의 기초를 다졌다(AD 337~438).

 

④ ‘티베트계 저족’은 감숙 남부와 사천 북부 산지에 근거하다가 ‘부홍’이 장안을 수도로 섬서 지역에 전진을 건국했다. 그후 국가기반을 확고히 한 ‘부견’이 모용의 지배지역을 모두 제압하고 북중국을 장악했으나 후대에 모용씨에 다시 자리를 내어줬다(AD 350~394).

 

⑤ ‘또다른 티베트계 강족’의 ‘요장’은 감숙성을 본거지로 하다가 ‘부견’ 사후 모용씨가 장악했다가 떠난 장안을 점거하여 후진을 세웠다(AD 386~417).

 

이처럼 왕국의 난립이 지속되던 대혼란기는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다시 통일됐다. 탁발부의 역사는 ‘역미’에서 출발해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고, 5대손 ‘십익건’이 부족통합과 국가정비를 이루었는데, 십익건의 손자가 태조 도무제 ‘탁발규’이다. AD 386년 즉위한 탁발규는 모용의 후연을 정복하고 위(북위)를 건국하였다. 탁발규는 주위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오르도스에서 몽골 남부를 세력 하에 두면서 후연과 맞섰다.

 

AD 439년 3대 세조 태무제(탁발도)가 화북을 통일하여 거대한 탁발왕국을 건설해 남쪽 중국왕조(송)와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탁발사-도-준-홍-굉-각으로 이어져온 선비족 탁발왕조는 그러나 북방민족의 기풍을 잃으면서 문약해졌고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마침내 550~556년 북제·북주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문제)은 북주의 군사귀족으로 한족과 선비족의 혼합혈통이다. 수에 이어 당을 건국한 당고조 이연도 마찬가지로 선비족 출신의 무장이다.

 

선비족 국가(왼쪽). 오른쪽은 프랑스국립 동양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3~4세기 선비족의 벨트 버클.

 

 

2. 기마군단 선비족이 건설한 국가들이 한민족 역사와 만난 현장

 

중국의 전국 7웅 중 패자인 ‘연’나라(오호 16국 시대 모용부의 ‘연국’과 다름)는 BC 300년경 ‘진개’를 앞세워 동호와 고조선을 공격했다. 중국은 전국시대를 진나라가 통일하고 한나라가 이어 받으면서 흉노정벌에 나섰으나 기마군단 흉노에 참패하고 오히려 흉노에 조공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서, 한나라의 변방국이 된 ‘연’에서 고조선 계열 인물로 알려진 위만이 고조선 일부(번조선)지역을 점령하여 위만조선정권을 세웠으나, (BC 194) 한과의 전쟁 끝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정책에 선비 모용부의 ‘연국’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고국원왕의 고구려는 연왕이 된 모용황의 침공(342년)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는 등 후연 시대까지 이들은 고구려 서북방 팽창정책에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시키고 대강국 고구려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광개토대왕은 5호 16국 시대로 불리는 북중국의 혼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국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북위가 통일을 이루고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자 장수왕은 남북조 등거리 외교로 고구려를 안정시켰다.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왼쪽부터).

 

고구려는 이후 선비인들이 건설한 수·당나라와도 국운을 걸고 싸웠다. 수 문제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강국부민 정책을 추진했으나, 고구려 침략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598년 문제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자, 양제는 전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13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살수에서 참패하고 평양으로 진공한 4만명 수군은 몰살되었다. 613년, 614년에 양제는 2·3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일으키나 또 다시 실패했다. 수나라는 결국 37년만에 문을 닫았다.

 

당태종 역시 북방산서지역 한족과 선비족 혼합혈통의 귀족집안 출신이다. 이는 당 또한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방민족이 중원에 진출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국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즉위한 후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두 번에 걸친 고구려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 후 3대 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했으나 신라가 당을 격퇴하고 이를 차지했다.

 

3. 기마군단의 역사속에서 비추어 보는 한민족의 고대역사

 

스키타이, 흉노, 훈, 선비 등 AD 5세기 이전에 유라시아대륙에서 활약한 기마유목국가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역사가 거의 없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정복 또는 침략당한 정주민의 기록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 기록에는 왜곡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마군단이 건설한 국가들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역동과 흐름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히 남아있다.

 

유라시아대륙의 기마유목민족이 건설했던 나라들은 민족이나 국경 개념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유목민족제국은 대부분 다수 민족의 부족 연맹체라 할 수 있다. 흉노제국은 알타이 부족 연맹체로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韓)민족계 등이 어우러진 혼성국가였다. 흉노란 제국은 있으나 흉노민족이란 없다. 또 선비란 민족은 있으나 선비라는 통일국가는 없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흉노제국을 그들의 초기국가라 하고, 몽골에서는 자기들의 고대국가라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한민족과 흉노의 관계를 언급하면 민족주의 과대 발상이라 하는 한국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한(韓)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다. 광활한 유라시아 동·서 스텝지역에서 오랜 기간 삶을 영위했던 기마유목민족의 면면한 DNA가 오늘날 한국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의 고대국가에서는 언어·관습제도 등 많은 부분에서 알타이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들이 알타이계의 부족연맹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다른 세상과 교류·협력했고 또 다른 세력과 투쟁하면서 살아왔는지, 고대 화려한 역사로부터, 어렵고 참담했던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우리가 묵도하는 기적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풀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흐름에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실존했던 고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데 대해서는 눈을 닫아버리고, 중국이 가져가는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인식을 닫아버려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