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한민족 고대사

⑲칭기즈칸, 9만5000명의 몽골군 이끌고 유라시아 초토화

자연정화 2019. 3. 26. 21:46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⑲

칭기즈칸, 9만5000명의 몽골군 이끌고 유라시아 초토화

세계국가 대몽골국을 건설한 몽골과 한민족의 역사적 조우

몽골제국이야기(下)

 

출처 : 프리미엄조선 2014. 09. 04.

 

1. 가공할 전투력 … 몽골의 기마군단

 

몽골의 기마군단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세계제국 대몽골국을 건설했다. 로마가 400년 걸친 세계제국 구축을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불과 25년 만에 해냈다. 13세기 초 몽골인구는 많아야 200만명 안팎으로, 칭기즈칸이 지휘한 몽골군 전체 규모는 9만5천명 정도였다. 그런데도 몽골 기마군단은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하여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 비밀은 바로 뛰어난 기동성이었다. 작지만 초원에서의 전투에 능한 조랑말을 앞세운 활동성, 활이라는 강력한 무기, 병사 스스로 해결한 식량 등의 병참체제, 여기에 효율적인 군사편제와 탁월한 군사전략, 정보전술 등이 더해져 최강의 군사집단으로 등장했다. 이런 몽골 기마군단 앞에 동서를 막론하고 수많은 나라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몽골은 태풍으로 일본정벌을, 열대밀림으로 베트남 정벌에 실패한 것 이외에는 대부분의 지역을 초단기간에 점령해버렸다. 기마군단의 위력과 관련, 전설적인 기록도 있다. 1126년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여진족의 금나라 기병 17명을 포위 공격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 그것이다.

 

①몽골 말 ②말안장 ③활

 

2. 몽골군의 한반도 침공과 고려의 항쟁

 

1231년 칭기즈칸을 이은 우구데이칸 때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다. 칭기즈칸은 한 때 맏아들 ‘주치’(후엘룬이 메르키트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와 낳은 아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차남인 ‘차가타이’는 주치를 ‘메르키트의 잡놈’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차가타이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고, 타협책으로 3남 우구데이가 대권을 이어 받았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집권하고 있었다. 과거 칭기즈칸 시절 몽골사신 저고여가 귀국 중 압록강변에서 피살됐었는데, 나중에 이를 구실로 삼았다.

그러나 고려의 항전은 만만치 않았다. 화의를 맺는 1259년까지 28년, 개경에 환도한 1270년까지 39년, 여기에 1273년까지 이어진 삼별초항쟁을 더하면 42년간 싸웠다. 다른 어느 나라와 달리 고려가 오랜기간 항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고려는 전통적으로 해상강국이었다. 고려 해군은 우수한 전함 건조기술과 해전능력을 보유했다. 고려 후기 최무선 장군(1325~1395)은 화약과 화기를 개발하고 화포를 전함에 장착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이것이 200년 후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한 절대절명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침공하자 강화도로 천도하고 산성을 쌓았다.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고려 해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빠른 물살의 강화해협, 넓은 갯벌 등 자연의 강력한 방어진지를 통과한 후 강화도의 산악지형에 삼중으로 쌓은 성을 공격해야만 했다. 여기에 백성들의 대몽항쟁이 계속되었고, 정부도 육지 전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어느 정도 확보해 항전을 독려할 수 있었다. 몽골로서도 금·송과 큰 전쟁을 하고 있어 고려 침공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몽골이 다른 나라와 벌인 전쟁과 비교해 볼 때 과연 몽골이 전력을 다해 싸웠을까? 만일 몽골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싸웠다면 그 결과는? 해전에 약하다는 점도 몽골과 같은 유목민(여진)이 세운 청나라가 병자호란(1636~37)때 강화도를 함락한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몽골은 다른 점령국은 초토화하거나 나라를 아예 없애버리고 직할령으로 했으나 고려에 대해서는 유례없이 국체를 유지하는 부마국으로 삼았다. 고려는 1259년 강화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130년 이상 존속했다. 이와 관련하여 원나라 역사(元史) 등에서 몽골의 고려에 대한 특별한 정서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3. 몽골과 한민족은 어떤 관계에 있나?

 

① 몽골등 북방민족들의 친연성에 대한 상호인식

북방기마민족인 선비(북위·연), 거란(요),여진(금,청)은 만주에서, 몽골(원)은 몽골고원에서 각각 발흥하여 당나라 이후 천여년 동안 중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배했다. 이들 북방민족간에는 혈통에 기인한 문화·관습·정서적 유대가 있다. 동북아 역사재단은「만주 그땅, 사람 그리고 역사」에서 “초원의 유목민족과 만주의 소위 반유목민족은 문화의 차이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국가 형성과정, 제국적 이데올로기, 국가의례, 그리고 한족을 통치하는 구조와 패턴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몽골인들의 선조로 알려진 실위(室韋)는 6세기경 중국사료에 나타나나 훨씬 이전부터 대흥안령 산맥에서 활동해 온 민족으로 선비계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 몽올실위가 10세기 이후 몽골고원 오논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원형을 이루게 됐다. 몽골의 원나라는 통치하는 주민을 1)지배민족인「몽골인」 2)위구르 등 준몽골인인 「색목인」 3)금나라 치하의 거란·여진·중국인 등「한인」 4)남송의 유민인「남인」등으로 나누면서 유목민족을 우대했다.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을 분리하여 격리함으로써 세력화를 막는 방어 전략을 썼다. 다음에 등장한 북방민족의 국가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의 통혼을 금지 시켰을 뿐 아니라, 심지어 만주 일대에 봉금 지역을 설치하여 한족의 이주를 막는 등 만주족의 발상지를 성지화했다. 이외에도 북방민족들 간에는 공유하나 한족과는 분명히 달리 생각하는 정서적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기록과 흔적이 있다.

 

② 단재 신채호가 본 고대북방민족과 한민족

단재 신채호 선생은「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我」의 동족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언어와 풍속을 연구한 결과 조선·만주·몽고·터키 등 4언어는 동어계이며, 4민족은 같은 혈족이라고 결론 내렸다. 조선·만주·몽고·터키·헝가리·핀란드가 3천년전에는 하나의 혈족이었으나 환경과 시대에 따라서 각자의 자성(自性)을 가지게 된 것이라 했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흉노는 옛 몽고 땅에서 목축을 하던 일종으로서 진한(고조선)의 속국이 되었다가, 진한이 쇠하자 자립하여 중국 전국시대말에 강성해져서 자주 중국을 쳤다라고 했다.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는 동국(東國)민족을 대략 선비족·부여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의 여섯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부여족이 단군의 자손들로 다른 종족을 흡수하여 동국역사의 주류가 된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은 몽골을 비롯한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③ 한민족과 북방민족에 대한 여러 기록과 견해

몽골-만주-한반도-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전학적으로 가까운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한국인의 70~80%는 북방계이고 나머지 20~30%는 남방계이며 기타 유럽인 등이 섞여있다는 연구가 있다(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 한국인의 주류는 바이칼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는 유전자를 분석한 연구도 있다(서울대 의대 이홍규 교수).

 

김운회 교수(동양대)는 초기 한반도 정착인들은 소수의 남방계로서 주로 해안을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한반도에 이주한 북방계는 주로 동몽골·만주에서 넘어와 소수의 남방계를 압도하고 한반도의 주류민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 선비족을 일컫는 ‘동호’는 예맥, 숙신과 넓게는 같은 개념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도 청나라 사절단 일원인 최덕중은 ‘연행록’에서 조선이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몽골과 군사연합을 맺어야 한다는 조·몽연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몽골 브리야트족은 자신들과 뿌리를 같이하여 바이칼에서 발원한 코리족의 일파가 동쪽으로 가서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믿는다. 바이칼의 브리야트족 마을에서 한국인과 가장 닮은 외국인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한국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필자가 수년전 바이칼을 방문했을 당시 이르쿠츠크 공항에서 한국사람으로 알고 인사를 건넸더니, 자기는 브리야트인으로 시의 공직자라고 하면서 그렇게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브리야트족은 바이칼의 브리야트 공화국을 비롯한 러시아에 약 45만명, 몽골 헨티주·내몽골 등에 약 5만명이 살고 있다.

 

박원길 교수(칭기스칸연구센터)는 고구려는 코리족이 남하하여 만든 국가로 몽골과 친연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한다. 그는 또 고대에는 우리민족이 동몽골에서 몽골족과 어울려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살면서 먼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한다. 이렇게 몽골과 우리는 오래 전부터 공유해온 친연성이 있다는 것이 문화·관습·정서 등 많은 분야에서 나타난다.

 

몽골 헨티에서 만난 브리야트인(위)과 바이칼의 브리야트족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