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한민족 고대사

⑳몽골에서 '티무르'와 인도 '무굴'로 이어진 칭기즈칸 기마군단의 전설

자연정화 2019. 3. 26. 21:51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⑳

몽골에서 '티무르'와 인도 '무굴'로 이어진 칭기즈칸 기마군단의 전설

 

출처 : 프리미엄조선 2014. 09. 30.

 

1. 몽골제국의 붕괴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4개국가 (ulus)로 나누어 통치했다. 중국 본토와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칭기즈칸 손자 쿠빌라이의「元」을 필두로, 칭기즈칸의 맏아들 ‘주치’와 그 아들 ‘바투’는 러시아 지역에서「킵차크칸국」을, 둘째아들 ‘차카타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차카타이칸국」을, 셋째아들 ‘뭉케’의 동생 ‘훌라구’는 페르시아·중동지역에서「일칸국」을 각각 지배했다.

 

3,000만㎢를 넘는 이 세계제국도 그러나 정치적 분열과 내분·봉기에 의해 차례로 쇄락의 길을 걷는다. 지도자의 리더쉽이 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마군단 국가의 전례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元」은 쿠빌라이의 전성기 이후 1330년을 전후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1368년「明」에 나라를 넘겨주고 몽골고원으로 쫓겨났다.「일칸국」도 1330년대부터 전쟁과 혼란이 이어지다 1353년 80년만에 막을 내렸다. 비교적 오랜기간 존속한「킵차크칸국」도 역시 내분과 피정복 민족의 반란 등으로 1480년 멸망하고 말았다. 동서교역로인 비단길에 위치한「차카타이칸국」은 유목민족이 주류를 이룬 데다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약하던 차에 권력투쟁으로 인해 혼란과 불안정이 지속된 결과 1334년 이후 분열되고 이에따라 비단길마저 차단 됐다.

 

몽골 제국 최대 영토./사진=몽골의 역사(동북아역사재단)

 

2.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제국을 재건한「티무르제국」(1370~1507)

 

혼란의 와중에 있던 차카타이칸국에서 1336년 ‘철의 군주’라 불리는 ‘아미르 티무르’가 사마르칸트 부근 케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몽골 귀족 바를라스계 가문으로 그의 선조가 차카타이의 통치에 대항하다 몰락하는 바람에 중앙아시아에 정착해 살면서 이슬람화 된 투르크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Rene Grousset는 티무르가 투르크 혈통이라 하나, 우즈베키스탄 학자들까지도 티무르의 혈통을 몽골로 보고 있다).

 

티무르는 천부적인 용맹과 지략을 바탕으로 어릴 때부터 부족간 투쟁이 지속되는 혼란속 전장을 전전하며 성장했는데, 몽골제국 재건을 기치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중앙아시아를 통일하여, 1370년 「티무르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무기는 천재적인 군사전략과 탁월한 리더쉽이었다. 그의 강력한 기마군단은 적지에서 치러진 총 170일간 전투에서 단 하루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33세 때부터 원정을 시작하여 34년간을 말 위에서 직접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그의 군대가 이동한 거리는 지구둘레에 해당하는 4만㎞에 이르렀다.

 

병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적에 따라 엄청난 전리품을 받을 수 있었고,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가족들은 평생 국가가 먹여 살렸다. 때문에 병사들은 티무르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따랐고, 그들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는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주민의 경제력을 통합하여 칭기즈칸 이후 최초이자 최후의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이란·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고, 남북으로 러시아 내륙에서 북인도까지, 동서로 중국변경에서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정복했다. 티무르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 수도 사마르칸트는 14세기 당대 최고의 도시로 발전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이 이루었던 실크로드의 대통일을 다시 이루기 위해 정복여정을 계속했다.

 

그는 실크로드와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1398년 북인도를 정복한다. 또 한편, 유럽을 초토화시키며 진격해 가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실크로드의 기능이 차단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티무르군은 1402년 앙카라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섬멸해 버린다. 이로 인해 유럽은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실크로드도 부활하게 됐다. 그는 연이어 실크로드의 또 다른 핵심 축인 명나라 원정에 나섰으나 1405년 병사하고 말았다.

 

티무르는 실크로드의 허브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동서교역로를 활짝 열기 위해 칭기즈칸에 이어 유라시아를 통일하고자 했으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크리시는 그의「오스만제국사」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알렉산더, 시저, 아틸라, 칭기즈칸, 나폴레옹 조차도 그와 비교할 수 없다고 까지 그를 높이 평가했다.

 

티무르 제국 영토(왼쪽)와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그의 무덤과 관련해 이런 일화가 있다.

1941년 스탈린은 티무르의 무덤을 찾아내서 그 유골을 모스크바로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학자들은 티무르의 무덤 ‘구르 에미르’를 확인하고 발굴하여 500년 만에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직후에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 스탈린그라드에서 6개월간 200만 명이 전사하는 대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 사령관 주코프는 티무르 무덤을 열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예언이 있었음을 나중에 듣고 스탈린에 건의해 티무르의 유골을 다시 무덤에 가져다 관 뚜껑을 닫게 했다. 이틀 뒤 러시아군은 밀리기만 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처음 승리했고, 결국 전승국이 되었다.

 

지금 티무르의 무덤은 사마르칸트에 보전되어 있고, 그 속에 그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지상의 모형 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지하에 있는 실제 관(사진)은 공개되지 않는다.

 

사마르칸트의 구르에미르(왼쪽)와 구르에미르 지하의 티무르 실제 관.

 

3. 인도를 지배한 기마군단(1526~1857)

 

몽골 고원에서 기원한 투르크 기마군단은 서진하여 11세기에 셀주크 왕조, 13세기에는 오스만 왕조를 세웠고 11세기초 이후 북인도에도 진출하여 왕국을 세웠다. 이후 북인도는 투르크계 노예 왕조, 할지 왕조 등을 거쳐 티무르가 한 때 정복했으나 16세기 초에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군주가 지배하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티무르 제국 멸망 후 중앙아시아 카불 지역에서 티무르의 5대손, 노마드의 영걸 ‘바부르’가 등장했다. 과거 티무르는 비단길과 제국의 보호를 위해 북인도를 점령하고 손자에게 물려준 적이 있는데, 1세기 후에 바부르가 조상의 연고권을 내세우면서 북인도 지역에 진출한다.

 

1526년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1만2천명의 기마군으로 코끼리 1,500마리를 앞세운 18만명의 술탄 대군을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하여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Mughul)은 몽골에서 온 사람들이란 페르시아어에 기원한다.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 이어 인도 땅에서 무굴 제국으로 역사에 재등장했다.

 

바부르는 몸소 전쟁터를 지키고 전투에 앞장서면서 기마군단 특유의 강인한 리더쉽을 발휘했다. 그는 편안한 잠자리를 거부하고 병사들과 야영하면서 동고동락했다. 눈과 폭풍속에서도 병사와 함께 했고, “친구와 더불어 죽는 것은 결혼식과 같다”고 까지 했다. 이러한 그는 유라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조를 세웠으나 사마르칸트에 진출해 티무르제국을 복원하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무굴 제국 영토(왼쪽)와 타지마할.

 

2대 ‘후마윤’에 이어 1556년 즉위한 3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과 북서부의 펀잡 지대, 인더스강 하류, 데칸 지역,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시크리」의 궁전 등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겼다. 4대 ‘자한기르’에 이은 5대 ‘샤자한’은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그 또한 사마르칸트를 정복하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올드 델리를 건설하고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오늘날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는「레드포트」,「자마마스지드」,「타지마할」 등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열네번째 아들을 낳다 죽은 그의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찬란한 건축물로, 뒤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황제가 시간에 마술을 걸려했다”고 읊었다.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후 1687년 데칸 지역을 완전 정복하여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무굴제국은 아우랑제브때 가장 큰 땅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수많은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고 비이슬람교도 차별로 제국이 분열된 상태에서 1707년 그가 원정 도중 죽자 후계 싸움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인도 지역에는 1498년 바스코다가마가 희망봉을 거쳐 캘리컷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영국·네덜란드·프랑스 등 유럽의 진출과 침투가 이어졌다. 1600년 동인도 회사를 세운 영국은 무굴 제국이 약화되는 18세기 이후 프랑스를 제압하고 식민지배 영역을 급속히 넓혀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1857년 무굴제국의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진 군대 ‘세포이’가 마지막 황제를 복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굴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인도를 차지했다. 이로써 12세기에 출범한 몽골제국은 티무르제국·무굴제국으로 이어지다 모든 흔적이 지워지게 됐다.

 

자마마스지드(왼쪽)와 레드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