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한민족 고대사

㉑신라 보검이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만들어진 사연

자연정화 2019. 3. 26. 21:57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㉑

신라 보검이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만들어진 사연

고대 한반도-유럽을 잇는 동서문명 대통로 '실크로드'

 

출처 : 프리미엄조선 2014. 11. 06.

 

1. 동서 문명 교역의 대통로 실크로드

 

고대로부터 유라시아를 연결하여 인간의 삶과 문명의 소통이 이어지게 한 교역로 또는 이동로가 있었다. 이를 광범위하게 일컬어「실크로드」라고 한다. 실크로드는 고대 동서문명을 연결한 대통로다. 수많은 민족의 삶이 흐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역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문화·문명이 교류하는 통로가 됐다. 이렇게 동서를 광범위하게 잇는 교역로는 크게 세 갈래로 볼 수 있다.

 

1) 먼저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넓은 초원지대에서 유목민이 이동하던 길로「초원길」또는「초원 실크로드」라 한다. 이 길은 가장 오래된 교역로로 역사시대 전에 주로 유목민이 이용하던 길이다. 동유럽에서 카스피해북안–카자흐초원–준가얼분지–몽골초원–대흥안령산맥–만주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이르는 이 길은 뜨거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 그리고 연간 강수량이 300㎜ 내외에 불과한 척박한 자연조건을 가진 곳이다. 이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스키타이 이래 흉노·선비·돌궐·몽골 등 기마군단이 바람같이 이동하면서 제각기 역사를 써 내려갔으며, 바로 이 길이 고대 한민족의 이동경로 및 활동무대와도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다.

 

여름의 몽골초원(위)과 겨울의 카자흐 초원.

 

2) 다음은「오아시스 길」이다. 이 길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서 육상교역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중국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로 동서교역로 중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험준한 산과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는「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야 하는 6400㎞에 달하는 길이다. 이곳에는 오아시스 도시들이 있어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교역로가 연결됐으며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은 전한시대 한무제가 북방의 흉노를 막고 서역으로 통하는 교역로를 개척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무제가 BC139년 서역으로 파견한 ‘장건’은 흉노에 붙잡히는 등 곤경을 겪다 14년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여행경험을 토대로 서역정벌을 계속하여 BC60년 흉노를 축출하고 서역으로의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이 길은 동서의 교역의 중심이 되었고, 당나라 시대(618~907)에 최대로 번성하면서 동서 무역과 문명교류의 핵심축으로 기능했다.

 

오아시스 길은 중국쪽에서는 대체로 ‘시안’(西安, 옛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텐수이를 지나 란저우를 만나게 된다. ‘란저우’는 간쑤성 성도로, 이곳에서 우웨이, 장예, 자위관을 거쳐 ‘둔황’에 이르는 길 1100㎞를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 한다. 하서회랑은 말 그대로 치렌산맥과 고비사막 사이에 있는 긴 복도와 같은 오아시스 길이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아 사막화 된 곳이 많은 지역이지만, 치롄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하서회랑의 저지대에 물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오아시스 지대가 형성되었다.

 

텐수이의 장터(위)와 란저우를 흐르는 황허.

 

둔황은 오아시스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심이다. 오호십육국시대에 한족의 국가 서량의 수도였고, 이후 북위·서위·북주·수·당·송·원 그리고 이어서 명·청이 차지했다. 둔황을 거쳐 톈산산맥을 중심으로 북쪽 기슭(준가얼분지 남부)으로 가는 길을「천산북로」, 남쪽으로 가는 길을「천산남로」(타림분지 북부)라 한다. 둔황을 거쳐 타클라마칸사막 남쪽의 쿤룬산맥 기슭으로 가는 길을 「서역남로」라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으로 가는 길은 서역 북로로 나중에 천산남로로 불렸다.)

 

명사산 월아천의 오아시스(위)와 실크로드 인근 지형 지도.

 

3) 가장 나중에 생긴 길이「바닷길」또는「바다 실크로드」다. 이 길은 1세기 중엽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술의 발달로 아테네-홍해-인도양-동남아-중국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되면서 중국, 동남아, 인도, 이슬람 상인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중세 이후에는 가장 활발한 교역로의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정화가 원정에 나섰던 길이기도 하다.

 

2. 실크로드에서 전개된 한민족의 역사의 흐름

 

초원 실크로드(초원길)는 고대로부터 스키타이를 비롯한 흉노·선비·돌궐·몽골 등 북방 기마유목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들은 대초원 지역을 종횡무진 누볐고, 이들이 세운 여러 기마유목국가가 흥망을 거듭했다. 바로 이곳에서 한민족도 오랜 과거로부터 삶을 개척해 왔을 것이다. 빗살무늬토기, 암각화, 고인돌, 고분, 청동기 등 수많은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특히, 오아시스 길이 열린 다음에는 한민족의 광범위한 세계와의 교류역사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민족이 가진 열린사회의 특징과 진취적 기상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5세기경 고구려 무덤인「무용총」벽화인 무용도는 인도로부터의 염색기법 전래를 말해주고,「쌍영총」벽화의 연꽃무늬는 불교전래,「각저총」씨름도는 서역인의 등장을 각각 보여준다. 또, 1965년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지역 중심지인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역에서는 아프라시압 궁전벽화가 발견된 바 있다. 이 벽화에서 보이는 고구려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고구려사신의 모습은 한민족의 실크로드 교류사를 웅변하고 있다.(3편 참조) ‘오르혼’ 강변에서 발견된 돌궐의「퀼테긴 비문」에도 고구려 사신에 대한 기록이 있다.(12편 참조)

 

백제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1971년 발굴된 25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공예, 벽화, 유리구슬, 금동대향로 등 수많은 유물은 동서교류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경우도 미추왕릉의 유리구슬목걸이, 황금보검이 그리스나 로마양식이라 한다. 원성왕 무덤의 무인석도 서역인 모습이다. 흥덕왕 때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을 내쫓고 바닷길을 평정하여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고려시대에도 개경외곽의 벽란도는 한·중·일 무역 거점으로 국제 무역항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처용가와 처용무의 ‘처용’도 페르시아나 아랍인이라 한다. 발해시대 유적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상인이 쓰던 은화와 기독교 영향이 보이는 불상이 발견되었다.

 

투르판의 동쪽 화염산 기슭계곡에 베제크리크 천불동이라는 유적이 있다. 이 석굴 중 하나에 한반도인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남아있다. 7세기 당나라 시절부터 지어진 이 석굴에 이미 한반도인들과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을 보여주는 유적이 있는 것이다.

 

투루판 인근의 베제크리크 천불동(위)과 천불동의 벽화.

 

신라시대인 723년경 혜초는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해로를 통해 인도로 가서 4년간 여행을 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30세 무렵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는 위대한 기록인「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책은 돈황의 막고굴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절벽에 492개 굴이 있는 막고굴(또는 천불동)에는 수많은 벽화와 불상이 남아있다.

 

청나라시대 어느날, 토사를 치우다가 갑자기 벽이 무너지면서 오늘날 17굴(장경동)이라 불리는 석굴이 하나 발견되었고 그 속에서 무수한 경전과 회화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프랑스·일본 등의 탐사대는 이들 유물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이때 프랑스 동양학자 ‘폴펠리오’가 가져가 오늘날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왕오천축국전」이다. 727년에 쓰여진 이 책은 필사본 1책으로, 인도와 서역 각국의 종교는 물론 풍속·문화 등에 관한 풍부한 내용이 실려 있어 동서문화 교류를 웅변한 고전 여행기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둔황의 막고굴(위)과 발견 당시 막고굴.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 장군은 실크로드의 개척자로, 동서문명 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중국이 중앙아시아 지역(서역)에 진출하는데 가장 기여한 인물을 꼽는다면 한나라의 반초와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라 할 수 있다. 당 현종시대인 747년 고선지 장군은 서역의 최대 장애물인 토번정벌에 나선다. 1만 군사로 구성된 결사대를 끌고 구차의 안서도호부를 떠나 서진하여 파미르고원을 넘어 힌두쿠시 산맥의 해발 4600미터가 넘는 탄구령을 돌파하여 토번을 장악한 것이다.

 

고선지는 그 후 안서도호부의 책임자인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되어 실크로드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파미르를 지배했고, 그때 실크로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751년 아랍의 연합세력과 벌인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후 안록산의 난 진압에 투입되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민족 출신 장군에 대한 거듭된 모함으로 755년 처형되는 최후를 맞는다.

 

한민족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오랜 기간 북방 초원길을 통해 기마유목민족들과 더불어 삶의 흐름을 이어갔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널리 바깥 세계와의 교류를 지속하면서, 열린 국가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고려를 넘어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문호를 열고 외부와 교류·협력·투쟁해 온 고유의 기개와 진취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나라마저 잃어버리는 극한의 상황까지 경험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는 달랐다. 새로운 한민족 에너지는 불과 60년 만에 대외를 향해 열린 세계국가를 다시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