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연수]
'포용 성장' 말고 대안 있나?
경제수치 3~4년 전보다 안 나빠..불평등 개선과 미래 대비가 과제
출처 : 동아일보 2019. 04. 04. 신연수 논설위원
한국이 드디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었다. 3만 달러는 보통 ‘선진국의 관문’으로 불린다. 2006년 2만 달러를 넘은 후 12년간 ‘중진국 함정’에 좌절했는데 결국 작년에 고지를 넘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이면서 3만 달러를 넘은 것은 세계 7번째이니 뿌듯해도 괜찮다.
그런데 경제에 대한 평가는 어둡기만 하다. 경제 전반이 안 좋고 일자리는 없고 자영업자도 힘들다고 한다. 지금이 특히 어려운 건가. 숫자로 비교해 보자. 작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7%로, 세계 성장률 평균(3.6%)에 크게 못 미쳤다. 이명박 정부 때 역시 2010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2∼3%대로 세계 평균 미달이었다. 마지막 해인 2012년은 2.3%로 작년보다 더 나빴다. 박근혜 정부 때도 세계는 3%대였는데 한국은 주로 2%대였다.
일자리를 보자. 취업자 수는 세대별 인구에 크게 좌우되니 고용률(15∼64세 인구 가운데 취업자 비율)을 보자. 고용률은 2007년 64.1%, 2012년 64.3%, 2018년 66.6%로 점점 높아졌다. 자영업도 비슷하다. 흔히 자영업자로 불리는 개인사업자의 폐업률(폐업 수/전년도 총수)은 2008년 17.5%, 2012년 16.1%, 2017년 13.8%로 점점 줄었다.
객관적 수치는 예전보다 나쁘지 않은데 왜 힘들까? 아마도 양극화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진다는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정책을 잘못 해서 경제를 망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소득주도성장과 친(親)서민 정책들이 되레 서민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대체로 첫째, 기업의 기(氣)를 살리고 둘째, 규제를 풀어 기업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법인세를 25%에서 22%로 내린 이명박 정부와 ‘손톱 밑 가시’까지 뽑겠다던 박근혜 정부 때는 성과가 좋았어야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때도 신통찮았다. 한국은 산업자동화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업이 투자를 하면 오히려 자동화를 통해 일자리를 없애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기업 투자라는 ‘공급 확대’만으로는 경제를 살릴 수 없는 시대가 됐다.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국제기구들은 최근 경제성장이 사회구성원 전체의 후생 증대로 이어지지 않고 성장의 과실이 상층부에만 집중되면 성장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WB),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모두 ‘포용적 성장’을 권한다.
포용적 성장은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불평등을 완화하고 약자를 포용해야 성장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경제이론들과 달리 성장과 분배가 상충하는 것이 아니고, 소득분배가 장·단기적으로 ‘수요 창출’을 통해 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소득주도성장과 통한다. 누진세 적용과 공정한 기업 경쟁 등이 권유되지만 구체적인 정책들은 각 나라 사정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요즘 한국 경제와 정책 방향을 놓고 논란이 많다. 그러나 저소득층에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사회안전망을 넓히며 기술과 인프라 혁신을 통해 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모호한 이론 논쟁을 반복하기보다 포용적 성장을 위해 한국 현실에 맞는 정책 조합을 갖췄는지, 부작용은 어떻게 보완할지 실질적인 내용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 생산적일 듯하다.
앞으로 연평균 2.5% 성장을 하면 2024년경에는 4만 달러(?!)가 된다고 한다. 4만 달러를 넘고도 “선진국이라는데 내 삶은 왜 팍팍하지?” 하는 상황이 안 되려면 지금 잘해야 한다.
[오늘과 내일/신연수]
反기업이란 무엇인가
‘반기업’ 이란 용어 잘못 사용…시장 감시하는 ‘경제 검찰’ 역할 중요
출처 : 동아일보 2019. 04. 18. 신연수 논설위원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의 독점적 지위 남용을 조사할 전담반이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안에 꾸려졌다. FTC는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처럼 기업들의 독과점이나 불공정 거래를 규제하는 기관이다. 윌리엄 바 법무장관도 “반(反)독점법 아래 어떻게 실리콘밸리 거대 기업이 존재할 수 있는지 많은 사람이 의아해한다”고 말해 IT 대기업들이 떨고 있다고 한다.
미 정부의 ‘기업 혼내기’는 역사가 길다. 석유재벌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을 반독점법으로 제소해 30여 개로 해체한 1900년대 사건이 유명하다. 현재의 엑손모빌 셰브론 등이 이때 분리된 회사들이다. 1980년대에는 통신회사 AT&T가 8개 회사로 분할됐고, 2000년대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정부 소송으로 해체될 뻔하다 간신히 모면했다.
소비자들의 집단소송도 기업들을 무척 괴롭힌다. 유통회사 타깃(Target)은 2013년 해킹으로 개인정보가 유출되자 피해 보상 비용만 2000억 원을 지출했다. 다우코닝은 1990년대 성형수술용 실리콘이 암을 유발했다는 의혹으로 집단소송에 휘말려 파산했다.
‘자본주의 맏형’인 미국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한국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반(反)기업 공산주의 정부라는 비난이 들끓을 것이다. 한국은 시장을 독점한다고 재벌을 해체한 적도 없고, 집단소송으로 기업을 망하게 한 경우도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기업의 천국이고, 한국은 기업 하기 힘든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의아하다. 미국에도 반독점법 등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이 “재벌 혼내주다 늦었다”는 말을 비롯해 기업에 대한 말로 종종 구설에 올랐다. 시민단체 시절에나 그냥 넘어갈 그의 말투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공정위나 금융감독원 같은 ‘경제 검찰’은 원래 ‘기업들을 혼내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다. 검찰이 제 역할을 해야 사회가 건강한 것처럼, 경제 검찰은 기업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건전한 기업들이 살아나고 시장경제가 꽃핀다. 대통령이나 경제부총리는 기업 기(氣) 살리기에 나서더라도 공정위와 금감원은 엄격한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맞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꽃이고, 기업들이 잘돼야 나라 경제가 잘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기존 기업들의 편을 들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게 친(親)기업은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지나치게 보호하면 새로운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막고 봉건적인 세습경제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
하청업체 착취, 일감 몰아주기, 제왕적 지배구조…. 시장에서의 공정 경쟁을 막는 이런 행위들은 규제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로 1000여 명이 사망해도 소비자들이 일일이 피해를 증명해야 하고, 회삿돈을 개인 돈처럼 사용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게 한국이다. 기업들이 좀 불편하고 불리하더라도 투명한 경쟁체제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친기업이고 친시장이다.
물론 경제는 현실이다. 기업의 투명성이나 지배구조를 개선하더라도 단칼에 혁명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은 한국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명확한 시그널을 주되 기업들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경기가 침체되는 상황에서 기업의 사기도 고려해야 한다. 경제 활성화와 구조개혁의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일은 원래 어렵다.
다만, 시장과 기업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 대해 “반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잘못된 비난은 그만하면 좋겠다.
[오늘과 내일/신연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사람의 생명, 돈과 바꿀 수 없어… 기업들 스스로 ‘산재 예방’ 앞장서야
출처 : 동아일보 2019. 05. 02. 신연수 논설위원
김용균 씨가 사망하기 전에는 몰랐다. 우리가 편리하고 값싸게 이용하는 전기가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지는 줄. 석탄가루로 앞이 안 보이는 화력발전소에서 김 씨는 안전장비도 없이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했다. 심전우 씨와 19세 김모 씨가 성수역과 구의역에서 세상을 뜰 때까진 몰랐다. 우리가 빠르고 안전하게 타고 다니는 지하철에서 그렇게 위험천만한 수리 작업을 하고 있는 줄.
우리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아닌가, 내 자식 같고 동생 같은 청년들의 죽음은 사실상 내 탓이고 우리 탓 아닌가,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값싸고 편리하게 사용하는 많은 것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이라는 희생 위에 가능했다. 이제는 좀 비싸게 주고 좀 불편하더라도 귀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그뿐이었다. 나 살기 바빠 그 일을 잊어버렸다.
지난주 고용노동부가 ‘김용균법’이라고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근로자의 안전에 큰 영향력을 가졌으면서도 그동안 책임에서 제외됐던 대표이사나 사업 발주자에 대해 산재 예방 의무를 부과하는 등 산안법을 실행하기 위한 시행령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업에 부담을 준다”며 반발했다.
특히 ‘(사망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거나 중대 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정부가 작업 중지를 명령할 수 있는 조항에 대해 남발할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중공업 건설업 등의 대형 사업장은 며칠만 작업 중지를 해도 수백억 원의 손실을 본다는 기사들도 나왔다.
사람의 목숨이란 모진 것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배가 고프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사고가 나도 공장은 돌아가고 매출이 늘어야 다른 근로자들도 가족과 함께 먹고살 것이다. 작업 중지의 구체적 조건이나 사업자의 책임 범위 등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조항들도 있을 테다.
그래도 상황이 이 정도면 정부가 나서기 전에 기업들과 경제단체들이 먼저 ‘산재 추방 운동’을 벌였어야 했다. 한국은 산재 사망률이 수십 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고 수준이고, OECD 평균의 4∼5배다. 단지 현장 근로자들의 안전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공사 발주자가 근로자들의 안전에 무심했고, 안전에 투자를 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례도 많다. 영국 호주 캐나다 같은 데는 안전조치가 부실해 근로자가 사망하면 기업과 기업인, 정부 관리자까지 징벌적 벌금과 징역형 처벌을 하는 ‘기업살인법’을 시행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지속가능경영’이 화두다. 대기업들은 불우이웃 돕기 등 사회공헌 활동에 연간 수백억∼수천억 원씩을 쓴다. 이런 활동도 물론 훌륭하지만 자기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하청 근로자들의 안전부터 보살펴야 한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기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업경영자들 같은 사회지도층이 할 일이다. 실제로 근로자들의 안전과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서 경영 성과도 좋은 기업가가 많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시장논리가 경제영역을 넘어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클럽 ‘버닝썬’ 사건으로 젊은 아이돌들의 왜곡된 성(性)의식이 도마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승리가 투자자들에게 성접대를 한 의혹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20대의 젊은이조차 성접대를 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격과 목숨보다 돈을 더 중하게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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