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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세견전도(朝鮮國細見全圖)
染崎延房,1873年,100.5×71.5cm.
명치초기의 대외적 침략주의는 대내적 문명개화와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양자는 모두 외국사정의 이해와 조사를 요구했다. 한국에 관한 최초의 조사작업 중의 하나는 지세 파악과 지도작성이었다. 명치유신 벽두부터 발생한 조선과의 외교 마찰과 이에 대한 반응의 하나이기도 한 정한론은 조선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켜, 조선의 지도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양으로부터 갓 배운 측량술을 이용해 근대적 지도를 작성하는 데에는 조건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수요를 충족시키는 손쉬운 방법은 일본에 전래되어온 조선의 고지도를 복제하는 방법이었다. 이 <조선국세견전도>는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당시의 여러 조선지도들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창한 작품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조 전기에 제작된 지도가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그 곳에서 모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지도는 江戶?府시대의 일본증화의 전통 속으로 녹아들어, 지도의 본래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미술적 장식품 노릇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지도를 편집한 染崎延房(1818∼1886)은 원래 대마도 출신으로서 강호에 올라가 작가로서 활약하던 사람이다. 爲永春水(二代)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진 그는 1875년 東京繒人新聞에 입사하여 많은 읽을거리를 써냈다. 『北雪美談』과 『時代鏡』은 그의 대표작이다.
본 지도의 跋文에서 그는 지도의 내용을 자세히 알려면 부록 『朝鮮事情』 두 권을 읽으라고 하였다. 두 권의 소책자는 지도를 제도한 석총녕제(石塚寧齊)의 삽화를 이용하여 조선의 역사·풍속과 인구 및 경제 통계, 그리고 도로 이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대마도의 통역관 小田幾五郞이 1794년(正祖 18) 조선의 역관에게 질문하여 알게 된 조선의 사회·문화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간행한 『象胥記聞』을 染崎가 발췌하여 요약한 것이었다. 정한론이라는 긴박한 시사문제를 위하여 80년이나 된 자료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染崎의 설명을 보면 <조선국세견전도>는 그가 " 그 나라의 象官에게 전국지도 한 폭을 부탁하여 모사한 것을 비장(秘藏)해오다가 " 서적상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이를 인쇄하여 간행하게 된 것이다. 이 지도를 대마도 종가에 전해오는 조선지도와 비교한 앵정의지(櫻井義之)의 해제에 의하면, 임란 무렵에 대마도의 영주 宗家에서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기증한 조선 전국도의 부본이 종가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이를 다시 축소(縮小)하여 모사한 것을 染崎가 소장하고 있다가, 정한론이 비등하던 시기에 石塚寧齊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細見全圖라는 말은 막부시대 일본의 지역별 지도 제목에 흔히 쓰이던 말이다. 비슷한 제목과 비슷한 화풍으로 그린 일본의 지도들 사이에 들어갈 때, 題字와 함께 이 지도의 색채는 그냥 일본의 한 지역 지도처럼 보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정한론 시기에 널리 보급된 林子平의 지도와 여기에서 비롯하는 조선지도들은 위도선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 지도에는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세밀하고 큰 염기의 지도나 작고 간단한 임자평 계열의 지도나 한반도의 윤곽선은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 대마도 종가의 조선지도 모사본이 한편으로는 染崎의 지도를 낳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林字平에 의해 책자의 삽도용으로 축소되고 간소화되고 위도선이 가해져 다른 모습으로 남게 된 것일 가능성은 검토해 봄직하다.
-영남대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