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동부여지도(亞細亞東部輿地圖)
木村信卿,1874년,91.8×137.5cm.
명치유신으로써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북해도·유구 등을 영토에 편입시키는 데에 힘쓰는 한편으로 조선이나 대만을 넘보게 되어 征臺論이나 征韓論을 일으킴으로써 침략주의를 국민적 합의로 몰아갔다. 침략주의는 당연히 이웃 나라에 대한 정보 확보를 서두르게 하고, 정보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것은 지리적 정보였으며, 지리적 정보는 지도로 표현하게 되어 있었다.
이 무렵 인접국가(隣接國家)의 지리와 군사를 중심으로 한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힘썼던 것은 참모본부였다. 조선에 대한 참모본부의 공작은 <조선전도>(1876)와 『조선지지략』(1888) 으로 결정을 이루게 되지만, 참모본부의 활동은 조선뿐 아니라 청국·캄차카·사할린·만주·중국 연해·태평양제도를 포괄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어서 참모조직은 1871년 병부성에 설치된 육군 참모국에서 비롯한다. "기무밀모에 참획(參劃)하고, 地圖政誌를 편집하며, 아울러 間諜通報 등의 일을 관장한다."는 것을 임무로 한 참모국은 1873년 병무성이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됨에 따라서 육군성의 第六局으로 재편되었다가 1874년에는 다시 참모국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육군성의 참모국은 1878년 12월 다시 參謀本部로 개편된다. 참모조직이 제6국이던 1873년, 제6국은 장백산이 국방의 제일선이라는 주장에 따라 미대청원 중위를 청국에 파견한 바 있으며, 1874년에는 大原里賢 대위 외 7명의 첩보장교를 청국에 파견하여 인접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1874년(皇記 2534) 10월에 육군 准參謀 木村信卿 小佐의 이름으로 간행된 이 <아세아동부여지도>는 발간시기로 보아 大原里賢 등의 활동 결과를 긴급히 정리하여 제작한 지도로 보인다. 이 지도에 표현된 지역은 예부터 하나의 단위로서 지도화되어 온 지역이다. 그러나 한국·일본·중국에서 그린 이 지역 지도는 일종의 세계지도였다. 옛사람들이 천하 또는 세계로서 파악하던 이 동아시아 지역이 이제는 제국주의국가 일본이 관심을 갖는 침략 대상으로서의 지구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지형 표시에 있어서 고저는 羽毛로써 표현되어 있으며 경위선도 있지만 경도는 동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서울은 대략 서경 12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경을 기준으로 경도를 계산하고 전설상의 천황을 기준으로 한 연호, 즉 皇紀로 지도 제작시기를 표시한 점 등을 볼 때 문명개화·탈아인구의 기치 아래 근대식 군대를 만들어 나가던 당시에도 여전히 일본중심주의가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를 竹島로 기록하였으며, 獨島를 지나치게 크게 그려 놓고 거기에 松島라 써 놓았다. 동아시아를 한 장의 지도에 담은 대축척 지도이면서 울릉도 뿐만아니라 독도도 이토록 크게 표시된 점이 군사지도로서의 성격을 보인다. 한반도는 함경도 북부가 지나치게 북쪽으로 뻗어나간 것으로 그렸으며, 전라도의 서부 해안이 동쪽으로 들어와 군산이 전주가 있음직한 곳으로 밀려 있어 장항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이러한 왜곡(歪曲)은 특히 1880년대의 민간 지도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는 잘못 그린 서양지도를 무비판적으로 따른 결과일 것이다.
삽도로는 東京略圖·西京略圖·大阪略圖·北京略圖·上海略圖·廣東略圖 등이 동판화로서 삽입되었다. 江戶로의 천도(遷都)가 이루어진 직후에 지도가 제작된 만큼, 옛 수도인 京都는 西京이라 기입하였다. 동아시아를 그린 지도이지만 여기에 나타난 일본의 모습은 국토지도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도뿐만 아니라 아이누족의 땅인 북해도와 유구가 영토로서 편입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시사적사건이던 시기에 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도는 소축척의 지역지도와 대축척의 도시도에 그치지 않고 청국 각 성에 관한 기본적 통계를 제시하였다. 외국에 관한 기본 자료조차 보급되지 못했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 준다 하겠다.
-영남대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