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金文)이란 청동기로 만든 제기, 농기구, 무기들에 새겨진 옛 글, 즉 원시 상형문자를 말하는데, 지금까지 중국의 한자로만 알았던 이 글들의 뜻과 발음이 놀랍게도 우리의 소리 말에 의해서 비로소 정확하게 풀이된다고 소남자 선생은 말한다. 최초에 신농계(神農系)의 발음은 배달국과 같은 본음(本音)이었고 황제계(黃帝系)는 지방 사투리에 해당하는 변음이었으나 역사가 흐르면서 식민지 지배계층인 동이 배달족이 토착화되면서 변음이 본음으로 바뀌어갔다. 중국인들이 신농 당시의 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본음에 해당하는 배달한국의 소리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금문은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대행산 이동지역과 황하의 북쪽, 흥안령 이남과 요령지방 그리고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흑룡강과 두만강 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인 밝해 연안의 것들은 은나라의 것들보다 연대가 훨씬 더 오래되어 갑골문이 본래 동이족의 문자였음을 알게 한다. 즉 ‘금문(金文)’으로 부르고 있는 원시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동이(東夷)의 말과 뜻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부사년(傅斯年)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최근 산동, 강소, 안휘성 등지에서 발굴되는 고쥬신식[古朝鮮式] 분묘(墳墓)들을 근거로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족이 세운 나라”라고 학계에 보고하였다. 또 『만성통보(萬姓通譜)』에도 “은상(殷商)은 단백달(檀伯達)의 후예”라 기록하고 있으니 박달[밝달]과 단백달은 같은 뜻이 아닌가. 심지어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사마천의 『사기』조차도 “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화족(殷曰夷周曰華丈云東曰夷西曰夏)”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설명한 서한사(西韓史) 가운데 상고사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배달한국의 우사부 장관이며 태우의 한웅의 막내 황자인 태호 복희가 화족 정벌군을 이끌고 서녁[西進]으로 나아가 화산족의 반란을 평정한 후, 그곳에 나라(分國)를 세웠다. 복희는 진(陳,지금의 河南省)에 도읍하고 본국의 승인을 얻은 후 총독(總督)의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다. 그는 치세 중에 팔괘(八卦)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고, 혼인법을 제정하여 인륜의 도를 밝히는 등 화하족을 문명으로 이끄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복희가 붕(崩)한 후 여와[女휶]가 뒤를 이었고, 왕위는 공공씨(工共氏)를 거쳐 15대 무회씨(無懷氏)에 이르렀다. 이때 신농씨(神農氏)가 일어나 복희의 나라를 치고 도읍을 진(陳)에서 산동성의 곡부(曲阜)로 천도하여 다시 8대를 전하다가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헌원(軒轅) 황제에게 망하고 만다.
이상이 한국과 중국 상고사의 핵심 내용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간행된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를 통하여 같은 맥락의 역사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상고금문(上古金文) 연구에 자신의 전생애를 바친 낙빈기는 신농과 헌원을 동시대의 사람들로 보고 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농과 헌원이 서로 겹겹사돈간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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