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제2장 한웅시대-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 ④

자연정화 2012. 8. 13. 17:07

출처 : 다물넷


제2장 한웅시대-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 ④



배달한국 제13세 천황 사와라 한웅
[倍達桓國 第13世 天皇 斯瓦羅 桓雄]




개천(開天) 1124년(정미년) : B. C 2774년 사와라 한웅께서 천황에 즉위하셨다. 「삼한관경본기」에 이르기를 “천황은 즉위 초에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을 여(黎)라 하고 단허(檀墟)의 왕으로 봉한다는 칙명을 내리셨다. 여씨(黎氏)가 임지의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리니 영토가 점점 넓어지고 주위의 소국의 왕들이 감동하여 스스로 찾아와 방물을 바쳤다. 이때 천여 명의 사람들이 귀화하여 왔다.”고 전한다.

여(黎) : 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의 서남에 여주(黎州)의 옛 나라 여국(黎國)이 있다. 이곳은 먼 훗날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색불루(索弗婁) 단군(檀君) 때에도 여파달(黎巴達) 장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여국을 일으켜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쥬신의 변방지역으로 분쟁이 많았던 곳으로 보인다.

동이문명은 지금으로부터 9000년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웠다. 만주 적봉시(赤峰市)의 오한기흥융와(敖漢棋興隆쾡)로부터 연산(燕山) 남북을 중심으로 발전한 홍산문화(紅山文化) 등이 동이문명에 속하는 흔적들이다. 그밖에도 산동성(山東省)의 후리문화(后李文化)를 비롯하여 북신문화(北辛文化) 등도 동이문명이 남긴 발자취이다.

이들 문화권에서는 동이문명 9000여 년의 역사를 증명하는 유물·유적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출토되고 있어 전설 같기만 했던 신시 배달한국의 실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배달한국의 홍산문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의 흥융와문화(興隆쾡文化)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 그리고 하가점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연결되는 대표적인 유적지로, 지난 1993년 8월14일 적봉시에서 열린 ‘중국북방 고대문화 국제학술연구회’에 참가했던 세계 11개국 100여명의 학자들로부터 전세계 최초의 문명이라고 공인받은 바 있다.

신시 배달한국의 초기 정착지인 지금의 내몽골 일대 하가점 하층문화는 최근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B. C 2400년으로 올려보고 있으며, 홍산문화의 경우 동일한 측정법에 근거하여 B. C 3000년경에 이미 청동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공식적인 보고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 동이문명의 역사 연대가 이집트나 바빌론문화보다 약 2000년을 앞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홍산(紅山)은 적봉시의 북쪽 교외에 있는데 산 위의 암석이 온통 붉은색이어서 홍산으로 불린다. 유적이 발견된 이곳은 요령성과 내몽골 그리고 하북성의 접경으로 옛날 치우천황의 배달한국과 불쥬신[卞朝鮮]의 중심지역이다. 이곳의 문명은 화산(華山)에서 기산(箕山)에 걸쳐 형성된 소위 중국의 한족문화(漢族, 中華文化)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우리 한민족(韓民族)만의 독자적인 문명으로 인정받았다.

홍산문화의 중심인 적봉에서는 배달한국[倍達桓國]과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다량의 농기구, 각종 식기, 화려한 무늬의 옥공예품 그리고 동물들의 뼈를 가공하여 만든 장식품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갈색 빛의 아름다운 토기들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데, 토기의 밑부분에 그릇을 제조할 당시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편직물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이미 높은 수준의 편직물 의상을 입었음을 보여준다.


동이민족 문명의 발전사

그동안 한국의 교단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 식민사관 추종자들에 의하여 우리의 역사 교육은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서양의 로마제국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중국대륙에서 영웅호걸들이 출현하여 천하를 쟁패하고 있을 때 한민족의 시조들은 이제 겨우 알속에서 태어났다고 배웠다. 게다가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단군조차도 곰이 둔갑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인식하에서는 민족의 6천년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무엇이 역사적 진실인지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59년 중국 산동성 태안현(泰安縣)에서 역사를 뒤흔들 놀라운 고대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른바 대문구유적(大汶口遺跡)으로, 시기는 대략 4300여년 전, 범위는 산동성 태산지역으로부터 중부를 거쳐 강소 하북(江蘇 河北) 일대에 분포되었다.
이곳에서는 밭갈이에 필요한 각종 삽과, 노루 뿔로 만든 낫 등을 비롯하여 농산물 생산에 필요한 각종 공구들이 다량 출토되어 당시의 농업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발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당시를 원시사회로 주장해왔던 학자들은 그들의 오판을 인정하고 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이 지역이 바로 우리 동이민족들의 생활터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문구유적은 목축을 주로 하던 우리 동이민족이 일단 정복지에 정착하면 곧 점령지역을 개척·개간하여 착수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문구문화 유적과 이에 앞서 1956년에 발굴한 앙소문화(仰韶文化 : 약 4000년전) 유적, 용봉문화(龍鳳文化) 그리고 홍산문화 유적의 수준을 종합하여 볼 때 배달국으로부터 대조선제국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 고대사의 역사적인 실존은 틀림없는 사실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의 역사학자 노간(勞幹)은, “고대에 있어서 중국의 동서는 종족으로나 문화적인 특징이 서로 다르다. 서방측은 하(夏), 은(殷), 주(周)를 주축으로 하는 화하족(華夏族)이, 동방측은 비한어계(非漢語系)의 동이족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적으로도 화하족은 채도문화(採陶文化) 그리고 동이족은 흑도문화(黑陶文化)로 양자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흑도문화는 전 밝해만[渤海灣] 연안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까지 깊숙이 전파되었으므로 고대사에 있어서는 현 중국의 동쪽이 모두 동이족의 영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명쾌하게 단언하였다.
참고로 동이를 뜻하는 큰활민족[大弓民族]의 ‘이(夷)’자는 역사의 초기부터 갑골문에 뚜렷이 새겨져 있으나 한족(漢族)의 ‘한(漢)’자는 A. D 220년이 되어서야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면 한자(漢字)는 과연 중국 글인가?
중국에 대한 존화사대(尊華事大) 사상(思想)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이씨조선 500년 동안의 유림학자들에게는 한문자는 성스러운 문자였다.
그런데 최근 농초(聾樵) 박문기(朴文基)씨를 비롯한 여러 한학자들이 한문자는 애초에 우리 동이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초는 최초의 한자들이 중국식의 언어가 아닌 우리 식(알타이어)의 말과 뜻으로만 풀어지는 놀라운 예문을 무수히 제시하였다.
이것은 한자가 중국 황제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엎은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을 하나씩 주의 깊게 살피던 중 뜻밖의 복음서를 만나게 되었으니 『금문의 비밀(김대성 엮음)』과 『금문신고(金文新攷)』였다.

갑골문

『금문신고』(駱賓基-本名: 張璞君 1917~1994)를 해석하여 소개한 소남자(召南子)1)의 증언에 의하면, 『금문신고(金文新攷)』는 1987년에 중국산서인민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검열하던 중국 사회과학원의 학자들이 책의 내용에 무척 당황하며 이미 배포된 책들을 황급히 회수하여 대부분의 책들은 빛을 보기도 전에 압수되는 운명을 맞았다. 다행히 소수의 선발매 책들이 벌써 뜻있는 학자들의 손에 넘어가버린 후여서 완벽하게 은폐하려던 그들의 음모는 실패하고 말았다.

상형문자인 금문(金文)이란?

상고금문(上古金文) : B. C 5000~6000년
오제금문(五帝金文) : B. C 4500~2000년(三皇五帝)2)
은주금문(殷周金文) : B. C 1800~1100년(갑골문)
춘추금문(春秋金文) : B. C 1134~ 250년
대전(大篆)→소전(小篆) : B. C 250~210년 진시황의 통일문자 소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의 금문은 전·후한(B. C 206~219년) 때 이르러 『예서(隸書)』와 『해서(楷書)』로 다시 정리되면서 한문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한자의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중국학계에서는 그동안 상고금문을 해득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상고금문으로 기록된 삼황오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으므로 귀중한 고대의 역사를 신화와 전설시대로 설정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20세기에 이르러 금문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한평생을 받친 소설가 낙빈기에 의하여 4500여년 금문의 비밀이 풀어지게 되었다.
낙빈기는 청동기와 갑골에 새겨진 1만여 글자 중 겨우 1천여 자만 해득하는데 성공하였을 뿐인데도 한국과 중국고대사에 얽힌 비사(秘事)들이 낱낱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고사 기록인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를 묶어놓은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정확성이 입증된 것이다.


금문신고(金文新攷)
1987년, 山西人民出版社

1) 소남자(召南子-金載燮 : 韓國文字學會長)

2) 삼황오제(三皇五帝)
삼황은 일반적으로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太皇)) 혹은 복희(伏犧),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말하는데 후자가 좀더 역사적인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방훈, 제순중화 등이다(사마천의 『사기』).

금문(金文)이란 청동기로 만든 제기, 농기구, 무기들에 새겨진 옛 글, 즉 원시 상형문자를 말하는데, 지금까지 중국의 한자로만 알았던 이 글들의 뜻과 발음이 놀랍게도 우리의 소리 말에 의해서 비로소 정확하게 풀이된다고 소남자 선생은 말한다.
최초에 신농계(神農系)의 발음은 배달국과 같은 본음(本音)이었고 황제계(黃帝系)는 지방 사투리에 해당하는 변음이었으나 역사가 흐르면서 식민지 지배계층인 동이 배달족이 토착화되면서 변음이 본음으로 바뀌어갔다. 중국인들이 신농 당시의 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본음에 해당하는 배달한국의 소리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금문은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대행산 이동지역과 황하의 북쪽, 흥안령 이남과 요령지방 그리고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흑룡강과 두만강 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인 밝해 연안의 것들은 은나라의 것들보다 연대가 훨씬 더 오래되어 갑골문이 본래 동이족의 문자였음을 알게 한다. 즉 ‘금문(金文)’으로 부르고 있는 원시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동이(東夷)의 말과 뜻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부사년(傅斯年)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최근 산동, 강소, 안휘성 등지에서 발굴되는 고쥬신식[古朝鮮式] 분묘(墳墓)들을 근거로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족이 세운 나라”라고 학계에 보고하였다.
또 『만성통보(萬姓通譜)』에도 “은상(殷商)은 단백달(檀伯達)의 후예”라 기록하고 있으니 박달[밝달]과 단백달은 같은 뜻이 아닌가. 심지어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사마천의 『사기』조차도 “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화족(殷曰夷周曰華丈云東曰夷西曰夏)”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설명한 서한사(西韓史) 가운데 상고사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배달한국의 우사부 장관이며 태우의 한웅의 막내 황자인 태호 복희가 화족 정벌군을 이끌고 서녁[西進]으로 나아가 화산족의 반란을 평정한 후, 그곳에 나라(分國)를 세웠다. 복희는 진(陳,지금의 河南省)에 도읍하고 본국의 승인을 얻은 후 총독(總督)의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다. 그는 치세 중에 팔괘(八卦)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고, 혼인법을 제정하여 인륜의 도를 밝히는 등 화하족을 문명으로 이끄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복희가 붕(崩)한 후 여와[女휶]가 뒤를 이었고, 왕위는 공공씨(工共氏)를 거쳐 15대 무회씨(無懷氏)에 이르렀다. 이때 신농씨(神農氏)가 일어나 복희의 나라를 치고 도읍을 진(陳)에서 산동성의 곡부(曲阜)로 천도하여 다시 8대를 전하다가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헌원(軒轅) 황제에게 망하고 만다.

이상이 한국과 중국 상고사의 핵심 내용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간행된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를 통하여 같은 맥락의 역사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상고금문(上古金文) 연구에 자신의 전생애를 바친 낙빈기는 신농과 헌원을 동시대의 사람들로 보고 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농과 헌원이 서로 겹겹사돈간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밝혀냈다.

금문(金文)
금문이란 청동기 등 금속에 새겨진 그림글자를 말한다.


이 새로운 학설에 접한 필자는 낙빈기의 주장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았고 그 결과 낙빈기의 주장이 훨씬 더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되어, 학자의 양심에 따라 『대쥬신제국사』 내용에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문자(漢文字)는 과연 무엇일까?
진(秦)나라의 이사(李斯)는 주문(周文, 大篆)을 증손(增損)하여 진전(秦篆, 小篆)을 만들었는데 이를 다시 진시황(秦始皇) 때 정막(程邈)이 일반 백성들이 쉽게 쓰도록 소전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예서(隸書)』라 하였다. 예서의 획을 더욱 단순화시켜 실용성을 높인 것이 『해서(楷書)』인데, 이것이 오늘날의 한문(漢文)인 것이다.

사실 갑골문의 상형문자들이 중국인들의 한문이 아니고 우리 동이의 문자였으며 그 글의 뜻은 알타이어의 소리글로서만 해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농초 박문기씨 등이 주장하였다. 그런데도 잘못된 선입감에 빠져 그들의 주장에 더 일찍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