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제2장 한웅시대-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 ③

자연정화 2012. 8. 13. 17:06

출처 : 다물넷

제2장 한웅시대-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 ③

배달한국 제6세 천황 다의발 한웅
[倍達桓國 第6世 天皇 多儀發 桓雄]




개천(開天) 481년(임술년) : B. C 3419년 만승지존(萬乘之尊) 배달한국의 천황에 즉위한 다의발 천황은 오랜 세월 동안 황태자로서 국정에 참여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천부력(天符曆)1)을 만들었다. 사실 그동안 써오던 책력이 불완전하여 농사에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으므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좀더 완벽한 책력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1) 천부력(天符曆)
옛 기록에 신시(神市) 배달국의 초기에 벌써 『천부경(天符經)』의 뜻을 풀어 만든 책력(冊曆)이 있었다. 이때는 계해(癸亥)를 썼는데 계(癸)는 계(啓)요, 해(亥)는 핵(核)이니, 일출(日出)의 뿌리다.



배달한국 제7세 천황 커련 한웅
[倍達桓國 第7世 天皇 居連 桓雄]




개천(開天) 579년(경자년) : B. C 3321년 커련 한웅[桓雄]이 천황위에 올랐다. 꾸준한 발전을 계속하던 세계 최고(最古)의 배달국은 마침내 나라의 틀을 완전히 갖추었다. 아직은 부족사회(部族社會)나 추방사회(酋邦社會)2)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지만, 수밀이국(須密爾國)3)도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고 족의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2) 이민족들 중에서는 나일강 유역에서 도시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이집트인들이 제 나름대로 문명의 싹을 피우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 추방사회 : 부족사회보다 규모가 커진 형태의 추장 중심의 사회.

3) 수밀이국(須密爾國)
슈메르(Sumer) 서녘 멀리로 진출한 12국 중 하나.



배달한국 제8세 천황 안부련 한웅
[倍達桓國 第8世 天皇 安夫連 桓雄]




개천(開天) 660년(신유년) : B. C 3240년 안부련 한웅은 21살의 나이에 배달국의 제8세 천황에 즉위(卽位)하였다. 이때 태백산의 북녘에 비서갑(斐西岬)의 후손으로 고시(高矢)씨가 있었다. 명문가 고시씨의 자손 중에 소전(少典)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매사에 책임감이 투철하여 천황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B. C 3240년, 신유년에 배달한국의 식민지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강수(姜水) 지방에서 반란의 움직임이 보이자 천황은 곧 소전 장군을 파견하였다. 복희씨에 이은 두번째 화족정벌 출정이었다.
소전씨(少典氏)의 출정에 대해서는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천황의 특명을 받고 임지로 떠난 소전은 무사히 반군을 진압하고 강수 지방의 총독이 되어 주둔하면서 성씨(姓氏)를 ‘강수 지방의 총독’이라는 의미로 강씨(姜氏)로 정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고선(李固善)의 『심당전서』에 의하면, 유웅국(有熊國)은 소전씨(배달한국의 선주 토착세력가인 명문 웅씨족의 나라)의 이름을 따라 그 임금의 호칭을‘소전’이라 하였다. 이로써‘소전’은 유웅국의 왕호로서 세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역사기록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갈래인 만주세력이 태초부터 지속적으로 중국을 지배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황제 헌원 이전까지의 중국역사는 우리 동이족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산족으로 출발한 화족들은 아직 민족적인 정체성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상태여서, 큰활(大弓=夷)을 쓰는 기마(騎馬) 동이민족(東夷民族)의 세찬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며 그나마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던 것이다.




▼ 역대로 중국대륙을 정복하여 식민통치 했던 우리의 동이국가들
태호복희(太?伏羲)→소전(少典)→가우리(九黎)→청구(靑丘·蚩尤天皇)→은(殷)→선비(鮮卑)→연(燕)→거란(契丹·遼)→김(金)→몽골(蒙古)→후김(後金·大淸帝國)


배달한국 제9세 천황 양운 한웅
[倍達桓國 第9世 天皇 養雲 桓雄]




신라 말엽의 승려 원동중(元董仲)은 『삼성기전(三聖紀全)』에 “신시개천(神市開天) 733년(갑술년) B. C 3086년에 양운 한웅께서 배달한국의 제9세 천황위에 오르셨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재위 동안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서들을 참고해 보았으나 별로 큰 사건이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평화로운 태평성대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배달한국 제10세 천황 갈고 한웅
[倍達桓國 第10世 天皇 葛古 桓雄]




개천(開天) 829년(경술년): B. C 3171년에 갈고 한웅께서 배달국의 제10세 천황위에 등극(登極)하였다. 갈고 천황4)은 서쪽변경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충돌이 끊이지 않음을 염려했다. 마침 강씨(姜氏-少典)계5)가 유웅국의 승인과 자치권을 요구하자, 갈고천황은 특사를 파견하여 공상(空桑)을 국경으로 하도록 승인하니 이것이 유명한 공상협약(空桑協約)6)이다.


4) 갈고 천황
갈고 천황의 또 다른 이름은 독로한(瀆盧韓)이다.

5) 강씨(姜氏-少典)계
당시 강수(姜水) 주변을 통일하고 유웅국(有熊國-河南省,新鄭)을 세운 절대적 맹주였다.

6) 공상협약(空桑協約)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강씨의 후손인 신농(神農)과 협약을 맺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아마도 시간상의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맺은 국경협정은 양측에서 서로 존중하여 배달국 제14세 자오지(慈烏支) 한웅이 천황위에 오를 때까지 약 350여년 동안 잘 지켜졌다




배달한국 제11세 천황 커야밝 한웅
[倍達桓國 第11世 天皇 居耶發 桓雄]




개천(開天) 927년(경인년) : B. C 2971년 커야밝 한웅은 신시 배달국의 11세 천황위에 즉위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쇠붙이를 다루는 기술이 크게 향상된 듯하다. 인간이 처음 쇠붙이를 다루기 시작한 때를 대략 기원전 5천년 경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쇠의 제조기술이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미 여러 문헌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철을 뜻하는 최초의 상형문자는 쇠를 뜻하는 ‘금(金)’자와 우리 민족을 뜻하는 ‘이(夷)’자를 합친 ‘철()’자로, 이는 인류문명에 철을 등장시킨 주인공이 동이족이었음을 입증하는 문화사적 증거자료이다. 초기의 쇠는 다루기 쉬운 놋쇠의 일종으로 구리(Cu)와 아연(Zn)을 합금하는 정도였으나 점차 합금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음 단계인 청동(靑銅)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기초적인 합금기술의 발달은 활과 창을 비롯하여 우수한 전투무기를 제조하여 철갑병으로 무장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철갑으로 무장한 이들 기마(騎馬) 병사들이 바람처럼 달리면 글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다.
고대 국이 어떻게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며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 이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쇠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것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방짜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
방짜는 구리(Cu)와 주석(Sn)을 합금하여 얻는다. 청동, 황동(놋쇠), 백동, 적동 등은 모두 구리와 합금한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인들에게 전승되고 있는데, 한민족 특유의 방짜기술은 절묘한 합금기술의 결정체로, 현대의 발달된 과학기술로도 흉내내기 힘든 경이적인 민족전통 기술이다.


배달한국 제12세 천황 주무진 한웅
[倍達桓國 第12世 天皇 州武愼 桓雄]




개천(開天) 1019년(임술년): B. C 2879년, 주무진 한웅님은 커야밝 천황의 뒤를 이어 신시 배달국 제12세 천황에 올랐다.
아직 크고 작은 전쟁이 사방에서 빈번하였으므로 병사들의 무기(武器)와 군사기술이 원시적인 틀을 벗고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화살촉, 장단검(長短劒), 투창(投槍), 방패(防牌) 등의 발달은 전투 행위가 매우 전문화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의 전투 행위가 단순한 종족을 단위로 진행되었던 데 비해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한 집단적 행위로 의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족오(三足烏)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전통적으로 해(태양) 속에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고 믿어 왔다. 이런 신념의 세계를 주술적(呪術的)인 의미로 간단하게 생각하여 버리기엔 우리 문화적 정서(情緖)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므로 그 의미를 상고해보기로 한다.

옛날의 임검이나 귀족들은 저승에 가서도 이승과 동일한 생활을 유지하려는 염원에서 그들이 애용하던 살림살이는 물론 타고 다니던 말까지 함께 순장(旬葬)하고, 심지어는 생전에 같이 살던 처와 첩까지 산 채로 무덤 속에 매장하였다.

우리의 옛 고분을 발굴해보면, 일월성신(日月星辰)과 동서남북 방위를 상징하는 사신도(四神圖), 즉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하늘의 별자리인 28수(二十八宿) 등으로 고분의 벽들을 장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삼족오 역시 고대 우리 선조들이 남긴 고분 벽화 속에 그 모습이 남아 있다.
특히 고구려 때 조성된 고분 벽화 가운데는 해(太陽 : 태양) 속에 삼족오가 뚜렷하게 들어 있는 모습이 있다. 혹자는 태양 속의 흑점이 검은빛으로 나타나서 마치 까마귀의 모양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달 속에서 떡방아를 찧는 옥토끼의 모습을 찾아내듯이...

그러면 왜 삼족오일까?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문헌의 음양설에는 “양수(陽數)는 하나에서 일어나 셋에서 완성된다.”고 하였듯이 양(陽 : 太陽)의 대표적 상징인 해 속에 신조(神鳥)인 까마귀의 다리를 세 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삼족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