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제2장 한웅시대-신농(神農) ①

자연정화 2012. 8. 13. 17:09

출처 : 다물넷


제2장 한웅시대-신농(神農) ①


신농(神農)

배달한국의 식민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적제’에 임명된 신농은
‘우가(牛加)’로서 농사와 목축을 발전시켜 ‘농사의 신(神)’으로 추앙되었다.



염제 신농(炎帝神農)


신농은 호북성 수현(隨縣) 역산(歷山)에서 양족(羊族:염소)인 고시씨(高矢氏)의 방계후손으로, 웅족씨(熊族氏) 출신인 소전장군(少典將軍) 강씨(姜氏)계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시 배달한국의 초기부터 병부(兵部)의 최고 권력을 독점하여 세습하던 명문 치우씨 가문(蚩尤氏家)의 왕녀(王女) 강씨(姜氏)이다. 신농의 아버지는, 복희씨(伏羲氏) 나라의 후계자 무회씨(無懷氏)를 축출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본국 정부의 최고 세력가인 치우씨(蚩尤氏)의 여인과 정략결혼에 성공함으로써 문책을 모면하고 오히려 혁명정부의 인정을 받은 듯하다.

위의 문장 중에 보이는 웅씨(熊氏)의 출처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이다. 인용한 문구를 다시 살펴보면, “안부련 한웅의 말기에 웅씨에서 갈라져나간 사람 중에 ‘소전’이 있었는데 그는 한웅의 명을 받들어 강수 지방의 군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監兵于姜水).”라고 풀이된다. 즉 소전이 갈라져나온 곳이 웅(熊, 곰)씨가 아닌 웅(雄, 한웅)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전은 곰족[熊族] 출신이 아니라 안부련 한웅[桓雄]의 황족으로 소위‘ Royal Family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웅의‘웅(雄)’자가 같은 발음이면서도 다른 뜻을 가진 곰 ‘웅(熊)’자로 잘못 쓰인 결과이다. 소리를 뜻글인 한문자로 표기하면서 발생된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우리 고대사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웅녀(熊女)’의 경우다. 쥬신제국[朝鮮帝國]의 시조이신 단군(檀君壬儉) 한웅의 황비를 ‘웅녀(雄女)’로 쓰지 않고 ‘웅녀(熊女)’로 잘못 표기함으로써 우리 한민족을 하늘을 대신한 한웅의 자손[天孫族]이 아닌 곰의 새끼들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웅가의 출신으로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인 신농씨(神農氏)가 우리와 같은 동이계의 배달민족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마천은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 신농의 형상을 ‘인신우수(人身牛首)’라고 표현하였다. 즉 ‘사람의 몸에 소머리’라는 것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은 사마천이 이민족인 신농을 폄하시킨 결과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농의 머리가 소머리였다’는 증거는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소머리로만 해석했던 우수(牛首)는 신농이 배달한국의 우가(牛加)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시 배달한국에는 운사부(雲師部), 우사부(雨師部), 풍백부(風伯部) 이외에도 5가(五加)의 관직제도가 있었다. 5가 중의 수석장관이 바로 우가(牛加)인데, 그의 소임은 백성들의 식생활에 필요한 농사나 목축업 등 요즈음의 농수산부 소관의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한웅 천황이 고시씨에게 명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을 관장하게 하니, 고시씨는 짐승을 잡아 기르는법, 그리고 불씨를 쉽게 만드는 법들을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이것이 바로 고시씨가 우가(牛加)의 벼슬에 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농은 고시씨의 직계후손으로 대대로 이어오는 우가의 벼슬을 그대로 세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당시 신농의 벼슬은 우가(牛加, 司農官)였고, 따라서 농사와 목축사업에 진력하여 중국인들로부터 ‘농사의 신(神農)’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시와 우가의 임무는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記)」에 “고시례(高矢禮) 역시 고시(高矢)와 같은 뜻으로 이를 주곡(主穀)”이라고 하는 데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조대기(朝代記)』가 소개하는 5가(五加)의 벼슬과 그 장관들이 주관하는 임무(五事)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①우가(牛加)-주곡(主穀) 곡물생산과 축산업, ②마가(馬加)-주명(主命) 사회복지 사업, ③구가(狗加)-주형(主刑) 검경업무, 사회질서 유지, ④저가(猪加)-주병(主病) 의료활동, 신약개발, ⑤양가(羊加,혹은 鷄加)-주선악(主善惡), 사법부.






중국인의 시각으로 그린 신농의 모습이다. 머리 위에 그려진 두 개의 검은색 뿔이 흥미롭다.


만주(滿洲)의 대왕촌 통구평야에 있는 고가우리(高句麗)의 오회분 5호묘 널방벽화에 그려져 있는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농(神農) 모습.

우가(牛加之長) 신농(神農)

신농은 어린시절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천주산(天主山, 岐山) 아래 강수(姜水)에서 양(목장)치기로 자랐다. 신농은 당시 모계사회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 성(姓)인 강씨를 성씨로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고기(古記)에 따르면 신농계가 강수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곳에 그대로 정착하였으므로 강수(姜水)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강씨(姜氏)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신농이 동모제(同母弟)에게 유웅국(有熊國)의 왕권을 양보하고 강수를 떠나 열산(烈山)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동생과의 권력싸움에서 패하여 열산으로 쫓겨났다는 뜻이다.

형제들이 왕권을 놓고 충돌하자 피를 부를 것을 염려한 신농의 어머니 강씨는 모종의 중재로 양측을 서로 만족시키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그것은 유웅국의 왕권은 동생에게, 그리고 고시(高矢)씨 이후로 내려오는 우가(牛加)의 벼슬을 신농에게 세습시킨 것이다.

우가의 장(牛加之長)이 된 신농은 새로운 임지인 열산으로 옮겨오게 되고 이때부터 신농은 그의 숨은 실력을 십분 발휘하기 시작한다.

열산(烈山)의 토지를 살펴본 신농은 우가(牛加)의 장관답게 우선 종자 오곡재배(種子五穀栽培)의 영농법(營農法)을 보급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하여 본국인 배달한국으로부터 씨종자를 수입하게 되는데, 이때의 상황이 놀랍게도 대만에서 발행된 『중국고대신화(中國古代神話)』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농업의 신인 신농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주위의 땅에는 다만 9개의 우물(九井)만 있을 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우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한 우물이 출렁이면 나머지 우물들도 모두 출렁거렸다. 신농이 백성들을 모아 오곡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수많은 곡식 종자(種子)들이 떨어졌다. 신농이 이를 주워 밭을 갈고 심은 결과 백성들이 곡식(穀食)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비록 신화의 형식을 취하여 전해지고 있지만 의도적인 곡필이 난무하는 사마천의 『사기』보다 훨씬 더 역사적인 진실에 접근해 있다고 판단된다.

다음은 『중국고대신화』를 분석한 것이다.

① 신농이 태어났을 때 세상은 배달한국이 지배하는 9개의 족속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당시는 우리 한민족을 9이(九夷), 9한(九桓), 9려(九黎) 등으로 나누어 부르던 시절이어서 이들을 9정(九井, 9개의 우물)이라고 한 것이다.

② 이 ‘우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것으로, 9한이 모두 배달한국 한웅님의 지배하에 이루어진 동맹체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③ 우가(牛加)의 장관 벼슬에 올라 새로운 임지인 열산으로 옮겨온 신농이 아직 미개한 토인(土人)들에게 농작기술을 전수하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④ ‘하늘에서 곡식의 종자가 떨어졌다.’라는 것은 신농이 본국[宗主國]인 배달한국으로부터 씨종자를 수입하였거나 원조를 받았다는 뜻이다. 한웅님은 천황(天皇)이고 천황이 계신 곳은 곧 하늘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반 상식과는 달리 당시의 밝해만 지역 농경기술은 화산지역보다 월등히 앞섰음이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⑤ 곡물생산과 목축산업을 관장하는 것이 우가의 책무임을 생각할 때 신농은 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우가(牛加)의 장관 신농의 혁신적인 곡물생산 사업은 날이 갈수록 더욱 번창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향상되었다. 신농의 다음 목표는 농기구의 개량사업이었다. 신농은 이를 위하여 배달한국의 선진적인 농기구를 수입한 후 이를 모방하여 대량으로 생산하여 보급하니 매년 풍작을 이루었다. 그러자 인근 지방에서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신농은 어느새 열산 일대의 막강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영민한 신농은 농경사업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그동안 가우리[倍達國]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약초들을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기 위하여 험준한 산골을 헤매었다. 그 결과 산삼(山蔘)이나 불로초(不老草) 등을 제외한 약초들은 모두 현지 산(産)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식량의 대량생산을 성공시켜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하고, 농기구를 개량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켰으며, 이제는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의약품의 현지조달에 성공한 것이다. 신농이야말로 ‘우가’의 책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인물이었다.

※ 신농의 출생년도에 관한 고대사의 기록들을 보면 서로간의 시간차가 수백년씩 나기도 한다. 이는 역사의 기록과 역년의 체계가 완벽하지 않았던 고대의 사건인 점과 역사의 주인공과 그가 속한 가문의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 등을 비롯하여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물론 지속적인 연구로 보다 정확한 연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보다 중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본서에서는 낙빈기의 금문해석을 가장 정확한 것으로 보고 역사 복원의 저본으로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또한 본서에서 인용된 문구들에서 보이는 시간의 차이는 인용한 기록에 따르고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는 좀더 편리한 생활도구를 찾아 서로 물물교환하는 새로운 교역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교역방식에 서툰 백성들은 서로간의 이해관계를 공정하게 조절하지 못하고 분쟁이 잦았다. 그러자 신농은 공평한 교역이 가능하도록 관이 관리하는 ‘시장(市場)’을 개설하였다.

“신농이 일중(日中, 한낮)에 시장을 열어 물건이 거래되도록 했다.”, “신농이 시장을 열어 교역에 힘썼다.” 등 해당 기록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그러나 서로간에 더 큰 이익을 얻으려는 거래분쟁은 계속되었고 종종 힘을 앞세워 불공정한 거래를 성공시키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공정한 거래를 위하여 고민하던 신농이 마침내 고안해낸 것이 ‘돈’ 즉 화폐의 이용이다. 신농은 최초로 돈을 만들어 거래에 공정을 기하도록 하였다.

이 최초의 돈에 신농은 그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자 문양을 새겨넣으니 이것이 최초의 상형문자였다. ‘| ’자는 신농을 상징하는 그의 이름자였던 것이다.
B. C 4500년 각종 청동기에 고대인들이 새긴 원시 상형문자(象形文字) 속의 기년을 해석한 낙빈기(駱賓基)는 B. C 2500년에 이르러 신농(神農)이라는 글자가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고 고증하였다.
청동기에 새겨진 신농은 B. C 2517년에서 2475년까지 43년간 제위에 있다가 황제의 아들 소호 김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산 일대에서 크게 세력을 일으킨 신농은 이곳에서 곡물생산과 약초를 채집하여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고 크게 민심을 얻은 후에,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여와씨의 나라를 찬탈하였다.
새나라의 임금이 된 신농은 곧 조공사(朝貢使)를 본국정부에 파견하여 신생 제후국이라는 승인을 얻음과 동시에 제국의 5제(五帝) 관직 중 남방 수령에 해당하는 적제(赤帝)의 지위를 획득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신농(神農)은 농사법을 알려주어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게 한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고대 중국인들이 ‘농사의 신(神農)’이란 뜻으로 부른 이름이다. 그러나 세월이 변하여 중국인들 사이에 점차 중화의식이 싹트자 사마천 같은 인물은 한족(韓族)에 대한 열등감을 없애려고 신농을 폄하하기에 이른다. 중국인들은 신농이 동이족의 수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은망덕하게도 신농의 모습을 괴물형상으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청동기로 만들어진 최초의 화폐인 조패(셕貝)에 신농을 상징하는 ‘I’이 새겨져 있다. (『금문의 비밀』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