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 신농(炎帝神農)
신농은 호북성 수현(隨縣) 역산(歷山)에서 양족(羊族:염소)인 고시씨(高矢氏)의 방계후손으로, 웅족씨(熊族氏) 출신인 소전장군(少典將軍) 강씨(姜氏)계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시 배달한국의 초기부터 병부(兵部)의 최고 권력을 독점하여 세습하던 명문 치우씨 가문(蚩尤氏家)의 왕녀(王女) 강씨(姜氏)이다. 신농의 아버지는, 복희씨(伏羲氏) 나라의 후계자 무회씨(無懷氏)를 축출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본국 정부의 최고 세력가인 치우씨(蚩尤氏)의 여인과 정략결혼에 성공함으로써 문책을 모면하고 오히려 혁명정부의 인정을 받은 듯하다.
위의 문장 중에 보이는 웅씨(熊氏)의 출처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이다. 인용한 문구를 다시 살펴보면, “안부련 한웅의 말기에 웅씨에서 갈라져나간 사람 중에 ‘소전’이 있었는데 그는 한웅의 명을 받들어 강수 지방의 군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監兵于姜水).”라고 풀이된다. 즉 소전이 갈라져나온 곳이 웅(熊, 곰)씨가 아닌 웅(雄, 한웅)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전은 곰족[熊族] 출신이 아니라 안부련 한웅[桓雄]의 황족으로 소위‘ Royal Family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웅의‘웅(雄)’자가 같은 발음이면서도 다른 뜻을 가진 곰 ‘웅(熊)’자로 잘못 쓰인 결과이다. 소리를 뜻글인 한문자로 표기하면서 발생된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우리 고대사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웅녀(熊女)’의 경우다. 쥬신제국[朝鮮帝國]의 시조이신 단군(檀君壬儉) 한웅의 황비를 ‘웅녀(雄女)’로 쓰지 않고 ‘웅녀(熊女)’로 잘못 표기함으로써 우리 한민족을 하늘을 대신한 한웅의 자손[天孫族]이 아닌 곰의 새끼들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웅가의 출신으로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인 신농씨(神農氏)가 우리와 같은 동이계의 배달민족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마천은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 신농의 형상을 ‘인신우수(人身牛首)’라고 표현하였다. 즉 ‘사람의 몸에 소머리’라는 것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은 사마천이 이민족인 신농을 폄하시킨 결과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농의 머리가 소머리였다’는 증거는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소머리로만 해석했던 우수(牛首)는 신농이 배달한국의 우가(牛加)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시 배달한국에는 운사부(雲師部), 우사부(雨師部), 풍백부(風伯部) 이외에도 5가(五加)의 관직제도가 있었다. 5가 중의 수석장관이 바로 우가(牛加)인데, 그의 소임은 백성들의 식생활에 필요한 농사나 목축업 등 요즈음의 농수산부 소관의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한웅 천황이 고시씨에게 명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을 관장하게 하니, 고시씨는 짐승을 잡아 기르는법, 그리고 불씨를 쉽게 만드는 법들을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이것이 바로 고시씨가 우가(牛加)의 벼슬에 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농은 고시씨의 직계후손으로 대대로 이어오는 우가의 벼슬을 그대로 세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당시 신농의 벼슬은 우가(牛加, 司農官)였고, 따라서 농사와 목축사업에 진력하여 중국인들로부터 ‘농사의 신(神農)’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시와 우가의 임무는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記)」에 “고시례(高矢禮) 역시 고시(高矢)와 같은 뜻으로 이를 주곡(主穀)”이라고 하는 데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조대기(朝代記)』가 소개하는 5가(五加)의 벼슬과 그 장관들이 주관하는 임무(五事)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①우가(牛加)-주곡(主穀) 곡물생산과 축산업, ②마가(馬加)-주명(主命) 사회복지 사업, ③구가(狗加)-주형(主刑) 검경업무, 사회질서 유지, ④저가(猪加)-주병(主病) 의료활동, 신약개발, ⑤양가(羊加,혹은 鷄加)-주선악(主善惡), 사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