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제2장 한웅시대-신농(神農) ②

자연정화 2012. 8. 13. 17:10

출처 : 다물넷


제2장 한웅시대-신농(神農) ②


염제 신농(炎帝 神農)

신농은 염제(炎帝)라고도 불린다. 『손자병법』의 손자(孫子)는 “황제가 염제를 정벌했다…… 황제는 남쪽으로 적제(赤帝)를 정벌하기 위하여 판천에서 싸웠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적제는 두말할 것 없이 신시 배달한국의 5제 장관인 적제(赤帝), 백제(白帝), 현제(玄帝), 황제(黃帝), 청제(靑帝) 등 벼슬 가운데 하나이다. 염제의 ‘염(炎)’자는 ‘불탈 염’, 적제의 ‘적(赤)’자 역시 ‘붉은 적’을 뜻하므로 염(炎)과 적(赤)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염제(炎帝)’는 곧 ‘적제(赤帝)’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농은 당시 신시 배달한국의 적제 벼슬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일 천황에게 항복한 헌원에게 오히려 황제(黃帝)의 벼슬을 주어 중화족의 총독 임무를 수행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시 배달한국의 식민지 통치정책의 일환이었다.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소전(少典)의 별파(갈라져 나간 아들) 중에 공손(公孫)이 있었는데 목장일을 게을리해 크게 손해를 끼침으로 그 죄를 물어 헌구(軒丘) 지방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유배지에 그대로 정착하여 세력을 번성시키니 헌원(軒轅)의 무리들은 모두 그 후손들이다.”

이 기록을 풀어보면, 우가(牛加)의 벼슬에 있던 소전씨로부터 목장관리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헌원이 방만한

관리로 계속 적자를 내자 정부가 그 책임을 물어 헌구 지방으로 문책성 귀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헌원은 귀양지에 잘 적응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헌구 지역의 큰 세력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즈음, 여와의 나라를 탈취한 신농은 적제(赤帝)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근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영특한 신농은 곧 지방의 호족들과 정략 결혼을 맺음으로써 그의 힘을 확고히 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신농은 우선, 헌구 지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헌원과 결혼동맹을 맺었다. 때는 B. C 2517년(上元 甲子年)이었다. 임사씨의 아버지는 헌원이고, 어머니는 제2부인(제1첩: 신농의 조카)이었다.
당시는 지금의 부계사회와는 달리 모계를 중심으로 한 혈연사회이므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신농은 우선, 헌구 지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헌원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헌원의 누이인 임사씨(姙巳氏)의 조카를 함께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우선 신농의 첫째 부인은 헌원의 누이인 임사씨로 제1부인 처(妻:正妃)이고, 둘째 부인은 헌원의 조카로 제2부인 첩(妾 : 次妃)이다.
그러나 헌원의 부인들도 신농의 누이와 딸 뉘조(꾸祖·西陵)를 각각 제1부인 처(妻 : 正妃)와 제2부인 첩(妾夫人)으로 맞아들임으로써 서로가 장인과 사위가 되는 겹사돈(일명 누비혼인) 관계였다.
신농은 딸 뉘조(꾸祖·西陵)를 헌원에게 보내어 사위로 삼고, 헌원은 고모를 제1부인 처(妻 : 正妃)로, 그리고 딸을 제2부인 첩(妾 : 次妃)로 하여 신농에게 시집보내 누비사돈의 관계를 맺었다. 한편 헌원은 신농의 제1부인 정비(妻:正妃)가 낳은 딸 뉘조(꾸祖)와 결혼한 신농의 큰사위이고, 헌원의 아들인 소호 김천(少?金天)은 신농의 제2부인 첩(妾 : 次妃)이 낳은 딸 소진(小辰)에게 장가든 작은사위이다.
이러한 결혼관계를 현대인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시는 모계사회였고 혈족간의 강력한 결속만이 힘의 경쟁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던시절이었다.

적제(赤帝, 炎帝) 신농(神農)과 황제(黃帝) 헌원(軒轅)간의 복잡한 결혼관계를 확실하게 풀어 증명한 사람은 금문의 수수께끼에 매달려 평생을 외롭게 보낸 소설가 낙빈기(駱賓基)였다. 낙빈기는 적제 신농과 헌원 황제가 동시대의 사람들이었음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대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헌원의 공손족(公孫族)을 흡수한 신농족은 중원일대를 호령하는 최대·최강의 나라가 되었고 신농 역시 적제(赤帝)의 위상을 천하에 떨쳤다. 이제 신농은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하여 도성을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로 옮기고 본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공상의 이서(以西) 지방을 그의 영지로 승인받은 것 같다. 필자는 배달한국 제10세 갈고 천황과 맺은 공상협정이 사실은 이즈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적제
신시 배달한국의 5제 장관인 적제(赤帝), 백제(白帝), 현제(玄帝), 황제(黃帝), 청제(靑帝) 등 벼슬 명칭의 하나이다. 염제의 염(炎)은 불을 뜻하고, 적제의 적(赤)은 붉다는 뜻으로, 염(炎)과 적(赤)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염제(炎帝)’는 곧 ‘적제(赤帝)’이다.


뉘조(꾸祖)

헌원 황제의 부인 뉘조[꾸祖]가 농산물을 관장하던 우가(牛加) 신농씨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뉘조가 어릴 적부터 그녀의 아버지 신농을 따라다니며 농사법과 더불어 누에치는 법을 배운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뉘조는 이로부터 양잠술을 더 한층 발전시켜 당시의 의생활에 혁명을 일으킨 여인이다.

뉘조[꾸祖]의 ‘뉘(꾸)’자는 ‘여자(女)+밭(田)+실(?)’이 합쳐진 글자이다. 즉, ‘뽕나무 밭에서 실을 뽑는 여자’라는 의미이다. 이름의 둘째 자인 ‘조(祖)’자는 ‘조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뉘조’는 곧 ‘양잠술의 조상’이라는 뜻이 된다. ‘뉘(꾸)’자는 중국 발음으로 ‘lei’라고 하지만, 우리 발음으로는 ‘누, 뉘’ 등으로 발음되어 곧바로 ‘누에’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한자의 옛 발음이 우리 한민족의 발음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신농시대를 먼 원시시대나 전설시대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때는 벌써 양잠술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비단옷을 입고 호사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이는 마왕퇴(馬王堆) 유적에서 나온 잠자리 날개 옷을 보아도 확실하게 증명된다. 이러한 사실은 또 『산해경』에 “군자국(君子國) 사람들은 의관(衣冠 : 옷과 모자)을 하고 야사(野絲)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임을 입증한다. ‘야사’는 야생잠(野生蠶)이나 야생 목화(木花)였을 것이다.

1971년 12월 호남성의 장사 인근에서 서한 시대의 대후(大候) 이창(利蒼)의 무덤을 발굴하였는데, 이 무덤을 마왕퇴(馬王堆)라 한다. 마왕퇴의 출토품 중에는 부인의 복장이 다량 섞여 있는데, 그 견직물의 수준이 고대의 유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뉘조에 의한 양잠을 설명하고 있지만 누에실은 동물성 단백질로 된 섬유여서 쉽게 썩어버리고 남아 있는 물증이 거의 없어 옛 문헌에 의존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2000여년 전의 출토품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산동성(山東省) 대문구(大汶口)에서 6~7000년 전의 것으로 판명된 물레가락(紡鐘)이 발굴되어 뉘조 시절에 잠업(蠶業)이 이미 나라의 기간산업이었음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 중국에서 흔히 서릉(西陵)이라고 부르는 양잠(養蠶)의 신(神), 적제(赤帝) 신농(神農)의 딸이며 헌원(軒轅) 황제(黃帝)의 부인인 뉘조[꾸祖]가 누에를 기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Computer Art by Sanho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