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유배지에 그대로 정착하여 세력을 번성시키니 헌원(軒轅)의 무리들은 모두 그 후손들이다.”
이 기록을 풀어보면, 우가(牛加)의 벼슬에 있던 소전씨로부터 목장관리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헌원이 방만한
관리로 계속 적자를 내자 정부가 그 책임을 물어 헌구 지방으로 문책성 귀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헌원은 귀양지에 잘 적응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헌구 지역의 큰 세력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즈음, 여와의 나라를 탈취한 신농은 적제(赤帝)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근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영특한 신농은 곧 지방의 호족들과 정략 결혼을 맺음으로써 그의 힘을 확고히 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신농은 우선, 헌구 지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헌원과 결혼동맹을 맺었다. 때는 B. C 2517년(上元 甲子年)이었다. 임사씨의 아버지는 헌원이고, 어머니는 제2부인(제1첩: 신농의 조카)이었다. 당시는 지금의 부계사회와는 달리 모계를 중심으로 한 혈연사회이므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신농은 우선, 헌구 지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헌원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헌원의 누이인 임사씨(姙巳氏)의 조카를 함께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우선 신농의 첫째 부인은 헌원의 누이인 임사씨로 제1부인 처(妻:正妃)이고, 둘째 부인은 헌원의 조카로 제2부인 첩(妾 : 次妃)이다. 그러나 헌원의 부인들도 신농의 누이와 딸 뉘조(꾸祖·西陵)를 각각 제1부인 처(妻 : 正妃)와 제2부인 첩(妾夫人)으로 맞아들임으로써 서로가 장인과 사위가 되는 겹사돈(일명 누비혼인) 관계였다. 신농은 딸 뉘조(꾸祖·西陵)를 헌원에게 보내어 사위로 삼고, 헌원은 고모를 제1부인 처(妻 : 正妃)로, 그리고 딸을 제2부인 첩(妾 : 次妃)로 하여 신농에게 시집보내 누비사돈의 관계를 맺었다. 한편 헌원은 신농의 제1부인 정비(妻:正妃)가 낳은 딸 뉘조(꾸祖)와 결혼한 신농의 큰사위이고, 헌원의 아들인 소호 김천(少?金天)은 신농의 제2부인 첩(妾 : 次妃)이 낳은 딸 소진(小辰)에게 장가든 작은사위이다. 이러한 결혼관계를 현대인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시는 모계사회였고 혈족간의 강력한 결속만이 힘의 경쟁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던시절이었다.
적제(赤帝, 炎帝) 신농(神農)과 황제(黃帝) 헌원(軒轅)간의 복잡한 결혼관계를 확실하게 풀어 증명한 사람은 금문의 수수께끼에 매달려 평생을 외롭게 보낸 소설가 낙빈기(駱賓基)였다. 낙빈기는 적제 신농과 헌원 황제가 동시대의 사람들이었음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대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헌원의 공손족(公孫族)을 흡수한 신농족은 중원일대를 호령하는 최대·최강의 나라가 되었고 신농 역시 적제(赤帝)의 위상을 천하에 떨쳤다. 이제 신농은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하여 도성을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로 옮기고 본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공상의 이서(以西) 지방을 그의 영지로 승인받은 것 같다. 필자는 배달한국 제10세 갈고 천황과 맺은 공상협정이 사실은 이즈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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