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원의 흥기(軒轅의 興起)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의하면, “때마침 고명하신 나라의 대선인 자부(紫府) 선생이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완성하여 천황께 바쳤다. 자부 선생은 복희와 함께 공부했던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후손이다. 선생은 또 해(日)와 달(月)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五行)의 수리(數理)를 고찰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칠성력의 시작이다. 임검이 기뻐하며 자부 선인을 청구의 대풍산(大風山)에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살게 하였다.”
귀양지 헌구(軒丘) 일대의 민심을 장악하고 새로운 세력가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 헌원은 구가(狗加) 출신의 막강한 신농(神農) 적제(赤帝, 중국에선 炎帝)의 위협에 직면하여 묘책을 꾀하던 중 신농측과 누비결혼을 정략적으로 성사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신농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적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근신하던 헌원은 천하의 주인인 치우천황을 찾아뵙고 조공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기 위해 천도(天都, 神市)를 향해 길을 나섰다. 헌원의 천도방문 여정(旅程)은 동쪽의 가우리(九黎) 지방인 청구(靑丘)를 지나 밝해의 묘도열도를 건넌 후 다시 요동반도를 따라 천도에 이르는 것이었다. 청구를 지나던 헌원은 우연히 대풍산(大風山, 지금의 동래) 삼청궁에 그 유명한 가우리의 자부 선생이 내려와 계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이 사실을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황제가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진인을 만나다(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眞人).”라고 기록하여 청구의 삼청궁에 있는 자부 선생을 진인(眞人) 즉 신선(神仙)이라 하였다. 헌원은 이때 자부 선생의 문하에 들어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전수받고 비로소 우리의 신교 문화를 깨우친 후 이를 다시 풀어 『음부경(陰符經)』을 펴냈다. 이 책은 원래 세편[三篇]의 녹서(鹿書)로 썼는데 그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후세 사람들이 주석을 단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황제가 썼다고 알려진 『음부경(陰符經)』도 『삼황내문경』의 뜻을 풀어쓴 것인데 이것이 후세에 전수되면서 도교(道敎)의 기초가 되었다.
『삼성기 하』 편의 기록 중에 “헌원이 자부 선생을 찾아뵙고 『삼황내문경』을 받았다. 이밖에도 창힐(倉詰), 공공(共工), 대요(大撓) 등의 무리들도 자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하여 자부 선생이 동이(東夷)의 문화와 철학을 중국에 전수하여 큰 영향을 끼쳤음을 전하고 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와 국어(國語), 진어(晋語)는, “황제(黃帝)는 하남성 신정(新鄭)에 자리한 유웅(有熊)국의 왕 소전(少典)의 아들로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며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자라난 정통 이족(夷族)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기록들은 황제를 중국의 시조(始祖)로 모시면서도 황제가 사실은 정통(正統) 이족(夷族)으로 우리 동이(東夷)족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중국 최초의 임금이 동이족인 신농이고, 황제마저 동이족이라면 화족들의 선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결국 중국 상고 시대의 역사는 모두 동이족의 서한사(西韓史)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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